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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변증법적 연속

절에는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인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이자 부처를 모신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절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이지만 답사의 목적으로 절을 볼 때는 부처를 모신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의미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절의 공간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절에는 문이 많습니다. 보통 형식을 갖춘 절에는 일주문(一柱門),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이라는 3개의 문이 있습니다. 여기다 금강문(金剛門)을 더하기도 하고 다른 하나의 문을 빼기도 합니다. 이 문을 통과하는 건 존재의 죽음과 재생이라는 통과의례 때문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많은 문들을 설치해야만 했을까 의문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그 답은 바로 절이라는 공간의 의미의 변증법적 연속성에 있었습니다. 쉽게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해 이렇게 어려운 용어를 선택했는데, 풀어서 설명하면 절이라는 공간의 가치와 의미는 절을 찾는 사람이 있는 곳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변증법이 어떤 것인지 먼저 간단하게 알아봅시다. 변증법은 진리를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원래의 뜻은 대화술 또는 문답법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생각에 모순이 내재하고 있음을 밝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는데 근대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변증법이란 정반합(正反合)의 3단계를 거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정(正)이란 자신 안에 모순이 있지만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이란 그 모순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가는데,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이 함께 부정되고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합(合)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합이 또다시 정(正)이 되어 반(反)을 만나서 합(合)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계속되기 때문에 변증법은 완결이 없는 연속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절이란 공간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변증법의 정반합(正反合) 과정이 연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세속적 세계와 부처의 세계라는 경계는 일주문이었으며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이 경계를 지나면 곧바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나만의 착각입니다. 일주문을 통과한 뒤 천왕문 입구까지는 바로 나 때문에 세속적 공간으로 변합니다. 부처의 세계는 천왕문의 안쪽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천왕문을 통과하자 불이문 앞까지 공간은 또다시 세속적 공간이 되어버립니다. 많은 문으로 구분된 성(聖)과 속(俗)이라는 경계의 최종 판단기준은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 몸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정신적인 상태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고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며 착하게 살겠다고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을 거쳐 들어갈 때마다 계속 성(聖)과 속(俗)이 교차하는 것을 변증법적인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안으로 들어갈수록 실제적인 땅의 면적은 줄어들지만, 부처의 세계라는 상징성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더욱 순수해지며 그 의미는 더욱 커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땅의 크기보단 상징적의 가치가 더 커진다는 뜻이겠지요.

문과 통과의례

1) 월천공덕(越川功德)과 반야용선(般若龍船)

우리나라의 절은 보통 산 속에서 계곡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곡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이쪽과 저쪽의 공간을 분리하고 단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계곡뿐만 아니라 물이 흐르는 강(江) 또한 공간의 분리와 단절을 상징합니다. 이런 분리와 단절을 뜻하는 강의 의미는 정신적인 깨달음에도 비유되어 우리가 사는 세속적인 공간을 강의 이쪽 언덕이란 뜻으로 차안(此岸)이라 부릅니다. 강의 저쪽 언덕은 피안(彼岸)이라 하여 깨달음의 세계가 됩니다. 그래서 다리를 놓거나 배로 다른 중생들을 강의 저쪽으로 건너가게 하는 월천(越川)이야말로 남에게 베푸는 아주 중요한 공덕(功德)의 하나가 됩니다.

현실적으로 강이나 계곡을 건널 수 있게 해주는 다리를 놓는 행동도 월천(越川)이요,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행동도 월천(越川)이므로 아주 중요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절 앞에 놓인 계곡을 건널 수 있게 만들어진 다리도 마찬가지로 세속과 진리의 세계로 분리된 것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 강과 관련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배도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사찰의 벽화 중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는 그림을 간혹 볼 수 있을 겁니다. 반야(般若)는 지혜란 뜻이며 용처럼 생긴 배라서 용선(龍船)이라 합니다. 많은 중생을 태운 용처럼 생긴 배는 지혜로 움직이는데 저기 피안(彼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지요. 반야용선 또한 분리와 단절을 극복하고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통도사 극락전 외벽에 그려진 반야용선도
ⓒ 김성후
2)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이야말로 절을 중심으로 안과 바깥을 연결해주는 최초의 자리로 이 문을 지나지 못하면 부처의 세계로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다는 상징성이 담겨있는 곳입니다. 일주문을 통과하기 위한 자격은 세속의 사악한 기운과 못된 마음가짐 등 온갖 나쁜 것을 버리고 부처님을 향한 하나된 마음(一心)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나쁜 것이 남아있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겠다는 하나된 마음이 없다면 일주문을 통과할 자격이 없습니다.

일주문의 건축구조는 하나된 마음(一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한 일자(一)로 늘어선 기둥이 그것입니다. 보통 건축물은 사각형이 기본이고 기타 다각형의 형태로 기둥과 벽을 세우고 위에 지붕을 올린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주문의 기둥은 옆으로 나란히 늘어서 있어 어찌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이런 점이 오히려 우리 조상들의 탁월한 건축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일주문을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의 표현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회삼귀일이란 뜻은 세 가지가 모여서(會三) 하나로 돌아간다(歸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하는 성문승(聲聞乘), 12인연법을 혼자서 깨우친 연각승(緣覺乘), 중생의 제도라는 대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보살승(菩薩乘), 이렇게 셋이 모여 반야정각(般若正覺)이라는 하나로 돌아간다(歸一)는 뜻입니다. 반야정각이란 참된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혜에 의한 바른 깨우침이란 뜻으로 앞의 세 가지는 모두 지혜에 의한 깨우침이란 하나로 통합된다는 뜻입니다.

3) 천왕문(天王門)/금강문(金剛門)

불교의 공간구조는 반복적이며 변증법적인 연결을 하고 있어, 일주문을 통과하였다고 곧바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처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문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보통 천왕문이 눈앞에 있는데 어떤 경우는 금강문이 하나 더 자리 잡고 있기도 합니다.

왜 금강문이라고 이름을 지었나 하면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기 때문이며 금강역사를 인왕(仁王)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간혹 금강문을 인왕문이라고도 합니다. 일주문을 통과하기 위한 자격시험이 부처를 향한 하나된 마음이었다면 금강문을 통과하려면 금강역사의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금강역사는 보통 2명이 있는데 하나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라 부르며 또 하나는 밀적금강(密迹金剛)이라고 부릅니다. 나라연금강은 그 힘이 얼마나 센지 코끼리 백만 마리의 힘과 같다고 하며 보통 입을 벌리고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밀적금강은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을 모두 듣겠다는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항상 부처님을 모신 채 입을 다물고 방어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곳 역시 부처를 향해 하나된 마음과 거짓되고 악한 기운을 모조리 없어졌다는 금강역사의 평가가 있어야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 전북 남원 실상사의 천왕문
ⓒ 김성후
불교를 보호하는 신 중에 사천왕이 있습니다.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천왕천의 주인으로 제석천의 지휘를 받아 사람들이 얼마나 착한 일을 하는지 살피고 또 하늘나라를 침범하는 아수라와 맞서 싸우는 역할을 합니다.

절의 입구에 천왕문이 있다는 건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착한지를 헤아리고 아수라와 같은 사악한 존재가 감히 들어올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천왕은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합니다. 동서남북의 사방을 지킨다는 뜻이지만, 수미산 정상을 지나 부처의 세계로 향하는 모든 길을 다 지키고 있다고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절에 찾아가보면 사천왕의 위치나 형상, 이름이 달라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데 그 이유는 사천왕의 모습과 형태를 기록한 경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의 불화를 보면 지국천왕은 비파, 증장천왕은 칼, 광목천왕은 용, 다문천왕은 탑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4) 불이문(不二門)/해탈문(解脫門)

금강역사나 사천왕의 시험을 통과했으나 아직 부처의 세계로 들지 못하고 다시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이번 시험은 이 문을 통과하는 사람의 내면의 변화가 확실히 제대로 이루어졌는가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금강역사나 사천왕의 경우 남이 평가하는 것이지만 이곳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 깨달음이란 것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요 해탈이라는 것입니다.

둘이 아니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속적인 지식은 옳음과 그름, 성(聖)과 속(俗), 있음과 없음 등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지식입니다. 그러나 부처의 깨달음은 이런 이분법적 지식이 서로 걸림이 없는 둘이 아닌 것을 아는 지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세속적인 지식은 모조리 없애버려야 하는 참된 가르침을 알아야 이 문을 지날 수 있습니다. 그 지혜를 안다는 것은 바로 해탈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불이문이자 해탈문입니다. 이런 내면의 완벽한 변화를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참된 진리의 세계이자 부처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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