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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워킹 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을 대상으로 한 농장 알선 광고. 오른쪽 교민잡지의 구인광고란. '워킹홀리데이비자 사절'이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 박해권

"시티에서는 관광이나 해야지, 일하기엔 조건이 너무 안 좋은 것 같아요."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 7개월째인 H(29)씨. 그간 오지를 돌며 포도 수확, 나무가지치기 등 농장일과 양고기 공장에서 포장을 하던 H씨는 멜버른에서 지낸 지난 한 달이 자신의 여정 중 가장 '별로'였다고 한다.

"일단 급여가 너무 낮더라고요. 근무 시간도 주 20시간 남짓밖에 주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무엇보다 한 번 시작하면 최소 6개월 이상 근무해야 한다기에 시작도 못 했어요."

H씨가 알아본 곳은 교포가 운영하는 PC방과 일식집. 각각 시급 8달러와 6달러를 제시했다. 그간 임시직을 하며 최저임금(약 15.5달러) 이상을 받아오던 H씨로서는 받아들이기 곤란했다고 한다. 결국 여행을 계속하고 싶던 H씨는 한 달 동안 무직 신세로 지냈다.

멜버른에서 만난 다른 워킹홀리데이 학생 J(25)씨의 말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떤 PC방은 야간 근무를 해도 시간당 6달러만 준다는 것. 하지만 "그것조차 구하기 어려운 게 시티잡(도시 일자리)의 현실"이라고 말하고 "그래도 일하려는 사람들은 넘친다"고 밝혔다.

멜버른 시내에서 PC방을 운영하고 있는 한 업주는 "나는 워킹 비자는 고용하지 않는다, 일이 익숙해질 때 즈음엔 관두기 때문에 학생 비자만 뽑는 중"이라며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 고용에 대해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시선을 내보였다.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취업관광 비자)를 지닌 사람은 올 7월부터 한 사업체에서 최장 6개월 동안 일할 수 있다. 법이 바뀌기 전엔 3개월 동안만 가능했다. 일(Work)과 여행(Holiday)을 적절히 나눈다는 취지다. 하지만 다수의 한인 업주들은 가능한 길게 일할 것을 요구하는 현실이다.

세금신고 없이 고용... 한인업소들은 노동법 무풍지대

현재 호주 노동법이 보장하는 최저 임금은 업종별·고용형태별로 다르지만 보통 13~16달러 내외. 정규직 풀타임이나 파트타임일 경우 임시직보다 25% 가량 낮은 임금을 받는 대신 공휴일 휴가비(9~10일), 연차 휴가비(20일), 병가 휴가비(5~10일) 등 복리후생을 지원받는다.

하지만 이는 한인 교민 사회에선 딴 나라 얘기다. 대부분의 한인 업주들은 세금신고(Tax Declaration)를 하지 않고 종업원을 고용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캐쉬잡'(cash job, 급여를 현금으로 주는 것)이다. 물론 불법이다.

호주에서 종업원을 고용할 때엔 세무서(Australian Tax Office)에 세금신고를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고용된 종업원은 법정 최저임금과 연금(Superannuation), 산업재해보험(Workers Compensation)의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

호주에서 사업을 하는 모든 고용주들은 이러한 임금과 노동조건을 지켜야 하며 모든 노동자들은 이러한 조건을 호주 내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받을 권리가 법으로 보장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기본 노동조건'이다.

하지만 호주 내 한인 업소에서 일한 워킹홀리데이 학생들의 얘기는 전혀 딴판이다. 보름 동안 시드니의 달링하버에 있는 한 한국인 사장의 레스토랑에서 근무했다는 L(27)씨는 "세금 신고서는 구경도 못했다, 연금 같은 건 있는지도 몰랐다"고 말한다.

날씨가 흐린 날엔 손님이 없으니 "그냥 집에 가라"는 소릴 듣고, 어떤 날은 휴일인데도 대기하다가 부르면 가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 근무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통에 결국 자진 사퇴했다고.

또한 L씨는 자신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8명의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 모두 한인 업소에서 일하지만 누구 하나 세금신고하고 일하는 경우를 못 봤다며, 가장 잘 나가는 한인 식당에 근무하는 친구의 경우 시간당 12달러를 받으며 주 50~60시간 정도 일한다고 말했다.

현재 호주 정부는 주 38시간 근무를 기본으로 정하고, 이를 넘어설 경우 시간당 기본급의 1.5~2배에 해당하는 임금을 지불할 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 NSW(New South Wales) 주 식당 노동자 최저 임금표.
ⓒ 시드니민족교육문화원(http://www.krcau.org)
예치금·사업자번호 요구 등 변태적 방법 등장

올 1월 브리즈번으로 입국해 일자리를 알아보던 K(25)씨는 한 청소 구인광고를 보고 전화를 했다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조건을 들었다. 처음 일주일은 견습기간이니 돈을 줄 수 없고, 그 다음 일주일치 임금은 예치금(Deposit)으로 묶어둔다는 것.

그래서 3주 동안 일을 하고 나서야 겨우 1주일치 급여를 받을 수 있고, 예치금으로 묶어둔 돈은 처음 계약할 때 일하기로 정한 기간 내에 관둘 경우 받을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알고 보니 청소업에서는 사실상 2주치 임금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게 좋으며, 거절하길 잘 했다는 주위의 얘기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교민잡지의 청소구인광고란을 살펴보면 상당수가 ABN을 요구하고 있다. ABN(Australia Business Number)은 한국으로 치면 '사업자 번호'에 해당한다. 당연히 단순 피고용인인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지닌 사람들이 이를 만들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청소업계에서 ABN을 요구하는 것엔 그럴 법한 까닭이 있다.

한국 워킹홀리데이 서포팅센터의 자료(Korean Working Holiday Supporting Centre 6월 소식지)에 따르면, ABN을 만들 경우 피고용인이 법적으로 자영업자에 해당되기 때문에 노동법의 보호를 못 받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해도 모든 부담을 본인이 고스란히 져야 하며 세금도 본인이 내야 한다. 연금 대상에서 제외됨은 물론이다.

임금 체불이 되었을 경우 노동법이 아닌 상법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임시체류자인 워킹 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이 비싼 변호사 비용을 지불하며 대응할 수 있을지, 또한 법적인 소송을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의사소통에서 오는 어려움을 생각해 보면 그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중론이다.

또 하나 우려되는 점은 나쁜 고용주가 고용인들의 ABN을 도용해 세금을 줄이는 방법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 실질적으로 지불한 금액보다 많은 금액을 준 것처럼 세무서에 신고해 수입에 따른 소득세 부담을 전가하는 동시에 본인의 소득세를 줄이는 방법이다.

워킹 홀리데이 서포팅 센터의 자료(Korean Working Holiday Supporting Centre 6월 소식지) 등에 따르면, 더 치밀하고 나쁜 고용주는 다른 사람의 ABN을 도용해 사용하고, 회계연도 말에 의도적으로 파산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임금체불·노동착취 등 인간 대접 못 받아

호주시드니한인회(http://www.koreanet.org.au) 조양훈 사무총장의 말에 따르면, 최근 평균 하루에 한 건 정도 임금체불 문제가 접수되고 있으며 그 중 3분의 1정도는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인 것 같다고 한다.

시드니에서 교민 밑에서 타일 관련 보조일을 했다는 S(25)씨는 "정말이지 입에서 단내 나도록 일을 시킨다"며 한국에서 속칭 '노가다'를 할 때도 이렇게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하루에 100달러를 버는데 이게 한인업주 일 중에서는 가장 고수익인 걸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일 무거운 모래더미를 옮기고 쪼그려서 작업하기 때문에 허리가 정상이 아니라며 "솔직히 한국에 있으면 이런 일 절대 안 한다"고 털어놓았다.

현재 두 번째 워킹홀리데이 비자(Second Working Holiday Visa)를 받아서 2년째 호주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Y(26)씨. 농장 지역을 돌다가 지금은 시드니에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Y씨는 마침 시간당 18달러를 준다는 호주 현지인 이삿짐 업체를 찾았다고 한다.

Y씨는 같은 이삿짐 업체라도 교민 업주 밑에서 일할 경우 대개 시간당 12달러에 불과할 뿐 아니라 웬만한 업소들은 이동시간을 업무시간에서 제외한다며 "한국인 밑에서 일하지만 않으면 도시의 막일도 할 만하다"고 말했다.

멜버른의 한 한인 노래방에서 일했다는 U(24)양은 계속되는 사장의 거만한 태도 때문에 채 한 달을 못 버티고 일을 관두었다고 한다. 국내 특전사 출신인 사장의 강압적인 태도와 군대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고용형태에 환멸을 느꼈다며 "관두고 나니 주변에서 모두들 잘했다고 말하더라, 아마도 예전부터 평판이 안 좋았던 곳이었던 듯"이라고 했다.

▲ 2004년 11월 외환은행 본점에서 워킹홀리데이 박람회가 열려 지원자들이 각국 체험자들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기사와 특정 관련이 없습니다).
ⓒ 연합뉴스 이진욱
"한국에서 노가다 할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Y씨를 비롯해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짧지 않게 경험한 여행객들 사이에선 낮은 임금, 예치금 명목으로 떼이는 돈, 비인격적 대우 등을 거론하며 교민들 밑에서는 절대 일하지 말라는 얘기가 오고 가는 실정이다.

현재 서호주의 한 사과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P(26)씨는 "교민 에이전시에 농장 정보를 얻으러 갔더니 100달러을 요구하더라, 퍼스에 있는 호주인 에이전시에선 15달러면 연결해준다"고 씁쓸하게 얘기했다.

실제로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한 카페에서는 지난 7~8월에 '농장정보 알선'이라는 타이틀로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을 모집해 건당 100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해당 카페 관계자는 관련 게시글 댓글 등을 통해 '예전에 무료로 알선해줬더니 일하다가 힘들다고 무작정 관두는 사례가 많아 결국 소개한 쪽이 난감해졌다, 100달러는 상호간 약속을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한인업주들 "현실적으로 최저임금제 지키기 어렵다"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의 이런 반응에 한인업주들도 나름대로 반론을 제시한다. 다음은 기자가 직접 통화한 내용과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이 경험한 내용을 종합한 내용이다.

먼저 낮은 임금에 대해 "우리만 이렇게 하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일본이나 중국 업소의 경우 급여가 한인업소보다 보통 1~2달러 가량 낮다는 주장이다.

예치금에 관해선 "무단결근이나 퇴직을 해버리면 당장에 내가 손해 본다"며 담보금을 잡아두는 건 최소한의 관행이라고 주장한다.

시드니에서 비자관련 컨설팅 업무를 담당하는 한 업체의 직원은 "대부분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온 학생들이 세금내길 꺼려 한다, 워킹홀리데이 비자의 경우 29%의 세금을 내야 하는데 그게 아까워서 현금 주는 일을 찾는 것 같다"며 화살을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에게 돌렸다.

호주시드니한인회의 조 사무총장도 "호주 내 한인경제 현실을 생각하면 최저임금제를 지키는 게 쉽지 않다, 최저임금제는 사실상 공무원들에게나 적용되는 얘기"라며 한인업주들을 옹호했다.

한편, 포털 사이트 '다음'의 호주·뉴질랜드 게시판에선 지난 9월 초, 영어구사도 잘 못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들을 싼 값에 쓰는 건 당연하다는 글이 올라와 논란을 빚기도 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 입국자 매년 증가, 한인 사회 변화 필요

▲ 국가별 호주 '워킹 비자' 발급자.
ⓒ 호주이민성
호주 이민성(http://www.immi.gov.au)이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작년 7월부터 올 6월까지 한 해 동안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은 한국인 수는 2만3536명으로 그 전해 1만7706명이었던 것에 비해 약 3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캐나다, 일본, 뉴질랜드와 달리 별다른 인원제한이 없는데다 인터넷을 통해 간단하게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기 때문에 워킹홀리데이 제도를 통한 호주 입국은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동남아시아 노동자들 있죠? 그 사람들이랑 워킹 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랑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하면 돼요."

기자가 이름을 묻자 '여기선 한국 이름을 안 쓴다'며 본인을 '데니스'라고 밝힌 비자관련 컨설팅 업체 직원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호주 교민들이 워킹 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를 바라보는 시각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 같았다. 씁쓸하게도 그 업체의 고객들은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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