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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는 없었다. 국민들의 눈과 귀가 모두 MBC ‘뉴스데스크’로 쏠렸지만 보도 내용은 썰렁했다. 삼성그룹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홍석현 주미대사의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 관련뉴스를 주로 배치했고, 녹음테이프 내용은 사실상 공개하지 않았다. MBC는 “일단 법원의 결정을 존중했다”고 했지만 어떤 시청자는 ‘허무 개그’라고 했다.

MBC의 태도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싸늘하다. 국민뿐만이 아니다. 다른 언론의 반응도 냉소적이다. 한 가지 예만 들어 보자.

상당수 신문은 법원의 가처분 신청 결정을 “신청 내용 일부만 받아들인 사실상의 기각”으로 평가했다. 상당수 신문의 이런 해석은 “법원의 결정을 존중”해 녹음테이프 내용을 사실상 보도하지 않은 MBC와는 사뭇 다르다. 신문은 왜 이런 해석을 내놨을까?

법원의 결정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녹음테이프의 원음을 방송하지 말 것, 녹음테이프상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지 말 것, 실명을 직접 거론하지 말 것. 법원은 이같이 ‘3불 원칙’을 밝히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방송 자체를 금지하기는 곤란하다.” 법원은 또, 이학수‧홍석현 씨가 가처분 신청서에서 밝힌 요구사항, 즉 보도할 경우 건당 3억원씩 배상하라는 요구를 건당 5천만원으로 낮췄다.

법원의 이런 결정문을 받아든 상당수 신문이 “사실상 기각”으로 평가한 데는 이런 판단이 작용한 것 같다.

법원이 제시한 ‘3불 원칙’을 어기지 않고 보도할 수 있는 방법, 즉 녹음테이프 육성이 아니라 기자의 목소리로, 녹음테이프상의 대화 내용에 인용부호를 달지 않고 토씨 등을 바꿔 풀어서 보도할 여지가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판단이 그 하나다. 또 녹음테이프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인지가 세간에 널리 퍼진 상태이기 때문에 실명을 밝히지 않아도 전달효과를 기할 수 있었다는 판단도 포함된다. 아울러 보도가 공익을 위한 것이라면 건당 5천만원의 배상금은 감수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보기에 따라서는 제3자의 한가하고 무책임한 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KBS가 어제 ‘뉴스9’에서 보도를 ‘감행’한 것을 보면 꼭 ‘한가한 훈수’로 치부할 일만도 아니다.

MBC가 참고해야 할 사례는 또 있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리크 게이트’가 MBC에 던지는 시사점은 매우 강하다.

조지프 윌슨 전 이라크 주재 미국 대리대사가 이라크의 핵물질 구입 시도 의혹을 부인하는(미국의 이라크 침공 명분을 부인하는) 글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후 발생한 리크 게이트는 칼 로브 백악관 부비서실장이 윌슨 전 대사의 부인 플레임이 대량살상무기 업무를 담당하는 CIA 요원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흘린 사건이다.

파문이 취재원의 신원 공개 문제로 집중되면서 압박을 받게 된 인물이 이 사실을 보도한 타임지의 매튜 쿠퍼, 뉴욕타임스의 주디스 밀러 기자였다. 법원으로부터 취재원 공개 명령을 받았으나 주디스 밀러 기자는 끝끝내 취재원 보호 원칙을 고수해 교도소행을 감수한 반면, 매튜 쿠퍼 기자는 ‘살기 위해’ 취재원을 공개했다.

법원의 명령 앞에서 한 기자는 법 논리에 기댔고, 다른 기자는 저널리즘 원칙을 따랐다. 두 기자의 상반된 행보를 보는 미국의 여론이 어떠했는지는 국내 언론에도 상세히 소개된 바가 있다. 주디스 밀러 기자의 저널리즘 원칙을 인정하는 여론이 주류였다.

‘리크 게이트’ 사례를 MBC의 경우에 직접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따를지도 모른다. MBC가 법원의 결정을 존중한 게 단지 살기 위해서라고 단순화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국민의 알 권리 못지않게 사생활 보호라는 저널리즘의 또 다른 원칙도 있다는 반론을 내세울 법 하다.

하지만 녹음테이프에 등장하는 ‘모 재벌그룹 고위인사’와 ‘모 중앙일간지 고위층’, 그리고 가처분 신청을 낸 이학수‧홍석현 씨가 공인이라는 사실, 공인에 대해서는 사생활 보호권을 일정하게 제한할 수 있다는 숱한 판례들이 있다. 불법 도청 자료라 해도 입수과정이 위법적이지 않고 내용 공개가 공익을 위한 것이라면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는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례도 있다고 한다.

법원의 판결보다 우위에 서는 게 바로 역사의 판결이다. 그리고 역사의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제는 사초를 충실히 남기는 것이다. KBS나 ‘리크 게이트’ 사례로도 부족하다면 MBC는 연산조 때 절대왕권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초를 역사에 남기려 했던 김일손의 예를 돌아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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