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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신자들의 믿음과 귀의

소승불교의 연기설에 의하면 사람의 미래는 과거 또는 현재에 내가 마음을 먹거나 행동한 결과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 해탈을 성취해야 합니다. 아라한을 목표로 삼아 열심히 수행하는 제자의 모습을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들기 전 제자들에게 말했던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말은 이런 내용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등장하자 이런 가르침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대승불교는 믿음과 귀의(歸依)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재가신자들과 함께하고자 합니다. 만약 재가신자들이 부처와 보살을 믿고 귀의한다면 부처와 보살은 자신의 능력으로 재가신자들에게 좋은 결과를 제공한다는 아주 획기적인 발상을 합니다. 이는 재가신자들의 원하는 바를 좀 더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또 하나의 히트 상품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믿음과 귀의의 특징은 어려운 경전을 읽지 않고 해탈을 위한 수행이 없어도 부처와 보살은 재가신자를 구제해준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아미타불은 풍요롭고, 비옥하며, 안락하고, 사악한 것들은 살지 않는 곳이며, 불쾌함이나 고통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는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분입니다. 아미타불은 자기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 이곳에 태어나게 하리라는 원(願)을 세웠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귀의하는 모든 사람은 이곳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 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전 내 아미타불
ⓒ 김성후
사람들이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나는 방법은 한순간이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됩니다.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어렵고 복잡한 경전을 읽을 줄 몰라도 되고 소승불교처럼 철저하게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아미타불을 믿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즉, "아미타불께 귀의합니다"라는 말을 외우고 부르는 것뿐입니다. 이것보다 구제에 이르는 쉽고 가까운 방법은 없을 것이며, 그래서 이 신앙이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불교를 믿는 대중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특징으로 부처와 보살은 자기가 닦은 공덕을 중생에게 늘 베풀고자 하는 것입니다. 위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和衆生)'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므로 이들이 쌓은 공덕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미타불을 믿고 귀의한 사람은 아미타불의 공덕과 힘을 얻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나는 것은 열반이나 해탈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단지 부처의 이름만 불러도 이렇게 좋은 부처의 세상에 태어나고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생명을 얻는다는 설명은 가난하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겐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승불교의 형성배경을 살펴보면 과거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얽매이지 않고 재가신자의 요구사항을 적극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현대경영이론에 비추어보면 고객의 요구를 파악하여 히트 상품을 만들어 낸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기존의 제품인 소승불교에다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덧붙여 대승불교라는 새로운 상품으로 포장하여 고객들에게 다시 선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대승불교는 다양한 부처나 보살을 섬기게 함은 물론 탑(塔)을 숭배하고 경전까지도 존경하도록 했습니다. 부처의 유골이나 유품을 안치한 탑이 바로 부처가 된 셈이며, 부처가 가르친 내용이 담겨 있는 경전 또한 부처와 똑같다는 믿음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을 몸에 지니고, 경전을 외우고, 경전의 내용을 베끼는 일도 많은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하여 널리 권장하였습니다.

탑을 세우거나 사원을 지어 기부하는 일 등은 권력이나 경제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로써 소승불교 시절에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강조하는 일은 믿음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로 대승불교가 얼마나 일반 대중과 함께 하고자 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대승불교는 회향(廻向)이라는 개념도 새로이 만들어냈습니다. 부처와 보살, 그리고 모든 중생들이 다양한 종교적 행동을 통해 얻는 공덕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공덕은 모든 중생의 구제를 위하여 되돌려주어야 하는데, 이를 회향이라 부릅니다.

회향의 개념은 소승불교의 자신이 지은 업(業)은 오직 자신만이 받게 되는 윤회의 법칙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 정신의 표현입니다. 이와 같은 대승불교라는 종교적 운동은 기존의 소승불교에 비해 훨씬 더 다채롭고 풍부한 세계를 열었던 것입니다.

부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등장

초창기의 불교에서 깨달은 사람을 지칭하는 부처는 오직 석가모니뿐이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었고 많은 중생을 위해 가르침을 펼쳤기 때문에 오직 그만을 부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가 육체라는 한계에서 벗어난 반열반(죽음)에 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부처에 대하여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들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몸을 가진 사람이 완벽한 깨달음을 가진 부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람의 몸이란 것은 불완전하므로 완벽한 깨달음이라는 말의 뜻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정한 부처란 불완전한 몸이 사라진 상태의 어떤 정신적인 존재이자 진리가 스스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형체가 없는 완전히 정신적인 존재로서의 부처라고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몸을 가진 채 부처가 된 석가모니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부처란 육체를 가지고 열심히 수행한 사람일 수도 있고, 진리가 스스로 나타난 정신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생각이 함께 공존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시간이 더욱 흐를수록 승가(僧伽) 내부에서는 석가모니께서 가르친 내용의 해석과 그에 따른 실천에 대하여 다른 견해들이 자꾸 생겨납니다. 승가 내부에서 자기 스스로 해석한 내용이 옳다는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집단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집단을 부파(部派)라 하며 이 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합니다.

기존의 해석과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부파도 나오게 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대중부(大衆部)라는 부파는 가장 색다른 해석을 하는 부파였습니다. 이들은 부처를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은 물론이고 경전 또한 자신들의 현실에 맞게 해석을 하다 보니 과거와 너무나 다른 의견을 내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중부의 주장을 보면 부처란 우리가 사는 세속적인 세계를 떠난 초월적 존재로서 무한한 생명과 힘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석가모니가 가르친 내용을 담은 모든 경전들은 완벽한 진리를 담고 있으며,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고 사람처럼 행동한 이유는 바로 그가 사람의 길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처는 초월적인 존재로서 사실 몸이 필요 없는데, 그가 몸을 가지고 태어난 이유는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대중부의 이론에 의하면 부처란 초월적 존재로 다양한 장소와 다양한 시기에 사람의 몸으로 나타날 수가 있기 때문에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석가모니와 같은 부처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석가모니 이외에 아주 많은 부처가 존재한다는 대승불교의 사상적 토대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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