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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0일자 4면에 실린 박지향 서울대 교수의 인터뷰. ⓒ조선일보 PDF
최근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 머리말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왜곡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다.

책에서 논란을 일으키는 대목은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가 쓴 <재인식>의 머리말. 박 교수는 1월에 작성한 글의 첫 단락에서 "책의 구상이 구체화된 것은 2004년 초가을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 무렵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해전사>을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을 지면을 통해 접하고,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을 이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13일 "노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박 교수의 주장에 가장 근접한 대통령의 발언은 2004년 8월 25일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에서 행해진 것으로 다음과 같다.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은 많은 젊은 사람들이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시대적인 흐름 때문에 직접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아무 실천은 못하지만 가슴속에 불이 나거나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다 한번씩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현실적으로 제대로 밝혀지고 평가되지 않았고 여전히 그 시대를 거꾸로 살아오신 분들이 득세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냉소하고 이 역사가 계속되는 한 우리 한국사회에 미래가 없다."


박 교수의 주장은 상당수 신문들이 책 소개에 인용하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조선일보>는 10일자 인터뷰에서 박 교수의 왜곡된 주장을 되풀이해 전달했고, <문화일보>도 같은 날 사설에서 이를 근거로 "(노 대통령이) 386운동권의 경전중 하나인 <해전사>를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썼다.

노 대통령이 2003년 삼일절 기념사에서 "우리의 근·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을 겪었다"고 말하고, 2004년 국회에 친일파재산환수특별법 통과를 주문하는 등 비판적인 현대사 인식을 드러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해전사>를 언급한 적이 없고, 그 자신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한다"는 얘기를 전한 것이기 때문에 박 교수의 글과 일부 언론의 보도는 '사실 왜곡'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머리말을 쓴 박지향 교수는 13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2004년 8∼9월 사이에 나온 칼럼에서 그런 말을 본 적이 있는데, 두세 번 건너뛰면서 왜곡이 있었던 것 같다"며 "내가 정확하게 짚어보고 썼어야 되는데 할 말이 없다"고 전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중요한 것은 대통령 발언의 사실 관계가 아니다"며 "당시 과거사청산 얘기가 한창 있었는데,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분위기를 걱정했던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박 교수는 <재인식>을 정치적 논쟁거리로 승화시키려는 일부 언론의 문제점도 꼬집었다. 그는 "나도 인터뷰를 하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읍소했는데, 언론에서 그렇게 쓰는 걸 어떻게 막냐"고 반문했다. 박 교수는 "책이 이미 2쇄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3쇄 찍을 때 수정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재인식>은 조선어학회와 이광수 등을 새롭게 해석하고 현대사 연구에 있어서 '탈민족주의' 화두를 던지는 등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준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사실에 기초하지 않거나 정치적인 이슈화에 집착하는 일부 필진의 시각이 <재인식> 출간의 의미를 도리어 깎아내리고 있다는 지적도 함께 제기된다.

<재인식>의 필자로 참여한 이영훈 서울대 교수(경제학과)는 <해전사>의 주요 필자인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과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를 겨냥해 "민족만이 역사 쓰기의 유일무이한 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실증에 바탕을 둔 근대적인 역사학으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각각 공격한 바 있다.

그러나 <해전사>와 <재인식> 양쪽 모두에 필자로 참여한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는 13일 오전 < CBS 뉴스레이다>와의 인터뷰에서 "그 분들은 그 당시 상황에서 할 이야기를 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 때의 맥락을 무시하고 그 때의 발언을 끄집어내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선학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고 제동을 걸었다.

이 교수는 "우리 사회 전체가 좌파적 인식으로 편향되어 있다고 보지 않는다"며 "좌·우파적 역사 인식이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는 것,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서로 토론을 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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