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라한

초창기 석가모니를 따르는 제자들은 아라한(阿羅漢, Arhant)이라는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초기에는 석가모니 제자를 아라한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뜻은 계정혜 삼학(三學)을 완성한 사람으로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수행의 결과에 따라 사람을 범부(凡夫)·현인(賢人)·성인(聖人)으로 구별하였으며 성인은 예류(預流), 일래(一來), 불환(不還), 아라한(阿羅漢)이라는 네 가지의 등급으로 분류하였답니다.

예류(預流)를 얻고 나면 이제 성인이 되어 다시 태어나도 더 이상 번뇌를 겪지 않는 경지로 이 세상에 일곱 번만 다시 태어나면 아라한이 되는 존재라고 합니다. 일래(一來)는 한 번만 다시 태어나면 아라한이 되는 경지로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없애다시피 한 상태라고 합니다. 불환(不還)은 하늘에 태어나 여기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지입니다.

▲ 경주박물관 소재 석가모니 제자(아라한) 입상
ⓒ 김성후
아라한(阿羅漢)은 더 이상 배우고 닦을 것이 없어 무학(無學)이라고 부릅니다. 앞의 세 가지 경지의 성인은 아직도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유학(有學)이므로 똑같은 성인이라도 그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라한이 되는 마지막 단계는 모든 더러움(漏, asavas)을 없앨 때입니다. 더러움이라는 것은 감각적인 쾌락, 살고자 하는 욕망, 무지, 그리고 거짓된 견해를 말합니다. 더러움을 없앤 사람은 더 이상 존재와 쾌락을 추구하지 않으며 거짓된 견해를 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며 또한 업(業)과 윤회로 연결되는 모든 욕망을 없앴기 때문에 다시는 윤회의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의 아라한의 인격과 성품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볼까요? 아라한은 냉철함과 초연함을 갖추었으며, 차갑고 엄격하며, 자제심이 강하며, 인간사에 참여하면서도 전혀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으며, 성공과 실패를 마음에 두지 않으며,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는데 그가 떠나자 마음의 고통을 받는 등의 일도 없으며,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과의 애정에 개입시키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아라한이 되기 위한 방법은 주로 고요한 장소에 혼자 떨어져 수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라한은 자신의 생명이 끝날 때 열반(涅槃, nirvana)에 드는데 석가모니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이유는 이처럼 사람들이 수행을 하고 아라한이 되어서 열반에 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아라한과 부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라한은 오랜 기간을 통해 계정혜를 닦아 탐욕・성냄・어리석음(貪嗔癡)이라는 삼독(三毒)을 물리쳐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한 존재입니다. 또한 그는 더 이상 업의 지배를 받지 않고 윤회를 끊어버린 성인으로 부처와 다른 점이 별로 없습니다. 초기의 불교 경전에서도 석가모니 부처를 종종 아라한이라 칭하고 있으므로 과연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야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깨달음의 경지를 논한다는 것이 우습지만 사실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볼 때 깨달음에 관한 한 부처와 아라한 사이에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부처를 아라한보다 더 뛰어난 분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부처는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분이라면 아라한은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소승불교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제자들은 승가(僧伽)를 조직해 함께 모여서 생활하며 아라한(阿羅漢)이라는 성인(聖人)을 목표로 수행하는 것이 초기 불교의 모습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출가한 승려들은 부유한 재가신자들이 제공한 사원(寺院)에 거주하면서 더욱 더 개인적인 수행에 몰두하고 한편 형이상학적 이론을 추구하는 교학적(敎學的, abhidharma) 불교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한 출가 승려들은 재가신자들의 종교적 욕구를 받아들이길 싫어하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재가신자들이 불교를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승려와 사원에 제공하는 물질적인 보시(布施)에 따라 보다 나은 업보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출가 승려들의 개인적인 수행과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논쟁은 재가신자들을 불교와 더욱 멀어지게 하였으며 또 다른 형태의 불교가 만들어질 싹을 잉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불교를 우리는 보통 소승(小乘, Hinayana)불교라 부릅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작은 수레’의 불교입니다. 작은 수레는 많은 사람을 태우지 못합니다. 오직 출가한 승려들만 작은 수레에 타고 깨달음을 얻는 길로 나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소승불교라는 말 속에는 비하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는 삭제하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충실한 불교라는 뜻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대승불교

소승불교의 한계를 깨달은 대중들의 욕구와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모습을 지닌 불교가 등장합니다. 새로운 불교는 오직 자신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적인 소승불교와는 달리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습니다. 새로운 불교는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불교를 모든 중생을 수레에 싣고 피안의 세계로 함께 가는 ‘큰 수레’라는 의미로 대승(大乘, Mahayana)불교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는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사실 대승불교가 정확하게 언제 만들어졌나하고 묻는다면 누구라도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와의 관계, 대승불교의 성격 그리고 대승불교가 발생한 지역과 시대가 서로 달라 뚜렷한 근거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대승불교 계열의 경전이 중국에 번역된 시기를 참조하면 적어도 기원전 1세기에는 성립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2세기경에 지루가참(支婁迦讖)이라는 승려가 대승불교의 경전인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수능엄경(首愣嚴經)] 등을 한문으로 번역했습니다. 지루가참은 월지국에서 왔기 때문에 당시 월지국에서는 대승불교가 성행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불교가 만들어진 시기까지 역으로 추정하여 기원전 1세기 정도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경전에 의거하여 보더라도 대승불교는 적어도 서력기원 전후에는 이미 확립되어 있었을 것이라 믿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점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에 대한 반발로 만들어지다 보니 대승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승불교의 차이점을 비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이 두 불교 사이의 차이점의 기준은 대략 서너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들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은 무엇인가, 깨달음에 대하여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 등입니다.

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첫째,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 부처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승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를 인간적인 스승으로 간주하는데 반해 대승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는 보편적 진리가 이 땅에 나타난 영원한 존재로 신과 비슷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이상(理想) 또한 확실히 다릅니다. 소승불교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또 윤회마저 끊어버린 아라한을 목표로 삼았다면, 대승불교는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결정된 존재이자 자비와 사랑 그리고 자기희생을 근본으로 삼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깨달음에 대하여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그에 따라 수행방법 또한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소승불교는 엄격한 계율의 실천과 개인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구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면 대승불교는 부처를 향한 믿음과 헌신 그리고 모든 중생들을 향한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라는 대한 시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소승불교는 오직 부처의 가르침에 충실한 몇몇의 사람들만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반면 대승불교는 모든 중생들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 즉,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어쓰기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