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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은사 팔상전 내 '녹원전법상' 석가모니께서 녹야원이란 곳에서 처음으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 김성후

업(業), 윤회(輪回), 연기설(緣起說)

몸과 입과 뜻(身口意)으로 짓는 세 가지 업(業)으로 인해 사람과 사물들이 서로 다르게 태어나게 됩니다. 부자나 가난뱅이, 잘생기거나 못생긴 사람, 사람 아니면 짐승으로 태어나게 되는 원인이 바로 과거에 자기가 행한 업이라는 것이죠.

석가모니가 태어나기 오래전 인도에서 이미 업(業)이란 개념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석가모니는 이 개념에다 의업(意業) 즉 마음의 의지라는 다른 의미를 추가했습니다. 업이란 사람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 행동의 뒤에 있는 감춰져 있는 의지나 결단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는 것을 더한 것이죠.

어떤 종류의 생각과 행동이라도 그에 따른 결과로서 업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나 말로써 표현되는 착한 행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닦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 됩니다.

사람들은 과거에 행한 업과 현재 짓고 있는 업에 따라 끝없이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고리에 갇혀 살아가게 됩니다. 석가모니는 업과 윤회의 개념을 가지고 연기설(緣起說)을 이야기합니다. 연기설에 대한 석가모니의 간단명료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저것이 일어나므로 이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저것이 소멸하므로 이것도 소멸한다."


연기설에 의하면 어떠한 사물이나 행위도 혼자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반드시 다른 사물 또는 행위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행위는 다른 행위에 영향을 주고 또 다른 행위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석가모니는 연기(緣起)란 12개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무명(無明)을 원인으로 해서 행(行)이 일어나고 행을 원인으로 해서 식(識)이 일어납니다. 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가 일어나는 12개의 고리입니다. 이 12개의 고리는 한 개인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거쳐 가는 여러 단계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윤회와 연기로 이어지는 사람의 일생을 놓고 볼 때 태어남이 삶의 시작이 아니며 죽음 또한 삶의 끝이 아니랍니다. 이처럼 순환되는 삶에서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출발점은 있는 것이 좋다는 의도로 무명(無明)을 연기(緣起)의 시작이라 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무명을 12연기의 시작으로 본 이유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무명이란 우주나 신 등 초월적인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가 아니라 자아와 세상의 본질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무명의 상태에서는 비참한 것을 행복한 것으로 알고, 실재하지 않고 덧없는 것을 실재하고 영원한 것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무명은 존재에 대한 갈애, 증오, 게으름, 교만 그리고 의심 등 다섯 가지 장애에서 드러나며 또한 몸(身)의 행동과 입(口)으로 내뱉는 말과 마음(意)으로 만드는 의지나 결단의 죄로부터 자랍니다.

무명을 12연기의 시작으로 삼는 또 다른 까닭은 직관적 지혜를 얻음으로써 무명을 없앨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 번째 무명의 고리가 끊어지고 나면 연기에 관한 모든 공식이 무너지게 되어 결국 열반(涅槃)의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 됩니다.

석가모니가 연기설(緣起說)을 설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새로이 나타난 자유주의적 사상 중에 염세주의가 성행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염세주의자들은 업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이 착하든 악하든 아무런 원인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사람들의 운명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전의 행동에 대한 상(償)이나 벌(罰)은 있을 수가 없고 결국 사회의 질서나 도덕이 전혀 필요 없는 세상이 되고 맙니다. 석가모니는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없애기 위하여 연기설이라는 인과의 법칙을 내세운 것입니다.

열반(涅槃)

업과 윤회에 의한 인연의 법칙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바로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르는 길입니다. 열반이란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 말로써 그 뜻을 명확하게 표현하기가 쉽진 않습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끼리는 열반의 뜻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서로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지만 일반인들에게 열반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불교신자들이 설명하는 열반에 대해 증거도 없이 횡설수설하는 것이나 환상 또는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열반은 직관적 지혜를 통한 깨달음의 경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써 그 내용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열반이란 말은 학문이나 지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대상인만큼 말로써 풀이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열반의 어원은 '불어서 끄는 것' 또는 '불어서 꺼진 상태'입니다. 마치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 꺼버리듯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통이 소멸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영원한 평안, 완전한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탐욕・성냄・어리석음 즉 탐・진・치(貪・嗔・癡)라는 세 가지 독(三毒)을 없애는 것을 일컬어 열반이라 하기도 합니다.

삼법인(三法印)

석가모니는 사람과 함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니 세상에는 세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세 가지 중요한 원칙이란 첫째,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며(一切皆苦) 둘째,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변한다는 것(諸行無常)이고 셋째, 영원한 자아나 영혼은 없다(諸法無我)는 것입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자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태어나는 것이 고통이며, 늙어감이 고통이며, 병드는 것이 고통이며, 죽는 것 또한 고통입니다. 슬픔·우울·절망 또한 고통이며,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고통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겪는 그 모든 것들이 고통인 것입니다.

고통이 생기는 이유는 욕망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욕망, 쾌락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등 우리가 가진 모든 욕망은 업(業)을 쌓게 되고 이 업에 의해 사람은 윤회를 계속하게 됩니다. 석가모니는 이런 욕망을 없애 더 이상 업을 짓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간혹 일체개고(一切皆苦)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열반적정이란 번뇌의 불길이 사라진 열반의 고요한 경지를 의미합니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가니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라고 말했을 정도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가르침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제행무상이란 말뜻은 모든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일시적이고 변화의 연속으로써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요소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가지 요소들이 서로 모여서 만들어졌다 잠시 머물다 다시 흩어져 사라져버리며, 생각이나 정신 또한 만들어져 잠시 머물다 변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연속하므로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의 몸도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어버리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은 구르다 멈추는 수레의 바퀴가 한 바퀴도 채 돌지 않고 멈추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퀴가 멈추는 그 순간 우리의 생명은 사라져 버리고 또다시 업에 의해 변화된 삶이 계속 이어지는 윤회의 연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마지막까지 업에 의한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고 당부의 말을 한 것입니다.

영원한 자아(自我)나 영혼은 없다는 뜻의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석가모니가 기존의 우파니샤드 철학을 비판하면서 만들어낸 원칙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우파니샤드는 사람들의 개별적 자아인 아트만(Atman)과 우주의 보편적 질서인 브라만(Brahman)은 똑같다고 했으며 이 동일성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해탈이라고 했습니다.

우파니샤드의 입장에서 볼 때 한 사람의 자아는 다른 모든 것들보다도 더 귀중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자아는 바로 순수한 의식인 자신의 영혼입니다. 영혼은 태어날 때 육체 속에 있으며 죽을 때에는 육체를 떠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있는 사람들 개개인은 생각과 행동의 결과에 의해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석가모니는 이런 자아나 영혼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가장 헛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자아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고, 집착은 또 욕망을 낳고, 이 욕망은 다시 고통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 과감하게 자아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마도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거부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에 귀를 기울여 주기를 기대한 것일지도 모르죠.

사람들이 자아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들 뒤에 뭔가 다른 실체가 있지 않을까 추측하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는 영원한 자아인 영혼을 찾으려고 해봤지만 결국 사람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라는 오온(五蘊)이 일시적으로 조합되어 있을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오온은 매순간마다 변하므로 오온으로 이루어진 것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로 남아있지 못하며 생성되었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생명의 연속체에 불과하다고 한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어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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