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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태일 시인의 유택이 국립 5.18묘지로 옮겨졌다. 이장식에 참석한 유족들.
ⓒ 김준태 시인 제공
"그때(80년 광주 5월항쟁) 죽은 사람도 있어.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유공자 신청을 해.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 꺼내지도 말어."

살아생전 끝끝내 5.18 유공자 신청을 거부했던 시인 조태일(99년 타계)의 유택(幽宅)이 8일 경기도 용인에서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묘지로 옮겨졌다. 그가 명실상부한 5.18 유공자로 정식 인정받은 것이다. 이는 막역지우인 박석무 5.18기념재단 이사장, 후배 김준태 시인 등이 노력한 결과다.

김준태 시인은 조태일 시인의 행적을 담은 인우보증서를 작성하고, 조 시인의 부인 진정순(서울 당곡초등학교 교장)씨와 함께 대전 정부문서보관소를 찾아 80년 당시 조태일의 재판기록 및 사면관련 문서를 찾아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 1999년 조태일 시인의 장례식장에서 "우리들 외롭고 힘들 때 창가에 와 머물러 주소서/목놓아 부르고 싶은 영원한 노래가 되어 주소서"라며 조 시인의 죽음을 통곡한 김준태 시인은 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는 악랄한 유신정권과 군사독재 하에서 5차례나 투옥되면서도 민주화의 열망을 놓치지 않은 사람"이라며 "이장이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또 "문학사적으로나 5.18정신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작지 않은 사건"으로 이번 이장을 평가하며, 올해 5.18 기념식 이전에 세워질 묘비에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운동 그리고, 민족문학 창달에 전념했던 고인의 뜻을 담아낸 비문을 새길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향과 무등산이 한눈에 보이는 곳으로 옮겼으니..."

이장식에 참석한 진정순씨는 남편이 생전에 쓴 시 '풀씨'의 한 대목을 떠올리며 "당신의 고향과 무등산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이곳으로 옮겨졌으니 참 좋겠소"라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김 시인은 전했다.

1941년 전남 곡성 태안사에서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난 조태일 시인은 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해 <국토> <가거도> <자유가 시인더러>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등 8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또, 그가 창간한 시전문 잡지 <시인>은 김지하와 양성우, 김준태라는 한국 현대시단의 굵직한 대어들을 발굴해낸 매체로 유명하다.

조 시인은 74년 시인 고은, 소설가 이문구, 황석영 등과 '반유신-창작의 자유쟁취'를 기치로 내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 창립을 주도했고, 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투옥됐다. 이어 80년 5월에는 '계엄해제 촉구 지식인 124명 서명'에 참여했고, 그 때문에 5.17계엄법 및 포고령위반으로 구속돼 신군부가 주도한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했다.

1999년 9월 간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뜬 그의 5주기를 기려 출판사 창비는 2004년 조태일 시선집 <나는 노래가 되었다>를 출간했다.

▲ 조태일 시인 이장식에 참석한 후배 문인들. 좌로부터 조진태 시인, 임동확 시인, 김준태 시인, 채희윤(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 소설가, 김미숙 시인.
ⓒ 김준태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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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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