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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전/팔상전

영산전(靈山殿)은 석가모니 부처가 많은 보살과 제자들에게 주로 <법화경>을 전했던 공간인 영취산(靈鷲山)을 형상화한 건물입니다. 이곳에는 주로 석가모니 부처와 10대 제자 또는 16나한을 모시며, 어떤 경우는 500나한을 모시기도 하며, 주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후불탱으로 걸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경북 거조암 영산전
ⓒ 김성후
석가모니의 일생을 8개의 큰 장면으로 분류하여 그림으로 그린 것을 팔상도라 하며, 이 그림을 모셔둔 곳을 팔상전(八相殿)이라 하는데 충북 보은의 법주사 팔상전이 유명합니다.

팔상 중 맨 처음인 도솔내의상(兜率來儀相)은 석가모니의 태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하늘나라에서 흰 코끼리가 내려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꾼 뒤 그를 임신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흰 코끼리가 내려온 하늘나라는 도솔천이라는 곳으로 미래에 이 땅에 내려오실 미륵보살도 이곳에 머물면서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공간으로 부처가 될 자격이 있는 보살이 머무는 곳이죠.

마야부인이 아기를 낳으려고 친정으로 가는 중 룸비니 동산에서 잠시 쉬면서 꽃가지를 꺾으려고 하다가 옆구리로 아이를 낳은 장면을 묘사한 두 번째 그림을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이라 합니다. 흰 코끼리의 태몽과 함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석가모니의 출생이 위대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겠죠.

어린 왕자가 태어나자 아시타(Asita)라는 브라흐만이 밝은 빛이 나는 것을 보고 왕궁에 경사가 있는 것을 짐작하고 찾아옵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어린 왕자를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렇게 좋은 날 왜 우느냐고 정반왕이 묻자 아시타는 이 어린 왕자가 커서 영광을 누리고 큰일을 할 때 자신은 나이가 많아 그 혜택을 받지 못할 것 같아 서러워서 운다고 대답합니다. 이어서 왕은 이 아이가 커서 장차 무엇이 되겠냐고 묻습니다. 아시타는 세속에 남아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지만, 출가하면 깨달음을 얻어 위대한 성자가 되어 두루두루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그림은 장차 석가모니가 겪는 갈등과 함께 부처가 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려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시타의 이야기를 들고 난 정반왕은 ‘이 아이가 왕궁을 벗어나 출가를 하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라며 걱정이 앞섭니다. 이런 걱정 때문에 사방의 성문을 꽉 걸어 잠그고 살게 합니다. 석가모니가 성장하면서 자꾸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하니까 꼭 네 번 바깥 구경을 하도록 합니다. 네 번이라는 이야기는 아마 석가모니 일대기를 보다 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석가모니는 차례로 사대문(四大門)을 통해 나가서 궁궐의 별원으로 행차를 합니다. 인도의 방위 순서상 동남서북으로 나가 늙은이, 병자, 시체, 마지막 사문(沙門)을 보는데 여기서 삶의 고통인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보고 출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이를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이라고 하여 석가모니의 일생 중 하나의 큰 사건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궁녀들이 성문 꼭대기에서 “아 저런 아버지를 가진 아들은 행복하겠네”, “저런 남편을 가진 아내는 행복하겠네”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 석가모니는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가, 잘 먹고 잘 놀고 그런 것이 행복인가’라며 고민에 휩싸입니다. 마침내 그는 출가하기로 마음을 먹고 궁전을 빠져나갑니다. 참된 행복을 찾아서 출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성을 넘어 집을 떠났다는 뜻의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이라고 부릅니다.

출가를 했다는 말을 ‘입산수도’ 또는 ‘출가수도’ 등으로 표현합니다. 이 표현으로 볼 때 출가했다는 사실보다 출가 후 계속 수도를 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수도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입니다. 설산은 히말라야를 뜻하는데 항상 눈으로 덮여 있는 산에서 수도를 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구한 장소는 부다가야(Buddhagaya)라고 하는 곳의 보리수나무 아래였습니다.

부다가야는 히말라야에서 아주 먼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히말라야에서 수도했다는 이야기엔 의문이 있습니다. 부다가야에 오기 전 수도를 했다고 하는 장소는 그 부근의 나무도 몇 그루 없는 조그마한 언덕으로 나이란자나(Nairanjana)강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도 강바닥은 넓지만 물은 거의 없는 강으로 남아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석가모니의 수행에 좀 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일부러 설산에서 수행했다고 신화적인 내용을 덧붙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제는 깨달음을 얻는 장면인데 보리수나무 밑에서 마군을 항복시켰다는 뜻의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이 있습니다. 마왕(魔王) 파순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게 되면 자신이 설 자리가 없음을 알고 방해공작을 펼칩니다. 자신의 세 딸을 예쁘게 변장시켜 석가모니를 유혹하지만 거기에 걸려들 석가모니가 아니죠. 석가모니는 자신이 이미 깨달은 부처가 되었음을 땅의 신에게 증명을 해달라고 합니다. 이 순간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석가모니부처하면 떠올리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죠.

마군(魔軍), 즉 마라(Mara)는 부처님의 깨달음 이후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속 나타납니다. 연약하고, 의심 많고, 잘못을 많이 저지른 사람들 주위는 온통 마군뿐입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에게는 마군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보리수나무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뉴튼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할 때 사과나무 아래라는 사실보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더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깨달았기 때문에 석가모니는 이제 부처가 된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 석가모니는 자신의 첫 가르침을 녹야원(鹿野苑)에서 펼칩니다. 녹야원은 베나레스 교외의 사르나트(Sarnath)라는 곳에 있는데 석가모니는 자신의 첫 가르침을 누구에게 펼칠까 고민을 하다가 예전에 자기와 같이 수행하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게 최초로 설법을 하게 됩니다. 이를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이라 하는데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석가모니가 최초로 가르친 내용은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입니다. 그리고 고통과 쾌락의 가운데 길인 중도(中道)를 설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최초로 법의 수레를 굴렸다는 뜻으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부른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석가모니의 최후의 모습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45년 동안 자신의 가르침을 펼친 뒤 쿠시나라(Kusinara)에서 80세에 돌아가시는데 이를 사라쌍수입멸(娑羅雙樹入滅)이라고 합니다. 사라라는 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라쌍수라 하고 이를 줄여서 쌍림(雙林)이라 한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전 그는 “내가 간 다음에도 자네들 자신의 마음을 등불로 삼고 정진을 하라. 또 나의 가르침을 진리의 등불로 삼고 정진을 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삼성각/독성각/칠성각·산신각

삼성각(三聖閣)은 독성(獨聖)존자와 칠성(七星), 산신(山神)을 한 건물에 모신 경우를 말하며, 이들을 따로 모시면 각각의 건물을 독성각(獨聖閣), 칠성각(七星閣), 산신각(山神閣)이라 부릅니다.

▲ 무지개 모양의 예쁜 문을 가진 부산 범어사 독성전
ⓒ 김성후
독성각은 홀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나반존자(那般尊者)를 모시고 있으며 후불탱화로 독성탱화를 주로 거는데 절에 따라서는 탱화만을 걸기도 합니다. 칠성각은 주로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을 모신 건물입니다.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은 중국의 도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런 신앙이 불교에 들어와 함께 모시게 된 것입니다. 산신각은 산의 주인인 산신(山神)을 모시고 있습니다. 원래 산신은 불교와 관계가 없었는데 불교가 토속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을 산신에게 맡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사찰 안에서 산신 본래의 성격을 가지게 되어 산신각이 따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산신각에는 산신의 상(像)이나 산신탱화를 모시고 있으며 산신을 호위하는 호랑이를 옆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장전/장경각

부처(佛)와 부처의 가르침인 법(法) 그리고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인 승(僧)을 세 가지 보물이라는 뜻으로 삼보(三寶)라 칭한다고 앞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들기 직전에 “법을 등불로 삼고 법에 의지하라”는 말씀 때문인지는 몰라도 불교신자들에게 있어 부처의 가르침은 부처만큼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아주 귀중하게 여겨 별도로 보관하는 건물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경전 또는 경전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존하는 전각을 대장전(大藏殿)이라 하며 사찰에 따라 장경각(藏經閣), 장경판전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가 유명합니다.

무설전/설법전

무설전(無說殿)이나 설법전(說法殿)이란 이름의 건물은 절에서 주요 경전을 가르치는 장소를 말합니다. ‘무설(無說)’이란 말은 ‘설법이 없다’는 뜻으로 설법을 하는 강당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왜 역설로 표현한 것인가 하면 말로써 경론(經論)을 강의하지만 말과 글은 진리를 전하는 수단일 뿐 말과 글 자체가 진리일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경론을 강의하는 강당인 무설전은 출가 수행자로서 갖추어야 할 예절과 계율을 익히고 석가모니의 설법 중에서 가려 뽑은 경전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배우는 곳이지만 일반 불교 신자들도 이곳에서 설법을 듣기도 합니다.

범종각/범종루

절에서 범종을 보관하는 건물을 범종각(梵鐘閣)이라 하며 2층 누각 형태일 때는 범종루(梵鐘樓)라고 부릅니다. 범종각에는 범종을 비롯해 법고, 목어, 운판 등 불교의식 때 사용하는 사물(四物)이 함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의 사물은 모두 두드리고 소리를 내는 것들인데 이들이 내는 소리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울려 퍼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 전남 장흥 보림사 범종각. 2층 누각의 형태이면서 범종각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 김성후
법고(法鼓)란 ‘법을 전하는 북’이란 뜻으로 이 북을 치는 이유는 육도를 윤회하는 축생(畜生) 중 네 발 달린 짐승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고는 네 발 달린 짐승을 대표하는 소의 가죽으로 만듭니다. 목어(木魚)는 나무로 만든 물고기를 뜻하는데 물에 사는 온갖 중생을 구제한다고 합니다. 게으른 승려가 죽어 물고기가 되어 그 등 뒤에 난 나무로 목어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어, 목어는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수행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범종(梵鐘)은 절에서 사람을 모으고 시간을 알려주기 위하여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차츰 의미가 변해서 종소리는 지옥을 포함한 모든 중생을 향하여 베푸는 부처님의 소리가 되었고, 이 소리를 들은 모든 중생은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날아다니는 짐승을 구제하기 위해 구름모양의 운판(雲版)을 두드렸습니다. 운판은 선종 계열의 사찰에서 끼니때를 알리기 위해 두드렸다고 하나 불교 사물(四物)의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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