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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이 금물로 되어 있다면 그 샘물을 마시면 어떻게 될까? 만약 금물을 생수처럼 마시는 임상실험을 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 금물이 샘물로 이루어져 있는 곳이 있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욕심이 많은 사람이 그 금물을 먹고 싶어 들이키면 순간 그 금물은 맹물이 되고 만다. 인간의 허욕(?)을 실험이라도 하는 듯이.

사람들에게 금은 고대로부터 특히 권력자에게 성취의 대상이 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금을 소유하기 위해 그 욕망의 끝을 향해 치닫지만 허무의 끝에 다다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욕망의 허무혼을 시험하고 있는 듯한 금샘이 기암의 산정(山頂)에 숨어 있다.

▲ 금빛이 찬연한 금샘
ⓒ 정윤섭
국토의 가장 끝자락 땅끝에 그 지맥의 끝을 이어놓고 있는 달마산(達摩山, 489m). 달마산은 온산이 기암으로 이루어져 있는 산이다. 이 달마산 정상 바위 틈에 금샘이 꼭꼭 숨어 있다. 달마산은 기암 속에 여러 개의 신비의 샘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어쩌면 아주 오래 전 달마산에서 수도하던 수도승들의 목마름을 적셔 주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아니면 그 샘물을 근원 삼아 수도를 하는 수도승들이 자리를 잡은 때문인지 모른다.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 화상이 도솔암에서 수도를 하던 때 용담에서 목을 축였다는 이야기는 온산이 기암으로 이루어진 달마산의 영력(靈力)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크지도 높지도 않은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달마산의 허리쯤에 숨어 있는 금샘은 속세의 사람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누구에게나 그 길을 열어 주지 않은 금단의 샘이기도 하다.

달마산 미황사

▲ 도솔천에 떠 있는 듯한 도솔암.달마산 도솔봉에 있다.
ⓒ 정윤섭
달마산은 저 멀리서부터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 산의 아름다움이 두텁게 다가온다. 달마산을 찾아 오르면 관문처럼 미황사가 버티고 서 있다. 아름다울 미(美)자가 들어 있는 것처럼 한마디로 달마산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절의 풍광이 아름답다.

미황사(美黃寺)는 위도상 우리 나라의 가장 끝에 자리잡은 사찰로 이 달마산의 끝자락이 땅 끝으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의 마지막 지맥은 달마산에서 끝나고 다시 바다를 통해 한라산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곳 미황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1692년(숙종 18)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1634∼1692)이 지은 미황사사적비(美黃寺寺蹟碑)에 나온다. 미황사 부도전 앞에 있는 사적비에는 창건 시기와 창건연기설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749년(신라경덕왕 8)에 의조 화상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 미황사의 창건 시기를 적은 미황사사적비에는 미황사의 창건과 관련한 재미있는 연기설화가 전한다. 이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8년(749)에 홀연히 한 석선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지금의 송지면 땅끝)에 와 닿았다 한다. 그런데 그 배 안에서는 하늘의 음악과 범패 소리가 들려나와 한 어부가 이를 살피려 하자 이때마다 번번히 배가 멀어져 갔다.

▲ 미황사를 안고 있는 달마산의 정면.
ⓒ 정윤섭
이곳 달마산에서 수도를 하던 의조 화상(義照和尙)이 이를 듣고 장운(張雲) 장선(張善) 두 사미와 더불어 촌주 우감, 향도 일백인과 함께 가서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그곳에는 주조한 금인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배 안에는 금자(金字) 화엄경(華嚴經) 80묶음, 법화경(法華經) 7묶음, 비로자나, 문수보혈 40성중(聖衆), 16나한(羅漢), 탱화 등이 있었고 금환과 혹석이 각 한 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을 싣고 해안에 내려 놓아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혹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이날 밤 의조 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으로 여러 나라를 편력(編歷)하면서 경상(經像) 모실 곳을 구하였는데 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을 봉안하여라"고 일렀다. 이에 의조 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지쳐 처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눕더니 "미(美)"하고 크게 울며 죽어 버렸다.

소가 처음 누웠던 곳에 사찰을 창건한 것이 통교사(通敎寺)요, 마지막으로 누워 죽은 골짜기에 사찰을 지어 성경(聖經)과 신상(神像)을 봉안하고 미황사라 했다. 이때 미(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하고 황(黃)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을 취해 미황이라 하여 '미황사'라는 사찰의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불교 해로유입설의 예

▲ 미황사사적비에 보이는 우전국 글씨.
ⓒ 정윤섭
이러한 창건 설화는 지금까지 보편적인 불교의 북방 전래설과는 달리 서남 해안 지역에 넓게 퍼져 있는 불교의 '해로유입설'과 관련짓고 있어 고대 서남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문화의 교류 속에 불교도 포함되어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이곳 미황사사적기에는 미황사가 신라 경덕왕 8년(749)에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주목할 부분은 인도를 지칭하는 '우전국(優塡國)'에 대한 기록이다.

"그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면서 경전과 화상 안치할 곳을 구하던 중 달마산 꼭대기에 일만불의 부처님 상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곳을 찾아 왔노라(是夕金人和尙夢中曰, 我本于 國王也, 遍歷諸國, 求安經像, 望見山頂, 有一萬佛現相, 玆故來比).

이곳 미황사사적기에 나오는 우전국은 고대 인도의 나라 중 한 곳을 지칭한 것으로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가 전래됐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당시 인도는 불교가 힌두교의 교세에 눌려 다른 나라로 불교가 활발히 전파되고 있는 시기임을 볼 때 이러한 불교의 해로전래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 미황사 대웅전 천장에 있는 범어.
ⓒ 정윤섭
또한 이곳 미황사 대웅보전의 우물천장에는 범어가 적혀져 있어 옛부터 인도와 연관이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또 대웅보전 주초석에는 바다게와 거북이 상이 조각되어 있어 해로 유입의 가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샘을 찾아가는 길

▲ 바위산이 절경인 달마산.
ⓒ 정윤섭
달마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정상 부위에서 능선을 타고 땅끝 방면으로 완주하려면 4, 5시간은 족히 걸릴 정도로 짱짱한(?) 산길 코스다. 또한 바위를 타고 오르내리는 길은 차라리 모험에 가까울 정도다. 그러나 그 능선 아래로 펼쳐진 다도해를 바라보며 걷는 등산길이 결코 지루하다거나 다시 오기 싫다는 생각을 갖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싸묵싸묵 미황사에서 정상을 향해 가는 길과 시간은 그리 멀거나 험하지 않다. 빨리 금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차라리 너무 짧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금빛 띠를 두른 채 반짝이는 신비의 금샘', 머릿속에 아마 이 상상력을 하고 올라간다면 숨이 약간 차 오를 즈음에 정상에 올라와 있을 것이다. 마치 석문(石門)을 연상케 하는 기암들이 뻗쳐 있는 사이로 올라 숨을 고르면서 저 멀리 산 아래와 바다를 내려다 보면 속세를 떠난 중생이 도솔천의 세계에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달마산에는 특이하게도 바위산임에도 불구하고 바위틈에 여러개의 샘이 존재하고 있다. 산의 신령함인지 아니면 달마산의 특이한 지질 탓인지 그것도 산의 정상부위에 샘이 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듯싶다. 금샘을 비롯하여 용담은 대표적인 샘이고 금샘 또한 큰 금샘 작은 금샘이 있다. 금샘이라는 이름처럼 금샘을 찾기란 싶지 않다.

달마산의 ‘문바위재’라 불리는 정상부근에는 작은 금샘이 있다. 바위와 바위틈 사이에 작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있기 때문에 더욱 찾기가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아는 사람의 안내를 받아야 바위투성이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듯 금샘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곳 작은 금샘에서 큰 금샘을 찾기 위한 여정은 마치 공룡의 등허리 같은 달마산 능선을 타고 도솔봉이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 하지만 바위를 오르락 내리락 멀리 산 아래 서남해 바다를 바라다 보면서 등산을 한다면 그리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큰 금샘을 보기 위한 여정은 거의 도솔암 부근까지 이른다. 이때쯤에는 다리도 아프고 육체의 피곤함이 몰려올 때다. 금샘은 이때쯤에 나타난다. 이곳에서도 큰 금샘은 바위틈 속에 꼭꼭 숨바꼭질 하 듯 찾는 이를 애타게 한다.

수면이 온통 ‘금가루’로 덮여 있는 듯한 금샘은 누군가가 일부러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하다. 누군가 바위틈에 일부러 파놓은 것처럼 절묘하게 자리잡은 샘은 순간 보는 이를 환상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행여 금물이라도 마셔 볼양 궁금증을 안고 바가지를 내밀어 금가루를 떠보면 인간의 욕심을 허무하게 하듯 금가루는 어느덧 빠져나가고 바가지엔 맹물만 남아있다.

달마산 금샘의 신비한 이야기는 옛 기록에도 전하고 있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때 무예라는 스님이 적은 설명이 나온다.

'전라도 낭주(郎州)의 속현을 송양현(松陽縣)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 궁벽한 곳이다.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에는 두륜산이 접해 있고 삼면은 바다에 닿아 있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혈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 세 사람은 앉을 만하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보를 가면 높은 바위 아래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고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이 금샘물은 부근 산아래 사람들에 의하면 피부병이나 여러 질병의 치료에도 쓰여 왔다고 한다.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는 큰 바위산의 정기와 함께 아침 햇살의 정기를 담고 있다는 말처럼 이 유래가 단순한 전설처럼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달마산의 석질(石質)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산의 연맥이 강진군 석문산으로부터 길게 끌 듯 남서쪽으로 이어져 오다 달마산으로 이어진다. 강진 석문산은 우리나라에서도 몇 번째 안가는 규사 채취장이다. 석영이나 수정 등이 많이 나오는 석질로 이 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달마산의 석질 또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차돌(산돌)성분을 하고 있다.

▲ 금샘은 마치 바위를 깎아서 만든 듯하다
ⓒ 정윤섭
실제로 달마산 곳곳의 바위에 작은 수정들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석영이 주성분인 석질의 영향으로 금샘이 빛을 연출했으리라는 추론을 하기도 한다. 흔히 규암 즉 석영이 많이 나오는 곳에는 바위에 게르마늄이 많다고 하며 게르마늄은 물과 이온 교환을 통해 산소를 공급하는데 샘물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순간 우리는 그 오래도록 간직해 오던 상상력과 신비감을 떨쳐내야 한다. 미황사라는 고찰의 역사가 말해주듯 강렬한 불성(佛性)에 싸여 있는 듯한 달마산은 산 아래 사람들의 염원이 산에 불성처럼 배여 있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바위 틈에 결코 마르지 않는 생명력을 유지하며 그 기운으로 솟아오르는 금샘의 생명력, 금샘의 찬란한 황금빛은 불성의 극치로도 다가온다.

혹시 금샘을 찾아간 사람이 행여 금샘을 찾지 못했다고 투덜댈 일은 아니다. 이 산꼭대기에서 핸드폰으로 산 아래 사람에게 어느 지점에 있는지 꽥꽥 소리지르는 것보다는 평소 속세에 찌든 자신이 그 영안(靈眼)이 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라. 그러면 금샘 찾기를 포기하고 가다 뒤돌아보는 순간 다시 금샘이 눈에 띌지도 모르니까.

도솔암 용담

달마산 정상 한가운데 어느 바위 틈에 숨어 있는 금샘처럼 산의 남쪽끝 정상 도솔암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샘이 용담이다. 이곳까지 등산을 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은 송지면 산정에서 마봉이라는 마을을 거쳐 산정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곳에서 도솔암까지는 산능선을 따라 10여분 정도를 가야 한다. 이 도솔암은 미황사를 창건했다는 의조 화상이 수도를 했다는 곳이다. 최근 도솔암이 복원되어 달마산 정상에 고도의 성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곳 도솔암 정상으로 구름이라도 돌라치면 차라리 도솔천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 도솔암 아래 용담
ⓒ 정윤섭
도솔암에서 아래로 20여m를 내려가면 바위 틈에 용담(龍潭)이라는 샘이 있다. 용담은 어른 4, 5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굴로 이 굴 속에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 화상이 도솔암에서 도를 닦을 때 이곳 용담의 샘물을 마시지 않았을까?

이 용담샘은 굴 천장에 드러난 물길에서 물이 굴바닥에 떨어져 샘이 생기고 물이 고인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이러한 샘의 구조는 몇 곳이 되지 않는다. 이 굴은 '용굴'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 속에서 2마리의 용이 나와 승천했다고 한다. 바위 앞에서 용이 입을 벌려 바위가 뚫리고 용이 뿔로 받아 바위에 뿔 구멍이 생겼다고 전하기도 한다.

용담물은 가끔 누런 빛을 띄는데 하늘로 올라가던 황룡이 아쉬움에 자신의 몸에 난 가루를 샘의 벽에 묻혀 두고 갔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용담 아래 마봉사람들에 의하면 용굴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굴에서 떨어뜨린 고무신이 진도 앞바다에 나타난다고 한다. 설화의 진실성을 떠나 옛 사람들의 염원과 함께 금샘의 물빛과 상통하는 이야기여서 달마산의 신비감이 느껴진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산중에서 수도를 하는 수도승들에게도 물이 없이는 살 수 없어 암자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샘이 있다. 마음속에 부처의 영력을 간직한 사람에게만 보여 주는 것 같은 금샘, 신비함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지만 또 그것은 누구나에게 보여 주는 순간 신비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금샘을 보고 싶어 달마산을 찾는 사람은 금샘을 찾지 못했다 해도 이 산의 정기를 담아가라. 그리고 다시 속세의 때를 털고 다시 찾아오라, 그러면 어느 때 환상 속의 보물처럼 금샘이 눈앞에 다가와 있을 것이다.

▲ 금샘은 푸른 이끼가 끼어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상상력을 초월한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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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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