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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은경 기자/사진 이기태 기자]한번은 지위 높은 라마에게 찾아가 여성들이 불교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물은 적이 있어요. 그는 여성들도 깨달음에 도달하는 일이 가능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남성의 몸으로 바꾸어야만 가능하다고 대답하더군요.

그 말에 내가 "깨달음에 도달하는 데는 남성의 성기가 그렇게나 필수적인가요? 남성의 육체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요?"라고 물었어요. 그런 뒤 여성의 육체에는 어떤 장점이 있는지 물었어요.

그는 그 질문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겠다고 하더니, 그 다음날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는 줄곧 그 문제를 고민해 봤는데, 결론은 여성의 육체에는 아무런 장점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생각했죠. 장점이 한 가지 있다면, 적어도 우리 여성들은 남성들이 지닌 자만심만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요.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 중에서


▲ 텐진 팔모 스님
ⓒ 여성신문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이란 의미의 '붓다'. 불교의 최고 가치다. 붓다 자신은 깨달음의 경지에 '여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가부장적 종교 전통이 으레 그렇듯이, 불교에선 전통적으로 '여성'은 이 최고 가치를 이룰 자격 조건에서 제외됐다. 제도적으로도 여성으로서 정식 승려에 입문하는 비구니 법맥을 계승한 국가는 한국과 대만이 유일할 정도고, 동남아 티베트 등지에선 '견습' 비구니 격인 '사미니'에서 멈춰버린다. 그래서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란 선언은 '여성' 예수, '여성' 마호메트가 되겠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2003년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비키 매켄지 지음, 세등 옮김, 김영사)란 책을 통해, 또 지난해 세계여성불자대회에 참석해 국내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텐진 팔모(62) 스님을 6월 30일 국내 첫 강연 직후 우이동 도선사 부근의 한 찻집에서 마주했다.

그는 불교여성개발원(원장 김인숙) 초청으로 6월 30일부터 7월 21일까지 봉은사, 능인선원 등의 사찰과 공주 동학사 등의 승가대학, 이프토피아, 파주 헤이리 마을 등에서의 명상 수련 등을 이끌며 강연을 펼치게 된다.

"여성의 세기가 왔다고 하지만, 여성들은 한편에선 가정 일로, 한편에선 무한대의 경쟁사회에서 여전히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요? 자신이 행복해지려면 우선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성 본연의 타인을 배려하고 돌보는 따뜻한 마음,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본연의 심성을 잘 사용하고 또 보여주는 것이 여성들의 스트레스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텐진 팔모 스님의 한국 초청 강연의 대주제는 '법과 사랑 나눔'인데, 이 중에서도 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비와 그에 따른 행복에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설법을 따라가노라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대안 가치로 떠오르고 있는 '돌봄' '연민'과도 일맥상통함을 느끼게 된다. 도선사 강연에서도 그는 달라이 라마의 "(금생에 와서 내가 배운 것은) 나보다 먼저 남을 내 앞에 놓는 것"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비는 근원적으로 남들과 함께 느끼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한 얽매임, 나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남을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의 삶과 모든 것이 바뀐다"고 역설했다.

종교인으로서의 텐진 팔모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중성'적 면모를 강하게 풍겼다. 그러나 남녀의 구분이 분명한 사안에서는 역시 강성 페미니스트였다. 누군가는 그의 12년 동굴 수행을 두고 그 자체가 페미니스트임을 입증한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강한 정신력에 더한 강한 자아탐구 때문이리라.

"남성의 방식을 따라가려 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는 '2등 남자'밖에 못 됩니다.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을 보십시오.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남성이 이끄는 세상은 계속 내리막길 중입니다. 여성들은 본연의 자비와 지혜로 어떻게 하면 남성들이 간 길을 가지 않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얘기입니다. 우먼파워 시대가 됐다고 해서 남성의 경쟁성과 공격성을 여성이 그대로 답습하고, 남성은 반대로 여성처럼 부드러운 남자가 돼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죠."

그는 의미심장한 실례를 들어 다시 한번 여성이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야 함을 강조했다. 비구니 훈련을 받고 있는 사미니들이 배드민턴 시합을 할 때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세게 쳐 시합에서 이기느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공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공중에 머무르게 하느냐는 것이다. 모두가 승자가 되는 방식, 이것이 바로 '여성'의 방식이라고 그는 단호히 정의 내렸다.

"여성, 남성 따로 구분할 것 없이 서로가 기여하고 서로가 조화로운 관계를 이뤄가는 것이 좋은 파트너십이고,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사실, 여성에겐 남성적 특성이, 남성에겐 여성적 특성이 각각 공존하지 않나요?"

텐진 팔모가 내린 붓다의 본성에 대한 정의는 바로 '변화'다. 그는 붓다의 "모든 게 무상(無常)하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때 '무상'이란 "동일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란 없음"을 의미한다고 부연 설명했다. 이는 또한 불교의 비전과도 연결되는 의미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앞으로 젊은 세대가 계속해서 불법에 관심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가부장적) 종교 전통과 전달 방식도 변해야하지 않겠어요?"

그는 인터뷰 끝머리에 한국의 여성 불자들에게 "불법은 절에만 가서 하고 집에 오면 세속에 쉽게 물드는 '분리'가 아니라, 현실 삶 속에서 불법을 실천해야 함"을 전달하고 싶다며, 이는 자신의 메시지가 아닌 바로 붓다의 메시지라고 힘주어 말했다.

텐진 팔모는 누구인가
엘비스 프레슬리 팬에서 여승으로

▲ '다이안 페리'로 불리던 소녀 시절의 텐진 팔모(앞줄 가운데), 한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선 모습이다.
ⓒ자료제공 김영사

영국 런던에서 1943년 태어난 텐진 팔모의 본명은 프랑스 대중가요 제목을 본뜬 다이안 페리. 굽 높은 구두에 화사한 옷을 차려 입고 재즈클럽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하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열렬한 팬이었던 다이안이 불교도가 된 것은 18세 때였다.

영적 가치를 중시하고 자유분방한 어머니의 영향 탓인지 어려서부터 수녀를 꿈꾸어왔던 다이안은 학창 시절 하인리히 하러가 쓴 <티베트에서의 7년>을 읽고 달라이 라마에게 매혹됐다. 이후 독일 여행에서 읽을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불교 책자를 접하고 스스로 불교도가 되기로 결심했다.

20세의 나이에 인도로 불교 공부를 하러 떠난 다이안은 이듬해 티베트 불교 8대 활불로 티베트의 영적 스승인 캄트룰 린포체를 만나 그의 유일한 여성 제자(사미니)가 되었다. 서구 여성으로선 거의 최초의 불교 출가 여성이 된 셈이다.

'텐진 팔모'는 '수행을 계승하는 가르침을 떠받드는 영예로운 여성'이란 뜻의 법명으로, 스승인 린포체가 하사했다. 린포체는 입적하기 전인 80년 텐진 팔모에게 수차례에 걸쳐 비구니 승원을 설립하고 비구니를 위한 요가 법맥인 토그덴마 법맥을 이어줄 것을 요청했고, 93년엔 다른 라마들도 이 같은 요청을 해왔다.

이에 여성은 정식 승려가 될 수 없는 티베트의 차별적 상황에서도 6년 과정의 묵언수행, 경전, 영어 등을 가르치는 '동규가찰링(Dongyu Gatsal Ling)' 비구니 승원을 2000년 설립, 비구니 양성에 진력하고 있다. 비구니들의 대스승이자 역할모델이 된 텐진 팔모는 유럽, 북미, 호주 등지의 서구 여성들이 그의 뒤를 따라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는 등 서구 사회에 불교가 전파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텐진 팔모는 특히 12년간의(1년 중 8개월은 눈과 얼음으로 외부 세상과 단절될 수밖에 없는) 히말라야 설산 동굴 수행을 포함해 18년간의 은거 수행 과정을 기술한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원제 Cave in the Snow)로 더욱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여성'으로서는 성불할 수 없고, 일단 변하여 '남성'이 된 뒤에야 성불할 수 있다는 불교의 ‘변성성불(變成成佛)’론에 정면 반기를 들고 “나는 계속해서 여성의 육체를 간직할 것이며, 여성의 몸으로 깨달음에 도달할 것이다”라는 그의 다짐은 후배 비구니들에게 큰 용기를 주고 있다. / 박이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여성신문 836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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