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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의 그 사랑에는 상처를 피한 흔적이 있다> 표지.
ⓒ 도서출판 천우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여인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한 남자. 텔레비전 광고로 익숙한 모습이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두 청춘의 절규는 쓸데없다는 생각이다(둘 다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냥 사랑하면' 되잖은가?

사실 이 울부짖음은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결혼을 한 중년들에게나 어울린다.

'그냥 사랑하게 해 달라'는 중년들의 외침도 잘해야 "로맨스네"라는 위안이요, 잘못하면 "가정 파탄시킨다"는 뭇매를 맞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랑은 중년에도 계속된다. 그것이 불륜이든 로맨스든, 원했든 원치 않았든, 어쨌든!

금기와 같은 중년의 사랑을 말하는 시인, 이채

중년의 사랑을 말하는 건 어쩌면 금기와도 같다. 그런데 이 금기에 유난히 집착(?)하는 이가 있다. 지난 1월 <그리워서 못살겠어요 나는>, 4월 <중년이라고 그리움을 모르겠습니까> 그리고 7월 <중년의 그 사랑에는 상처를 피한 흔적이 있다>로 이어지는 3권의 시집을 낸 이채 시인이 그 주인공.

시인은 그녀 자신도 대학생 아들을 둔 중년이다. 혹, '그녀의 경험담이 아닐까'라는 발칙한 호기심으로 펼쳐 든 <중년의 그 사랑에는…>에서 시인은 사랑을 애써 외면해야 하는 상처가 중년의 가슴에 깊은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전한다.

슬프고도 슬픈 작별은 / 눈을 감고 삼켜야 하는 눈물과 /
가슴으로 울컥 잠긴 울음뿐이라네

당신을 만난 적이 없어야 하고 /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야 하고 /
당신을 사랑한 적도 없어야 하는 / 중년의 그 사랑에는 / 상처를 피한 흔적이 있다
-'중년의 그 사랑에는 상처를 피한 흔적이 있다' 일부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지독한 사랑

사랑을 참아야 하고,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야 하는 중년의 고통은 시집에 일관된 흐름으로 나타난다. 과연 중년의 사랑에는 어떤 아픔이 자리하는 것일까. 그것은 '지독한 사랑'에서, 적당한 '거리두기'에서 비롯된다.

지워도 지워도 / 지울 수 없는 흔적 / 그대가 베고 간 상처마저 / 지독한 사랑이에요
-'지울 수 없는 사랑' 일부

누구를 사랑하여 꽃이 필 때 / 따스한 가슴 안에 그를 가두며 /
더 찬란한 꽃을 감상하려 하지만 / 어쩌면 그는 / 군자란을 닮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를 내 가슴으로 / 지나치게 끌어당길 것이 아니라 / 그대로 둘 일이다
-'그대로 둘 일이다' 일부


시인은 하지만 도발적인 물음도 마다 않는다. 중년의 사랑이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때론 당당하게 하면 안 되느냐고 오히려 세상을 향해 소리지른다. 사랑이 오면 어떻게 하냐고, 그런 중년과 사랑 하고픈데 어쩌느냐고.

과거를 몰라도 좋고
미래를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이
새로울 것도
상쾌할 것도 없는 반복의 하루 안에
아무도 찾아올 줄 몰랐던
인생의 정오를 지난 중년의 어느 날

빈터에 홀로 핀 들꽃, 들꽃처럼
간밤에 이슬방울로 맺은 인연처럼
중년에 사랑이 온다면 당신은 어쩌겠습니까
-'중년에 사랑이 온다면 어쩌겠습니까' 일부

지우려 해도
지우려 해도
도무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밤마다 매달린 눈물의 대화가
먼 훗날 후회와 아픔이 되어
서로의 행복을 유린한다 해도
나는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당신과
중년이라고 사랑을 하면 안됩니까
-'중년이라고 사랑을 하면 안됩니까' 일부


중년에 사랑이 온다면 당신은 어떨까?

시인이 말하는 중년의 사랑에는 아픔만 있지는 않다.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도 있다. 참고 인내하는 법, 그러면서 강해지는 모습도 눈에 띈다. 이는 "중년의 사랑은 아무도 막을 수 없지만,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늘 굳게 닫고 있"노라는 시인의 이율배반적인 발언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밀물이 쳐들어오듯 / 물구나무를 선 채 / 산처럼 내 얼굴에 포개져 온다

가위에 눌린 것도 아니련만 / 소스라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
그 영상을 더듬느라 / 식은땀을 후줄근히 흘린다

그리고 곧 빈 손을 펴본다 / 빈손이리자만 /
손 안에는 그래도 잠시 전의 / 사랑을 한 움큼 쥐고 있다
-'꿈속의 사랑' 일부

중년의 가슴에 비가 내리면 / 삶도 사랑도 / 고요한 슬픔과 애잔한 아픔이 되어 /
청춘을 거쳐 온 인고의 가슴에 / 성숙한 눈물이 빗방울처럼 맺힙니다
-'중년의 가슴에 비가 내리면' 일부


중년의 사랑은 그래도 행복하다?

시인은 중년의 사랑에는 고통과 이별의 아픔 그리고 슬픔의 눈물이 담겨 있음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바보처럼 사랑에 빠지는 중년들의 모습에 시인도 함께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 눈물은 행복으로 귀결된다. 시인이 말하려 하는 것은 결국 '중년의 사랑은 행복하다'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판단이겠지만.

그러나
남겨진 한 방울의 눈물까지
한 사람의 사랑이고 싶은 것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과
한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만큼
생애 큰 축복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일부


"중년의 사랑, 포기할 수 있어도 잊을 순 없는 것"
[미니인터뷰] 시인 이채 "경험담이냐고요? 절대 아니에요"

▲ 중년의 사랑은 "포기할 순 있어도 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이 채 시인.
ⓒ최육상
시인 이채의 세번째 시집이 나오기 일주일 전인 지난 18일 저녁, 서울 강남의 한 술집에서 그를 만났다.

1, 2집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고 3집 내용도 출판 전에 메일로 받아 보는 특별 혜택까지 누렸던 터. 내심 최고로 강한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시집 내용은 본인의 경험담이냐"는 기자의 노골적인 질문에 그녀는 "그냥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가 겪은 것처럼 최면을 걸어 써내려 갔다"며 "경험담이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이후 같은 질문을 수 차례 던져봤다. 하지만 끝까지 아니라고 하니 인정할 도리밖에. 그녀와의 즐거우면서도 사뭇 진지한 대화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다음은 간추린 인터뷰 내용.

- 올 해 출판한 3권의 시집이 모두 중년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중년의 사랑이라는 주제 자체가 뜨거운 감자잖아요. 그래서 주목받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있었고, 저 자신 중년으로 솔직하게 한 번 터놓고 중년의 사랑을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죠."

-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찬반이 엇갈릴 것 같은데.
"불륜을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항의도 많이 받았죠(웃음).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저 자신은 무척이나 보수적이거든요. 그런데 불륜을 조장한다니 말도 안 돼요. 다만, 중년들의 가슴에도 사랑이 찾아오는 걸 어떡해요. 있는데 없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중년의 사랑은 제도(결혼, 일부일처제 등)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건데, 자꾸 개인의 문제로만 몰아서 제재하려고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중년의 사랑을 권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권하는 문제가 아니라 법과 도덕까지 사랑의 잣대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죠. 사랑을 권하니까 사랑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찾아 온 사랑을 왜 꼭 법과 도덕으로 갈무리해야 하느냐는 거예요. 그런 것 없이도 대개는 잘 이겨내는데…."

- 솔직히 중년의 사랑은 불륜이 전제되는 것 아닌가. 경험담도 아닌데 굳이 이것을 이야기해야 했나.
"제가 21살 때 연애를 시작해 결혼했는데 지금의 남편이 그 첫사랑이에요. 그래서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제가 이팔청춘도 아니고 자연스레 같은 또래 사람들과 섞이다 보니 중년의 사랑이 눈에 보였던 거죠. 실제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게 많아요"

- 올 해 안에 나올 4집도 중년의 사랑을 다룰 계획인가.
"사실 지난 시집을 분석해 보면 나름의 차이가 있어요. 1집은 사랑의 시라고 할 수 있고, 2집이 그냥 중년의 사랑이라면 3집은 좀 더 적극적인 중년의 사랑에 해당하죠. 4집은 따뜻한 사랑으로 마무리할 생각인데 어떨지는 모르겠네요."

- 중년의 사랑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포기할 순 있어도 잊을 순 없다'에요. 사랑하니까 포기는 하지만 잊지는 못해 가슴 아파하는 것, 그런 것 아닐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그런 사랑 못한다"며 밝게 웃는 그녀를 보며, 중년의 나이를 향해 가는 나는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 봤다. 결혼도 안한 주제에 이 무슨 사치스런 걱정인가? 이채 시인이 뿌려 놓은 '중년사랑 바이러스'는 생각보다 강력한 것 같다. / 최육상

덧붙이는 글 | <중년의 그 사랑에는 상처를 피한 흔적이 있다> 이채 제3시집, 도서출판 천우, 143쪽, 6000원


중년의 그 사랑에는 상처를 피한 흔적이 있다

이채 지음, 천우(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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