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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프로풋볼리그(NFL) 슈퍼볼에서 MVP로 선정된 하인스 워드가 4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회견장에 나온 워드는 "안녕하세요"라고 첫 인사를 건넨데 이어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와 긴장되고 기쁘다"고 말했다. 워드는 어머니 김영희씨를 위해 한국에 집을 마련할 것이며, 펄벅재단과 같은 혼혈아 지원 재단 설립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 4월 3일 어머니 김영희씨와 함께 입국하는 하인스 워드
ⓒ 오마이뉴스

슈퍼볼의 영웅 하인즈 워드가 드디어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발 빠른 미디어들과 상업적 마케팅에 눈독을 들인 기업들의 모시기 경쟁으로 공항은 북새통이었다고 뉴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역정은 코메리칸의 성공신화로 방송 뉴스 톱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가난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을 이겨낸 그들의 삶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왜 하인즈 워드만 야단법석으로 미디어의 조명을 받아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이 확실할 것입니다. 즉 그가 이겨낸 인생 역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반쪽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미디어나 그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중요합니다. 아니 그 사실만이 하인즈 워드를 필요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니라고요?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미식축구를 보십니까? 당신은 그러면 미식축구의 룰을 알고 계신가요? 거의 모릅니다. 미국을 제외하면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네는 'Super Bowl'을 'Super Ball'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단지 한국인 어머니와 함께 이민가서 지독한 가난과 따돌림을 이겨내고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며 호들갑을 떨며 열광합니다.

"We are very proud of you" 4일 오전 하인즈 워드가 태어난 이대대학병원에 붙은 플래카드.
ⓒ 오마이뉴스 박상규
또다시 묻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핏덩이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간 것일까요? 기자는 이민 간 것이 아니라 추방당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혼혈, 그것도 우리가 그리 깔보고 징그러워했던 '검둥이 자식'을 낳고 살기에는 이 땅의 시선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검둥이 자식'을 낳은 여자를 '양××'라 부르며 마치 문둥병 환자 보듯 하던 지난날의 시선에서 기자 역시 자유롭지 못합니다. 혼혈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못합니다.

아니 혼혈들과의 마주침 자체를 피하려는 것이 우리 속 좁은 단일민족(?)의 허울입니다. 인순이의 노래는 좋아하면서도 그녀의 정신없이 헝클어진 곱슬머리에는 눈살을 찌푸립니다. <문화일보>는 약 3만5천 명에 이르는 혼혈 출생 중에서 피부색과 혈통으로 1/3 가량은 부당한 대우와 따돌림, 폭력을 경험하였으며, 20% 가량은 자살충동을 자주 느꼈다는 조사결과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헤니 등은 참으로 예외에 속합니다. 백인 혼혈의 잘생긴 외모는 눈감아 주면서 동양(주로 인도차이나 계통의 피가 섞인) 혼혈이나 흑인 혼혈에 대한 편협한 시선과 질시는 부끄럽고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오죽하면 지하철 광고에 '살색'은 틀린 말이라는 공익광고까지 필요했겠습니까.

하인즈 워드의 방한을 계기로 미디어는 예의 호들갑과 선정적 보도로 혼혈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말이야 지극히 당연합니다.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조용했을까요? 사회적 의제가 되기에는 부족할 만큼 우리의 사회가 그동안 건강했던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혼혈과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외국인에 대한 편견은 그 냄새를 참아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미 곪아 터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 냄새가 싫었던 것입니다. 국민이 싫어하니 미디어가 굳이 그것을 건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미디어입니다.

하긴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저 역시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인즈 워드의 방한을 계기로 쓰고 있는 사실은 분명하니까요. 언젠가 라이 따이한(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인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 친자확인소송에서 아버지를 찾았다는 보도 후 라이 따이한, 나아가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했던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더군요. 우리가 저지른 추하고 부끄러운 과오에 대한 각성은 어느 미디어에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진보'라는 수사를 늘 앞에 내세우는 어디 누구도, 없는 아비와 다른 생김새로 그들이 자신의 조국에서 당하고 있는 차별에 대하여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 진보들이 그리도 날 세우며 비난하는 '미제'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후계들을 받아들여 나중에라도 그들에게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오늘날 일방주의 미국의 전면에서 전쟁을 도발하고 국익만을 추구하는 무리 뒤에는 보이지 않게 자신들의 과오와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침략에 대하여 솔직한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미국의 건강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숱한 낭패에도 미국을 견인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건강성은 치유불능의 환자에 가깝습니다.

▲ 하인스 워드의 입국을 기다리고 있는 취재진들.
ⓒ 오마이뉴스
파시즘의 광풍이 휩쓰는 저변에는 바로 인종주의 혹은 배타적 민족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개 내셔널리즘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면서 지배와 정복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치즘은 극명한 예이며 오늘날 독일이나 러시아에서 나타나는 '스킨헤드' 그리고 프랑스에서 만만찮은 정치적 지지를 받고 있는 극우주의자 르펜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이미 지적했듯이 스포츠 저널리즘으로 위장한 우리의 빗나간 내셔널리즘의 위험성은 그들에 못지않습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 오늘날에는 주로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 혹은 그 공동체를 이르는 낱말입니다. <광장>의 이명훈을 우리가 이념을 앞세워 추방하였듯이 하인즈 워드와 그의 어머니는 인종을 내세워 추방하였습니다. 군부독재와 우리의 편협한 유교적 가치관 등으로 그동안 이 땅에서 내몬 이산의 백성, 디아스포라는 부지기수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붉은 광장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그릇된 내셔널리즘의 광풍이 먹고살기 웬만해진 작금에도 우리 중 누군가를 추방하면서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건강성을 잃은 세상에서 미디어며 기업 등은 혼란한 백성에게 하인즈 워드 신드롬을 과장하여 거짓 선전을 일삼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땅에 살고 있는 혼혈인들의 대다수는 그에 대한 관심이나 과도한 미디어의 흥분이 또 다른 차별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미리 아파하고 있습니다.

하인즈 워드의 방한이 우상숭배의 해프닝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셔널리즘의 옷을 입은 파시즘적 선동과 인종적 편견으로 한쪽에서는 자신의 백성을 추방시키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추방된 우상을 불러들여 전체주의의 장식으로 치장하는 이상한 나라, 그 기괴한 영웅 하인즈 워드. <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한 자의 시선>을 쓴 서경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디아스포라에게 '조국'은 향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국이란 국경에 둘러싸인 영역이 아니다. '혈통'과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으로 굳어버린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배나 인종차별이 강요하는 모든 부조리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을 의미한다. 우리 디아스포라들은 근대국민국가를 넘어선 저편에서 '진정한 조국'을 찾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의 요약수정본은 덕성여대 신문사에도 송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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