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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국어시험 이제 큰일 났다. 영어가 권력이란다."
"신문 봤어? 늦기 전에 토익부터 봐 두라는데?"

아침부터 국어인증시험(KET) 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랍시고 걱정해 주는 메신저에 전화가 이어진다. 마침 17회 시험 접수기간인데 일간지에 '영어가 권력이다'라는 기사가 1면을 장식하고 인터넷에서도 화제가 되었다니… 피곤한데?

영어 잘하면 몸값 40% 상승?

▲ '영어 권력' 한국일보 2006년 3월 6일자 기사.
ⓒ 한국일보 PDF
신문을 펼쳐보니 <한국일보>에서 서울대 경영학과 86학번들을 조사해 보니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40% 정도 몸값이 더 나가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요즘같이 각박한 시기에 40%라… 친구들은 그 차이가 400%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왠지 다음 정리해고에선 영어 못하는 순서로 잘릴 것 같다는 친구도 있었다.

영어가 권력이라는 것은 모든 이들이 실감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은 이른바 IMF 시대를 맞아 외국 자본이 직접 경영하는 회사가 늘어나고 외국 컨설팅 업체가 주장하는 것들이 교과서처럼 받아들여지면서 '영어의 압박'이 부쩍 심해지고 그 자리를 굳혀 나갔다고 이야기한다.

은행원인 친구 하나는 서민 동네 지점 일해 왔고 사실 영어 쓸 일은 거의 없는데 승진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이유가 영어가 딸리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외국계 은행이 되면서 유학파나 외국인 회사 경험자들이 고위직을 차지했고 그런 영향이 일선 지점에까지 파장을 미친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상황에 맞서고 있는 노조에서도 외국인 경영진을 상대하다 보니 영어 잘하는 간부가 상종가라나.

그럼 영어를 하면 되지 않나?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말이란 게 필요하면 늘게 되어 있는데 당장 쓰는 말은 아니면서 일정 수준에 이르러야 하고 그것도 하는 일 하면서 따라 잡기는 만만치 않다. 게다가 악착같이 공부해서 영어 실력을 높여 놓아도 영어 권력 세계에서 통하는 무슨 대학교 유학 출신, 무슨 컨설팅 그룹 출신 같은 것은 메워지지 않는다.

자식 몸값 높이려고 해외유학 보내봤자...

난 그렇다 치고 자식이라도 이런 한을 물려받지 않도록 영어를 가르쳐 볼까? 이 대목에서 좌절은 깊어진다. '영어가 권력이다' 기사에서 인터뷰에 응한 어느 강남 학부모 말처럼 "돈으로 해결되는 유일한 과목이 영어"인데 영어 못해서 몸값 -40%에 고용 불안정마저 절감하는 부모가 자식 영어 공부에 투자할 여력은 학습지 하나, 학원 한 군데 더 정도다.

자기가 절감한 영어 권력으로 인한 차별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무리해서 유학을 보내고 기러기 아빠가 되는 친구들도 많이 봤다. 악착같이 일하고 심지어 다니던 직장에서 희망퇴직해서 일단 목돈 당겨 자식이랑 마누라 외국 보내 놓고 다시 비정규직으로 옛날 하던 일 하면서 밤에는 대리운전 뛰는 친구들도 하나도 아니고 여럿 봤다.

내가 국어능력인증시험(KET) 일을 해서가 아니라 '조기 유학+기러기 아빠'… 뜻은 이해하겠지만 권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필사적인 노력으로 따라가기엔 이미 격차가 너무 벌어져 있다.

이른바 강남 아이들은 어려서 100만 원 한다는 영어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때면 조기유학이나 해외연수로 영어 다져놓고 중고등 학교는 특목고 진학해서 다른 과목 다지기로 대학 간다. 대학도 아예 국내 대학은 건너뛰고 해외로 직행하기도 하고 상류층의 경우 대학보다는 미국 사립 고등학교 유학으로 인맥을 다지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한국교육개발원이 2005년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조기유학을 보낸 부모들을 분석해 본 결과 학력에서 학사는 기본이고 석박사만 54.3%를 차지한다. 소득도 월 600만 원 이상 버는 사람들이 46%다. 사정이 이런데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어떻게든 따라 간다고 해도 저쪽이 100점 얻었다면 우리는 20~30점 정도 따라가기도 벅차다.

무리해서라도 조기유학 보내면 그 다음은? 속된 말로 '오링'되어 버리면 지금 1000만 원 하는 등록금 오르면 올랐지 내리지는 않을 텐데 대학은 뭐로 보낼 것이며 자식들 시집 장가는 뭐로 시킬 것이며 평균 수명 길어져 그러고도 몇 십 년은 더 살면서 무슨 돈으로 연명할 것인가? 전세 얻고 집 사면서 받은 융자들은 다 갚으셨나?

영어 권력 시대인 것은 분명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살림 다 털어서 내 자식 영어 가르치기 하다 황새 따라가는 뱁새가 되지는 말자. 그럼 앉아서 양극화 대물림을 지켜봐야 하나? 아니다. 뱁새에게는 뱁새의 전략이 있고 게릴라에게는 게릴라의 길이 있다. 영어 권력을 인정하고 그에 맞서거나 묻어가거나 어쨌든 장기전을 각오하면서 나도 살고 자식도 살아남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영어 권력의 실체는 영어를 쓰는 세력들끼리 정보를 선점하고 인맥을 공유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세력이 영어를 잘하는 것은 어떤 지역에서 태어나 어떤 부모 밑에서 자라난 결과지 영어를 잘해서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무리하게 투자하여 내 자식에게 원어민 수준의 영어 실력을 갖춰 준다 해서 그 세계로 들어간다는 보장은 없다.

유감스럽게도 애비의 신분이 발목을 잡는다. 이건 마치 베팅 무제한인 포커를 치는 것 같아서 좋은 패(자식이 머리가 좋다거나)를 갖고도 상대가 돈으로 밀린 끝장인 판이다.

돈으로 해결이 덜 되는 과목은 바로 '국어'

다시 강남 엄마 인터뷰로 돌아가자. "돈으로 해결되는 유일한 과목이 영어"라면 "돈으로 해결이 덜 되는 과목"은 무엇일까? 물론 현실은 비정해서 돈으로 영어를 해결한 쪽은 다른 과목들도 잘 하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노출 환경에 정비례하는 영어에 비해 다른 과목들은 해 볼 만한 여지가 있다. 그 중에서 꼭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국어능력'(국어 과목이 아니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언어사고력'이다.

정부에서 본고사형 논술 내지 마라, 통합형 내지 마라 노래를 불러도 대학들은 줄기차게 내신보다는 논술 비중을 높여 나갈 것이다. 서울과 부산에서 중고교 시험에서 논술형 문제 출제를 늘리겠다는 것도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7차 교육과정을 마치고 8차로 넘어가게 되면 확실히 외우는 공부보다는 이해하고 논술, 구술하는 문제들이 늘어날 것이다. 여기에 뒤처지지 않고 적응하는 언어사고력은 다행히도 적은 비용으로 꾸준히만 하면 따라가기 나쁘지 않은 분야다(쉽다고는 안했다!).

주변에 고시생이 있다면 최근 행정고시에서 도입된 PSAT를 물어봐라. 언어추론, 자료해석 같은 새로운 이해하고 느끼는(?) 문제에 걸려 기존 암기형 공부법이 고전하고 있다. 삼성맨 되려면 영어 회화 잘 해야 한다고? SSAT(삼성직무적성검사)엔 50%가 언어와 추리다. 의사가 되려면(MEET/DEET)를 봐야 하는데 언어추론과 의사소통능력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내 자식이 사회에 나갈 때 진로를 미리 예상하고 그것에 맞는 맞춤식 공부가 필요한데 장담하건데 언어사고력은 분명 도움이 되는 물고기 잡는 기술이다.

논술도 영어 못지않게 돈이 든다는 걱정도 한다. 비싼 돈 주고 PSAT 학원 다닌 사람들보다 평소 신문 즐겨 보고 폭넓게 독서한 사람들이 높은 점수를 받는 추세다. 언어사고력이란 말 그대로 말귀 알아듣고 읽은 내용 잘 이해하고 왜 그럴까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표현하는 능력이다. 학습지나 학원도 좋지만 평소 신문 보고, 왜 그럴까 궁금증을 떠올리는 습관 중요하고 이왕 볼 TV 정보가 많고 생각하는 프로그램 보는 습관으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가난한 아빠들에게 고한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 자식 외국 보내고 홀로 기러기로 남아 컵라면 먹을 생각 말자. 장기적인 자산 관리와 교육비 지출로 자식이 성인이 되어가는 중요한 고비에서 꼭 필요한 자금을 무리 없이 집행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스스로 노후를 책임져서 자식 짐을 덜어주는 쪽이 현명하다.

그리고 언어사고력이란 무기에 주목하자. 늘어져 TV만 보는 아빠,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아빠가 아니라 신문 보는 아빠, 아이들 데리고 박물관 가는 아빠, 아이들이 던지는 왜? 라는 물음에 함께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빠가 되자. 비싼 유학은 못 보내고 족집게 논술 과외는 못 시켜도 영어 권력에 맞설 게바라 정신을 길러주고 잘 맞는 총 한 자루 쥐어주는 당신, 멋지다!

마지막 정리.

- 영어 권력? 실존한다. 영어 양극화? 물론이다.
- 영어 권력 편입은 생각보다 격차가 크다. 무리해서 따라 가기 보단 나름의 전략을 짜자.
- 자식 진로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꼭 필요한 것을 추려서 받침해 주자.
- 영어 공부는 시켜야 하지만 포기할 것은 포기하자. 예를 들어 원어민 수준 발음 같은 것.
- 국어능력, 언어사고력에 주목하자. 다른 공부를 하는 도구가 된다.
- 입시와 취업에서도 언어추론형 문제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참고하라.
- 가난한 아빠일수록 자식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고 좋은 본을 보이는 것으로 승부하자.
- 그리고 기운 내자!

덧붙이는 글 | 장익준 기자는 국어능력인증시험(KET)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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