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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로 들뜬 24일. 평택시 팽성읍 도두2리 이장 이상열(60)씨를 만나러 충남 예산의 한 공원묘지로 향했다. 이웃 마을인 대추리에 살고 있는 기자는 전날 이 이장이 농림부장관에게 "이 마을을 한 번 방문해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는 제보를 받았다.

예산 추모공원에서는 이틀 전 유명을 달리한 젊은 농민의 시신을 마을주민들이 운구하고 있었다. 고인은 마흔여덟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뜬 이관식(48)씨. 공원묘지에 도착했을 때 장례에 참여하느라 이틀 동안 뜬눈으로 보낸 이 마을 청년회장 정만진(39)씨를 만날 수 있었다.

만진씨로부터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들을 수 있었다. 정씨와 고인은 오랫동안 함께 농사지어온 형님 아우 사이다. 사는 곳도 윗집 아랫집 이웃이고, 한 논에서 일하고 한 방앗간에서 일했다. 만진씨는 고인이 "농민으로서 당할 건 다 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오랫동안 정부로부터 임대해 농사짓던 이른바 '하천부지' 농사를 지난해부터 못 짓게 됐다. 대추제 보수공사가 시작됐고 제방 벽을 세우기 위한 흙을 조달하는 데 이 논의 흙이 파헤쳐졌기 때문이다. 정부 땅 소작인이었던 고인은 이태 치 실농보상비를 받고 20여 년 지속해 온 농사일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작년 일이다.

작년에 이 마을에 미군기지 확장이 예정되면서 이 하천부지 역시 확장예정지에 편입되었고, 관계기관에서는 경작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제방공사라는 구실 아래 이 땅을 서둘러 되가져갔다. 만진씨는 그래서 이 제방공사가 "오해의 소지가 많은 공사"였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 충남 예산 추모공원에서 만난 이상열 이장
ⓒ 문만식
어쩐지 이상열 이장이 보이지 않았다. 오전 11시가 다 되어 공원묘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보이지 않던 이 이장은 기자가 버스에서 내려 고인이 묻힐 묘소에 힘겹게 걸어 올라갔을 때에야 눈에 띄었다. 이 이장은 묘역을 다지고 있는 일꾼들과 함께 손에 삽을 잡고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있었다. 일찌감치 묘역에 도착해 고인이 묻힐 자리를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남매의 오열 속에 치러진 장례식을 딱한 심정으로 지켜본 뒤 장지에서 내려와 마을 주민들을 실은 전세버스에 올랐다. 이상열 이장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미리 자리를 맡아두었다. 이 이장에게도 "제 옆자리로 오시라"고 귀띔해 두었다. 출발시간은 다가오고 버스에 빈자리는 거의 사라져 가는데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시로 창밖을 내다보던 내 시선에 식당용 철제 물통을 나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내 버스는 떠나는데, 미리 맡아둔 빈자리가 민망하게 이 이장은 끝내 오지 않았다. 환갑이라는 '어린' 나이이기에 마을 '어른'들 수발 드느라 맨 마지막까지 뒷정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청년회장 만진씨는 이 이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 질문에 대뜸 "재수 드럽게 없는 사람이죠" 했다. "하필 이럴 때 이장을 해가지고 이리 불려다니고 저리 불려다니고" 그는 농담 같은 진담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이장님이 똑바른 사람이에요. 바르고 정도 많고. 이장 보면 월급(마을 주민들이 걷어 주는 '이세') 안 받고 처음부터 봉사하는 거예요. 요번 이장님처럼 똑바른 사람이 없어요. 지금 깨끗해요, 동네가."

다음은 이상열 이장과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 이상열 이장이 답답한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 문만식
- 농림부 장관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요?
"소리가 나면 귀로 들었을 때 왜 소리가 나는지 밝혀보고, 해결해야 할 민원이라면 관계부처에서 상의해서 해결해주는 것이 정치인들의 도리죠. 농림장관이 하나 말도 없고 우리 처지가 억울해서 어제 오후에 편지를 부쳤어요. 답장이 안 오면 올 때까지 몇 번이고 또 할 거예요. 국방장관에게도 국민이 원하는 것이 뭔지 알릴 생각이고요. 농림장관한테 어제 등기로 부쳤는데 지금 영수증도 갖고 있어요."

- 왜 농림부장관이죠?
"농민이 한쪽 귀퉁이에서 다 죽어가는데도 장관이 입장표명 한 마디 없어요. 공권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데도 장관이 입장표명을 못하는 정도가 되면 장관으로서 문제가 있는 거예요. 지속해서 끝까지, 어떠한 해답이 오고 이해가 될 때까지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최근에 병원에는 왜 다녀오셨나요?
"15일 날 신경정신과에 가서 검진을 받았어요. 결과 '치매가 올 우려가 된다'는 진단을 받고 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하라는 처방을 받았어요. 열흘치 약을 지어 와서 먹는 중이에요. 원기가 부족하다 해서 영양주사를 반 시간 정도 맞고 왔죠. 원래 전립선비대 증상도 있는데 신경만 쓰면 그것이 악화가 돼요. 그래서 전립선 약도 계속 먹어야 되고요. 신경정신과에서 나와 가지고는 바로 내과에 갔어요. 위 내시경 검사, 혈액 검사, 심전도 검사를 한 결과 '신경을 많이 써서 위가 부었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거기서도 열흘 치 약을 지어 와서 먹고 있어요."

- 병원에는 왜 가셨어요?
"식은땀이 나고 기운이 탈진되고 피로가 자주 왔어요. 수용재결(중앙토지수용위원회가 지난 11월 23일 미군기지 확장예정지 가운데 협의매수하지 못한 90여만 평의 농지를 강제 수용하도록 결정한 일) 관련해서 신경을 많이 썼죠. 또 내가 여적까지 '참어야 됩니다. 참어야 됩니다'했던 논 주인 세 명이 매수를 하고, 내 동창생마저 매수를 하는 바람에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아팠어요. 마음의 충격이 컸던 거죠."

- 장관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마음은 언제 처음 드셨나요?
"농민대회 후 농업정책으로 쌀 가격을 17만 원 선으로 유지해준다는 농림부 공문을 받고서 장관에게 여기 실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번 연락해봐야 되지 않나 해서 내 소신껏 사실 그대로 기재했을 뿐이에요."

- 답변은 어떻게 예상하세요?
"답변은, 구실을 붙여 변명하지 않을까 생각돼요. 그러나 그것에 대해 또다시 편지를 보내야죠. 변명 듣자고 (편지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장관이 현지에 와서 한번 보고 과연 식량자급과 소득증대에 영향이 없다고 한다면 (미군기지로) 주라고 해야죠."

- 장관이 농지를 와서 보면 마음이 달라질 것으로 보세요?
"그렇죠. 첫째 (우리들의) 한 맺힌 설움이 있고, 둘째 농사짓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춘 땅이란 걸 알게 될 걸로 봐요. 이 땅은 버려서는 안 될 땅이라고 이해할 여지가 충분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 걸로 예상하세요?
"이 땅을 뺏기고 나간다는 생각을 1초라도 했다면 내가 사람이 아니에요. 여적까지 여기 떠나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면. 다만 같이 해나가는 과정에서 동네 사람들이 협조가 안 돼 답답하고 원통하고 이해가 안 될 뿐이에요."

- 장관을 비롯해서 고위층에서 이 땅에 와 본 적이 있나요?
"한번도 고위층에서 여기를 둘러본 적이 없어요. 옛날 우리 조상들이 암행어사 제도, 참 그건 잘 한 거예요. 그것이, 지위가 높고 낮고 저소득 고소득 가리지 않고 국민의 소리를 귀담아 들어서 평가해가지고 벌줄 놈 벌주고 상줄 놈 상주고 했던 거 아니에요? 진짜 우리 선인들 지혜가 높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어떤 극한 상황에 있어도 마패를 내보이지 않고 있다가 따지고 묻고 막바지에 가서 마패를 내보이고, (그러면) 벌벌 떨고 이렇게 하잖아요. 실제 그 제도가 있었다는 것이 나라 운명에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이상열 이장은 농림부장관에게 써 보낸 편지 사본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사본을 보관해 둘 생각을 못했는데 "중요한 것이니 복사해두라"는 주변의 충고를 듣고 부랴부랴 우체국에 찾아가 편지를 찾아내 복사했다고 한다.

위 인터뷰에도, 그리고 아래 편지에도 '이 지역에 와서 광활한 들판을 바라보고 주민들 사연을 직접 들어보면 농림부장관과 국방부장관 마음이 움직이리라'는 상당히 굳은 그의 믿음이 드러난다. 그런 그에게 "장관이나 대통령이나 그걸 몰라서 저러는 걸까요?"하고 되물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건 그에게 또 다른 고문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이상열 이장이 농림부장관에게 등기로 부친 편지의 전문이다.

"농민들 요구 틀렸으면 정부 뜻에 따라주세요"
농림부장관에게 부친 편지 전문

보내는 사람: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도두89 이상열
받는 사람: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1번지 농림장관 귀하

농림부 장관님 귀하.

장관님 국정에 얼마나 바뿌십니까. 저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도두2리 89에 살고 있는 리장 이상열입니다. 장관님께 몇 가지 저의 지역에 한 맺힌 사연을 말씀들일까 하오니 받아보시고 답변을 하여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의사항

1. 팽성읍 대추리 도두리 땅은 바다를 막아 농민들이 일군 땅이고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입니다.
2. 이곳 농민들은 땅만을 일구어 우리 국민의 양식을 만들어 국민의 어려운 배고픔을 해결한 농민입니다.
3. 장관님. 대한민국 헌법에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곳 농민들은 국민이 안이란 말인지요. 국민의 행복 추구권도 무시하는 정부라 생각이 되는데 장관님 견해는 어떠하신지요.

4. 동맹 간의 약속을 운운하면서 백년을 쓸 수 있는 군사기지를 우리나라에 만든다고 우리 농민과 서민을 안정된 삶의 터전에서 돈 몇 푼 주어서 내몰려고 하는 정부 요인들에게 묻고 싶은 말은, 미군에게 우리의 살아있는 땅을 죽음의 전쟁터로 만들어야 되는지요. 이곳에 장관님께서 바뿌시더라도 일차 방문하시여 주민들 요구가 무엇인지 들어보시고 과연 농민들의 희망과 요구가 틀렸다고 생각되시면 정부의 뜻에 따라주세요.

※ 이곳 주민들은 죽어도 이 땅에서 죽고 살아도 이 땅에 살겠다고 475일째 촛불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장관님의 옥체 건강하시기를 하느님께 기원 드립니다. 두서없는 글 받아보시면 답서를 주셨으면 감사하고 고맙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농신은 천심이라 하셨습니다.”

평택시 팽성읍 도두2리 리장 이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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