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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도토리가 툭툭 떨어져 뒹굴고, 학교 담장 너머 마을엔 홍시감이 예쁘게 익어가며 할머니의 콩 타작 소리가 정겨운 10월, 경남 합천 적중면에 있는 대안학교인 원경고등학교에서 긴 연휴를 끝낸 9일, 창제 560돌 한글날을 기념하여 다양한 행사를 열었습니다.

▲ 560돌 한글날 기념 백일장 시제
ⓒ 정일관
국가 경축일에서도 빠지고, 온갖 외국어가 넘쳐나는 오늘의 현실에서, 느닷없이 터진 북한 핵 실험 소식으로 한글날은 그 의미를 더욱 잃어가고 있는 가운데, 원경고등학교는 수업을 미루고 하루를 온전히 잡아 전일제로 행사를 하며 한글날의 소중함을 가슴에 새기고자 하였습니다.

한글은 세계의 어떠한 문자와 비교하여도 과학적인 문자라는 것은 이미 정평이 나있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어떤 문자도 그 생성 과정에서 고도의 사상적 배경과 음성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자는 없습니다. 게다가 모양이 매우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한 글자가 한 소리만 내기 때문에 배우고 익히기 쉬운 글자이고, IT 문화와 접목할 수 있는 첨단성과 합리성을 고루 갖추고 있는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한글의 창제는 단순히 한 나라가 한 민족의 언어를 만들었다는 좁은 의미보다, 우리 인류 전체가 세계적으로 위대한 문화 유산을 생산해내었다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경축해야 할 일입니다.

대안학교인 원경고등학교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한글날을 온통 기념하기 위해 오전에는 ‘도전, 한글 맞춤법 100’ 시간을 두어 한글 맞춤법 실력 겨루기를 하였으며, 6개의 시제를 두어 백일장을 펼쳤습니다. 해바라기, 낙엽, 허수아비, 들판, 식구, 책상 등 아름다운 시제가 가을 하늘과 잘 어울려 그 자체로 시가 되고 산문으로 풀려나올 것 같았습니다.

▲ 느티나무 그늘 아래 바위 위에서 글을 쓰고 있는 아이들
ⓒ 정일관
아이들은 삼삼오오, 끼리끼리 모여서 교실에서,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바위 위에서 장난치며 떠들다가 진지하게 원고지를 메웠지요. 때로 원고를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떠들어대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나무 그늘 아래 정겨운 바람을 맞으며 잘 생긴 한글로 시와 산문을 만들어내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 교정의 나무 의자 위에서 시를 써요
ⓒ 정일관
또한 평소에 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이 주로 운문을 선택하여 시를 써내었는데, 그 이유가 한글날이라서 갑자기 시가 좋아졌다기보다, 짧아서 원고지를 많이 메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아름다운 계절 속에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를 가지고 백일장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깊었습니다.

▲ 도서관에서 원고지를 메우는 한 여학생의 진지한 모습
ⓒ 정일관
오후에는 온통 시와 노래의 잔치였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사)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후원하고 시 노래 문화 공연을 펼치고 있는 <비타민 詩>에서 주관한 ‘삶의 시, 삶의 노래’ 공연을 운동장 가에 있는 팽나무 아래에서 열었습니다.

▲ 지리산 시인, 이원규 시인의 시 강좌
ⓒ 정일관
공연에 앞서 초청 시인의 시 강좌가 열었는데, 초청 시인은 이른바 지리산 시인이라고 부르는 이원규 시인이 와서 아이들에게 시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의를 하였습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강의에서 이원규 시인은 시란 단순한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한 경험을 토대로 한 통찰을 표현한 것이라 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지 말고, 사물을 더욱 세밀하게 살피고 애정을 가지고 보면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멋진 시를 쓸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 시인의 시 강의에 몰입해 있는 아이들 모습
ⓒ 정일관
이에 화답하듯이 2학년 김소진 학생이 이원규 시인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을 낭송하여 시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며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였습니다.

▲ 학생 시 낭송.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정일관
이어서 본격적인 시 노래 공연이 있었는데, 인도풍의 가수 박양희씨가 ‘바람이 숲에 깃들어’, ‘마음도 돌고, 바람도 돌고’ 등의 인도 노래를 불러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었습니다. 계속해서 시를 노래로 작곡하여 전파하고 있는 시 노래패 <꼬두메>가 여러 시인들의 시를 작곡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귀뚜라미’, ‘DMZ', ’내 가슴에 달이 있다‘, ’아직도‘, ’가을엽서‘, ’자유‘ 등의 주옥같은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 인도풍의 가수 박양희 씨의 노래. 악기가 참 재미있습니다.
ⓒ 정일관
시 노래 배우기에는 김준태 시인의 ‘감꽃’을 배웠는데요, 낯선 노래이고 시 내용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하긴 하였지만 시와 노래의 상관 관계를 조금이나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시 노래패 <꼬두메> 공연
ⓒ 정일관
팽나무 그늘 아래 있는 씨름판 모래 위에서 무대를 마련한 시 노래 공연은 두 시간이 넘어서 끝이 났습니다. 엉성한 바닥에 앉거나 학교 바위 담 위에 걸터앉아 두 시간을 견딘(?) 아이들이 대견하고 고마웠는데요, 아이들도 이렇게 온전히 한글날 기념행사를 할 수 있어서 참 좋은 경험이 되었고, 한글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 팽나무 그늘 아래 마련된 소박한 공연 무대
ⓒ 정일관
원경고등학교는 이번 한글날 시 노래 공연을 함께 보고 싶어서 이웃해 있는 다른 학교 학생들도 초청하였습니다만, 한 종합고등학교의 실업과 학생 30명만 참가해주었습니다. 다 공부한다고 바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글로써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한글 창제를 축하하고 그 정신을 배우는 것이 더 큰 공부가 아닐까요?

들녘의 곡식이 참 고운 빛깔로 익어가는 이 가을, 정말 이 나라의 학교만이라도 한글날 기념행사를 열어 우리 아이들의 가슴에 뿌듯한 자부심과 건강한 시심을 심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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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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