메뉴 건너뛰기

close

요즘 사찰답사의 분위기는 이론적이며 난해한 사상 등의 이해보다 불상, 석탑, 미술, 건축 등 예술적인 부분에 훨씬 관심이 많이 가지는 편입니다. 그러나 사상과 불교이론의 뒷받침이 없는 불교예술의 이해 또한 반쪽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이셨던 강우방님은 <법공과 장엄>이란 책에서 불교예술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법공(法空)이라 하는데 법공은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이나 예술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를 표현하게 위해 노력해왔다. 그래서 법공이란 진리를 우리가 바라보는 일상적인 것과는 다르게 표현하고자 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장엄(莊嚴)이라 했다. 장엄은 부처와 부처께서 가르친 모든 것에 대하여 적용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꾸미는 과정도 장엄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도 장엄이다. 그렇다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처의 가르침인 법공을 표현하고자 한 불교예술이 바로 장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장엄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요 불교의 가르침을 예술로 표현한 것이다."

@BRI@이 말을 요약하면 불교예술이란 성스러운 존재를 세속적인 형태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을 찾는 사람들은 불교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에겐 불교예술품이라 칭하는 대상은 믿음과 관련한 성스러운 존재이지만,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겐 하나의 나무, 돌, 쇠 등의 재료를 이용해 형식성과 구성미를 갖춘 작품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절에 있는 불교예술품은 사람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다르고 또한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 차이에 따른 팽팽한 긴장관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불교신자가 아닌 답사객이라도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절에서 행해야 할 최소한의 예절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절을 찾는 목적이 신앙이 아니라 답사라고 한다면 우리는 신성한 예술작품을 문화산업으로 상품화하는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성스러운 대상을 세속적 형태로 만들어 예술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이 답사라면 우리는 믿음이라는 주관적인 입장을 버리고, 형식적이고 구성미가 담겨있는 예술품이자 법공(法空)이 표현된 장엄(莊嚴), 즉 불교예술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먼저 불상과 그 조성원리를 살펴볼까 합니다.

불상이 등장하기까지

불교예술 즉 장엄(莊嚴)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은 신앙의 대상이 된 석가모니 부처의 모습을 만드는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당신께서 열반에 든 직후에는 그의 모습을 본떠 만든 불상(佛像)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불상뿐만 아니라 다른 불교예술마저도 거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열반이라는 개념의 이해와 석가모니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 남에게 의지하지 마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에 의지하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믿으며, 석가모니 당신께서 가르쳐 주신 내용대로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니, 따로 불상이나 믿음의 대상을 만들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의 궁극적 가치인 열반(涅槃)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절대적 경지이므로 그런 경지에 든 분을 어떻게 그림이나 조각으로 묘사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열반에 든 부처를 감히 형상화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창기 불교에서는 장엄이란 개념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 최고 최대의 완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산치대탑(사진제공 심바타)
ⓒ www.simbata.co.kr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든 지 수백 년이 지나고 난 뒤 중앙인도의 산치(Sanchi)와 바르후트(Bharhut)에 탑을 만들고 거기에 석가모니 부처와 관련된 설화를 새겼습니다. 그러나 이 설화에서조차도 부처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못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출가는 양산과 두 발자국으로 표현하였으며, 석가모니가 탄 것으로 짐작되는 말은 있는데 말 위의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하늘나라로 올라가 어머니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묘사할 때는 맨 아래와 꼭대기에 발자국이 찍힌 계단만 있을 따름입니다. 이처럼 산치와 바르후트의 예술가들조차 부처의 모습을 만들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고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불교 예술품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푸셰(A.Foucher)라는 프랑스의 불교학자가 대표적인데 그는 아주 초창기부터 불교의 4대 성지는 숭배의 대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숭배의 대상이다 보니 이 곳에서는 조잡하고 판에 박힌 방식으로 기념품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이것이야말로 최초의 소박한 불교 예술품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도 다시 나오면서 불상이 없던 시대를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합니다. 불상이 없는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선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든 직후부터 부처 숭배의 발전과정을 차근차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상이 없던 시대에 대한 이전의 해석은 부처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면 이제는 부처의 본성과 성격에 관해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살아있는 동안 한 사람의 스승이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생겨난 부처 숭배사상에 의해 그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완전히 극복해낸 특수한 인격으로 간주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석가모니는 인간도 아니며 신도 아닌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머리 위에 솟아오른 육계, 아주 긴 혀, 황금색의 피부 등과 같은 아주 특이한 신체적인 구조를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개념이 변하면서 불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도 서서히 생겨났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언제부터 어떻게 불상이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초창기 불교에서는 불상이나 불교예술이 쉽게 꽃피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불상의 등장

불교가 만들어진 이후 세월이 흘러 인도에서는 신애(信愛)를 나타내는 박티(bhakti)사상이 중심이 된 힌두교 신앙이 다시 등장합니다. 박티란 기도와 경배를 신에게 바치는 믿음과 봉헌을 말하는데, 불상이 없던 불교도 그 영향을 받아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박티사상의 힌두교와 당시의 불교는 서로 영향을 주며 교류하게 되는 일이 빈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께 바치는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예술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어떤 형체를 지닌 대상인 불상이 나타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러한 불상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북인도의 간다라(Gandhara)지역과 중앙 인도의 마투라(Mathura)지역에서 불상을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간다라와 마투라 중 어디서 먼저 불상을 만들었는가에 대해 많은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간다라에서 불상을 먼저 제작하였다고 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불상을 최초로 제작한 사람은 아기 예수가 태어날 즈음 인도에 정착한 그리스인이거나 아니면 이 시대에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인 인도인들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인 또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지방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부처의 모습을 만들면 사람들이 좋아할까를 고민하다가 그리스의 신을 모델로 삼아 그것을 인도화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이 간다라 불교 미술의 시초이이며 부처는 곱슬머리, 수염, 장식품으로 꾸며졌으며 고대 로마인들의 옷을 닮은 법복을 걸치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중앙 인도 마투라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한 토박이들은 부처의 모습은 정신적인 깨달음과 불교의 창시자로서 역동적인 힘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간다라와 전혀 다른 인도 고유의 모습을 많이 간직한 불교 예술을 만들어냈습니다. 인도고유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고 해서 마투라의 불상이 오히려 간다라보다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어디서 먼저 만들었는가라는 논쟁은 이만 접어두고, 시간이 지날수록 불상의 조성은 한량없는 공덕이라고 하여 불상조성을 권장하게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분수에 맞게 불상을 조성함에, 여러 가지 비단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금과 철 등의 쇠붙이로 만들거나, 전단향으로 조각하거나, 진흙 또는 나무 따위의 물건으로 조성한 불상이 손가락 하나의 크기와 같을지라도, 보는 자가 능히 부처의 모양임을 알게만 하면 그 사람이 받을 복은 매우 크다고 합니다. 불상을 조성한 사람은 윤회를 하더라도 가난한 집에 태어나지 않고, 태어나는 곳마다 업장(業障)을 제거한다고 합니다. 전생에 악업을 지은 자도 불상을 조성하고 참회하면 먼저 지은 죄가 모두 소멸된다고 하니 누구나 불상을 조성하여 공덕을 얻고자 하겠죠.

불상의 조성원리 : 32길상 80종호

간다라와 마투라 시대를 거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불상은 숭배의 대상이 되면서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닌 불상만의 고유한 구조와 형식을 갖추게 됩니다. 그 구조와 형식은 오래 전 베다시대부터 내려오던 위대한 지도자가 가져야 할 특징인 32대인상(大人相)을 바탕으로 합니다. 32대인상(大人相)이란 인도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위대한 사람만이 가지는 32가지의 신체적 특징을 말합니다.

불교가 32대인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을 비교해보면 됩니다. 이 두 지역의 불상은 전혀 다른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제작 기법이나 양식은 엄연히 다르지만, 원칙적인 특징을 보면 크게 다른 점이 없어 인도 고유의 32대인상을 근거로 제작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32대인상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32길상(吉相)이라 하였고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신체의 작은 특징 80가지를 만들어 80종호(種好)라 하였는데 불상을 만드는 형식은 모두 이 32길상 80종호가 근거가 되었습니다.

▲ 나발, 육계, 백호를 잘 보여주고 있는 부처의 머리(국립중앙박물관 소재)
ⓒ 김성후
한편 부처가 32길상 80종호를 가지는 특징적인 이유를 불교식으로 설명하면 전생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행한 결과 때문이라고 합니다. 경전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불상의 조성원리인 32길상 80종호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머리카락은 소라 모양의 나발(螺髮)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의 곱슬머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정수리에는 불룩 솟아올라 있는 육계(肉髮)가 있는데 이는 상투를 튼 사람의 특징을 변화시켜 만들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눈썹과 눈썹 사이 미간의 가운데 한 가닥의 하얀 털인 백호(白毫)이 나있고, 이빨은 하얗고 가지런하며,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있고, 두 어깨가 둥글고 원만하다고 합니다. 앞가슴은 단정하고, 피부가 부드럽고 자금색(紫金色)이며, 몸이 바르고 곧다는 등 상세한 내용을 모두 열거하지 않지만 보통의 사람과 다르게 표현하기 위한 특별한 모습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