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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10일), 나는 서울 신촌 홍대 앞 비보이극장에 다녀왔다. 창작 댄스퍼포먼스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장기공연에 돌입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울러 세계의 청소년들이 왜 우리 한국 비보이들에게 열광하는지, 새로운 한류조짐이라는 말이 과연 사실인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 손을 발처럼 쓰는 춤. 내가 춤에 잠깐 빠졌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하던 동작들이다.
ⓒ (주)에스제이비보이즈
스무 살 시절 한 여섯 달 정도, 나는 종로의 유명했던 디스코클럽 '미스터리'와 명동의 '로얄디스코데크'를 들락거리며 춤에 잔뜩 미친 적이 있었다. 고막을 때리는 음악과 사이키조명에 맞춰 몸을 흔들다보면 희열이 느껴졌다. 새로운 춤동작을 연구(?)하기 위해 진땀을 흘렸고 사람들이 내 춤을 보며 환호성을 보내는 순간만큼은 부러울 게 없었다. 세상이 온통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졌으니까.

피 끓는 젊음이란 한 때 그런 흐름도 타나보다. 세월이 흘렀고 이제 나는 거리의 춤꾼으로만 여겨지던 젊은이들을 주목한다. 비보이(B-boy)와 비걸(B-girl)이 바로 그들이다. 원래 80년대 초반 마이클잭슨의 이른바 '관절꺾기춤'이 전 세계를 열광시키면서 주목받게 된 브레이크댄스로부터 출발한 게 바로 요즘 비보이(Break Beat Boy) 댄스다. 거리에서 춤을 추던 그들이 이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중력(重力)을 거부하는 젊은이들

평일인데도 400여 명의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눈에 들어온 모습은 호주, 미국, 일본 등지에서 온 40여 명의 관광객들. 공연 시작 전, 객석을 스케치하며 나보다 나이가 적지 않을 듯싶은 중년 관객들이 30여 명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스트리트댄스의 월드컵이라 할 수 있는 BATTLE of THE YEAR(독일)에서 2002년, 2004년, 2005년 우승을 차지한 우리 젊은이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결실을 맺는 듯 보였다.

▲ TV와 연극을 통해 친숙한 연기자이기도 한 이근희(47)씨.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총감독을 맡게 된 그는 이 공연에 참여하는 비보이들의 큰형이 되어 뒷받침하는 게 자신의 책무요 보람이라고 말한다.
ⓒ 이동환
이근희 : "뭔가 연기자로서 후배들과 관련해 무대를 통해서 남기고 싶었습니다. 무대에 비하면 방송연기는 재미없어요. 15년째 우리나라에 소개 안 된 작품들을 해왔는데, 작년에 우연히 비보이들을 알게 됐지요. 만나보니까 이 친구들 실력도 실력이지만 훌륭한 무대를 함께 꾸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3주 정도 홍대 언저리에서 펼친 대관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발전가능성이 보였고 이근희씨와 주변의 뜻있는 사람들이 비보이 공연을 활성화할 수 있는 전용극장을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게 바로 홍대 앞 삼진제약 건물 지하 1층에 자리한 '비보이극장'이다.

▲ 기예에 가까운 춤동작들. 자유롭고자 하는 젊음의 역동성이 느껴진다.
ⓒ (주)에스제이비보이즈
<제1막> 순수와 열정 : 발레연습장(낮). 세 명의 발레리나 지망생이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피아노 선율에 맞춘 그들의 동작은 우아하기만 하다. 이어지는 비보이들의 열정적인 연습 장면(밤). 스트레칭과 기본동작으로 연습을 하고 있는 비보이들. 강한 비트음악에 맞추어 연습에 몰입하는 그들은 금세 땀으로 뒤범벅된다. 윈드밀, 토머스, 헤드스핀 같은 현란한 묘기들이 펼쳐질 때마다 객석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진다.

바로 내 뒷자리에 앉았던 백인여성 세 명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손을 발처럼 쓰며 중력을 거부하는 그들 몸짓이 힙합정신(절대자유추구)의 또 한 부분이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무릎을 쳤다.

<제2막> 만남과 좌절 : 강한 비트의 음악과 조명이 끈끈하기만 한 클럽에서 우연히 소녀와 비보이 소년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서로 호감을 느끼지만 이들을 방해하는 무리가 있다.

발레 연습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비보이 댄스를 흉내내보는 소녀. 호감을 느꼈던 비보이 소년의 모습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춤에 집중할 수가 없다. 결국 힘없이 주저앉는 소녀.

▲ 중력을 거부하는 젊음의 몸짓에는 그 어떤 갈등이나 증오도 없다. 화합만이 있을 뿐이다.
ⓒ (주)에스제이비보이즈
이근희 : "세계에서도 비보이전용극장은 아마 처음일 겁니다. 외국은 길거리에서 춤을 춰도 그 전문성을 인정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아니에요. 따라서 이런 전용극장이 이 친구들의 발전과 전문성을 인정받게 하는데 기여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들의 오해를 풀고 싶기도 합니다. 이 춤이 1, 2년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최소 5년에서 7년은 해야 춤 좀 춘다는 소리 듣습니다."

거리의 댄서들을 불량하게 보는 시각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술 담배 멀리 하고 자기 몸 관리하는데 노력하지 않으면 이 바닥에서 인정받기 힘들다. 혼숙이나 하고 타락한 성인문화를 흉내 내는 친구들이 잠깐이나마 버틸 수 있는 세계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자신들만의 경지를 이룬다. '겜블러'나 '라스트포원' 같은 그룹이 세계대회를 석권하기까지 수많은 젊은이들이 음지에서 피와 땀을 흘려왔다.

<제3막> 미궁과 구원 : 혼란 속에 빠져버린 소녀. 끝없이 빠져드는 혼돈의 늪.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창작곡 '미궁'과 함께 가면을 쓰고 등장한 일단의 무리들. 소녀의 불안한 정신세계를 그려낸 안무와 미궁의 궁합이 그야말로 찰떡이다. 외국인들이 이 공연을 보고 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란다. 혼동 속에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위험, 그리고 구원. 꿈속에까지 나타나던 바로 그 비보이 소년을 만나게 된다.

<제4막> 환희와 화합 : 소년과 소녀는 발레와 힙합을 아우르는 환상적인 앙상블을 이뤄낸다. 이 공연의 주제가 '화합'임이, 댄서들의 화려하면서도 역동적인 춤동작을 통해 강조 된다. 이 장면에서, 젊은이들은 쉽게 화합을 보여주는데 왜 기성세대들은 화합은커녕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모두 '적'이라는 서늘한 등식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했다면 지나친 감상의 비약일까?

뒤풀이 한마당 : 공연 중간, DJ의 현란한 스크래치 시범이 좌중을 압도한다. 이어지는 출연 비보이들의 개인기 경연. 객석까지 넘나들며 펼쳐지는 그들의 개인기는 현란하다 못해 한바탕 흐드러진 봄꿈 같다. 관객까지 끌어내 춤마당이 벌어지고 휘늘어진 수양버들처럼 착착 감기는 잔치판이다.

수출문화상품으로 손색없는 퍼포먼스

이근희 : "사실 1년여 이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제가 해준 부분보다는 오히려 느끼고 배우고, 얻은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해요. 세계적으로 공연문화의 화두는 비언어퍼포먼스(Non Verbal Performance)입니다. 몸을 매개로 표현하는 스타일이 점차 각광받고 있어요. 플레이어의 능력이 아주 중요한 시대가 된 듯합니다. 연출이나 기획에 의해 짜진 틀을 거부하고자 하는 비보잉, 우리 친구들의 실력을 볼 때 세계에 내놔도 손색없습니다."

▲ 왼쪽부터 비보이팀장 한상민(27)씨, 총팀장 김근서(28)씨, 힙합팀장 김우성(27)씨. 장난스런 표정 하나에도 정형화된 것들을 거부하는 젊음의 생동감이 묻어난다.
ⓒ 이동환
공연이 끝나고 핵심 출연자들을 만나봤다. '고릴라크루'에서 활동하던 멤버들이다. 춤 경력만 10년이 넘은 베테랑이다. 힙합에 매료돼 춤 춘 게 벌써 12년이 지났다는 김근서 총 팀장의 특기는 전종목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날렵한 춤동작이 그의 장기다. 춤꾼들을 가볍게 보는 경향에 대해, 직업으로 보지 않는 기성세대 시각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김근서 : "상당한 전문성을 요하는 일이에요. 몇 년 만에 뚝딱 습득할 수 있는 춤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물론 요즘 세계대회 우승이다 뭐다 언론에서 많이 보도하니까 저희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승에만 초점을 맞추고 부각시키니까 아쉽습니다. 사실 저희 윗세대 춤꾼들의 고생, 그리고 저희 세대들의 피나는 노력과 저변이 오늘날 한국 비보이를 세계일류로 만들었지요."

춤추는 게 행복하고 곧 인생이라는 한상민 비보이 팀장은 서른 넘으면 할 수 없지 않겠냐는 질문에 고개를 내저었다. 난이도와 체력을 요하는 기교야 떨어지겠지만 완숙된 춤으로 후배들을 가르칠 수 있고 무대도 여전히 가능하다고 자신감을 표했다. 그는 지구를 들어 올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역동적인 춤동작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김우성 힙합팀장의 춤동작은 부드럽다. 어려운 묘기임에도 부드러운 선을 유지한다. 그는, 비보잉이 관절꺾기 같은 무리한 춤동작으로 청소년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는 어른들의 시각이 바뀌기를 바란단다. 관절꺾기가 비보잉이라는 인식은 오해라며, 사전사후 충분한 스트레칭이 기본이기 때문에 일각에서 우려하듯 관절과 근육에 무리인 춤은 아니란다.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부분이기도 하단다.

▲ 공연이 끝나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관객들에게 함께 사진 찍는 시간을 베푼다. 앞에 두 명 여성은 일본관광객. 공연 내내, 휴대전화를 사용해도 좋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도 좋고, 아무런 제약이 없는 공연. 오직 '자유스러움'만이 넘쳐난다. 그러나 결코 방임은 아니다.
ⓒ 이동환
전국에 비보이 전용극장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대 간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손잡고 찾아갈 수 있는 훌륭한 의사소통의 장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난타>가 세계무대를 주름잡았듯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도 거듭되는 업그레이드로 순수 우리 것을 많이 가미해 넓은 무대로 진출하기를 희망해본다.

덧붙이는 글 | 공연문의 : ☎ 02-323-1957
바로가기 클릭 ☞ 비보이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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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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