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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과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천천히 돌아가는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구수한 노래를 듣는 기분을 알까.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서 레코드판을 한 장씩 사 모으던 그 시절에는 노래들도 참 애틋했다.

▲ 마산에서 헌책방 영록서점을 운영하는 LP 마니아 박희찬씨.
ⓒ 김연옥
게다가 레코드판을 아무리 조심스럽게 간수한다고 해도 찍찍거리는 잡음이 들려오기 일쑤였다. 긁힌 상처가 굵게 나 있으면 바늘이 넘어가지를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계속 맴돌기도 했다. 자연히 그 부분의 노랫소리가 반복해서 흘러나와 속상했던 적도 많았을 거다. 이제는 그런 소리들마저도 그리운 시절이 되어 버렸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사는 사람들, 이른바 LP(레코드판) 마니아들이 찾아 한달음에 달려갔다.

삼십대 중반 여인의 완숙한 사랑 같은 음악

LP를 무려 7만여장 소장하고 있는 박희찬(50·경남 마산시)씨. 그는 가요, 팝송, 클래식, 가곡 등을 가리지 않고 수집해 왔으며 특히 영화음악에 애착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만화영화 '검은 별과 황금박쥐' 레코드를 가장 아낀다고 했다. 그 재킷이 귀할 뿐더러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는 것이다.

▲ 박희찬씨가 가장 아끼는 LP '검은 별과 황금박쥐'
ⓒ 김연옥
박희찬씨는 무엇보다 가수의 원래 목소리 그대로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LP의 큰 매력으로 꼽았다. 날씨에 따라 그 음색이 조금씩 달리 가슴에 파고 드는 것 또한 LP의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고. 그는 LP 음악을 한 마디로 30대 중반에 들어선 여인의 완숙한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헌책방 영록서점(www.younglock.com)의 주인이기도 한 박씨는 필자가 찾아간 날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에 이어 1975년에 나온 LP를 하나 들려주었다. 나훈아의 리사이틀 실황을 녹음한 것으로 30년 전 나훈아의 젊고 건강한 목소리를 그대로 듣는 묘미가 있었다. 그 당시 남진과 팽팽한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박씨는 예전에 아파트 단지마다 돌면서 헌책을 구하러 다닐 때 버려진 오디오들도 얻어 왔다. 고장난 데를 손보면 제법 쓸 만했다고 한다. 달라는 사람 있으면 고쳐 둔 오디오를 거저 주기도 했고. 지금 책방에 있는 턴테이블도 그렇게 해서 구한 것이라고 한다. 책방을 찾는 손님들에게 그것은 옛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을 준다.

"LP로 들어야 나훈아 노래 제대로 듣지요"

▲ 김삿갓씨가 소장하고 있는 나훈아의 LP 레코드(1972년).
ⓒ 김연옥
'김삿갓'(47·경남 창원시)이란 아이디로 '나사모(나훈아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고문으로 활동하는 LP 마니아. 그는 직업의 성격상 본명을 밝히기를 꺼렸다.

그는 2년 전 가수 나훈아의 음색과 창법에 매료돼 LP 수집을 시작했다. 소장하고 있는 LP 수는 50장 정도.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LP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LP는 재킷 디자인이 다양하여 갖고 싶은 욕심이 들게 하고 재킷 뒷면에는 노래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나와 있어 그 내용을 읽어 보는 즐거움이 쏠쏠하다고 한다.

그는 손때 묻은 LP들을 구하러 이따금 서울로 부산으로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간다고. 직장에서 돌아와 레코드판을 조심스럽게 닦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부인과 같이 들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고 했다.

"LP는 가수의 원음을 담고 있다. 한을 토해내며 절묘하게 넘어가는 나훈아의 노래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라도 LP를 고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는 김삿갓씨. 그는 LP 음악에 취해 향수에 젖는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다고 말했다.

▲ 김삿갓씨가 소장하고 있는 나훈아의 LP판들.
ⓒ 김연옥
턴테이블이 재산 목록 1호

정병도(46·경남 마산시 구암1동)씨는 어린 시절 경남 합천군에서 살던 외가에 놀러가 축음기를 보고 언젠가 자기만의 전축을 가지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 영록서점에서 LP를 고르고 있는 정병도씨.
ⓒ 김연옥
직장에 다니던 어느 날 그는 할부로 꿈에 그리던 전축을 사게 되었다. 전축은 당연히 그의 재산 목록 1호가 되었다. 처음엔 어쩌다 생각날 때면 LP를 한 장씩 사들고 집에 들어오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LP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고 카트리지를 몇 개 더 사둬야 되겠다 싶어 급하게 뛰어갔다고.

▲ 정병도(왼쪽)씨는 박희찬씨와 소주 한 잔 하며 LP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 김연옥
그가 본격적으로 LP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2년 전부터다. 그는 그동안 400장밖에 모으지 못했다며 1만장 수집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했다. 그는 LP가 주는 자연스럽고 따스한 울림이 좋아 친구들한테 얻기도 하고 박스를 줍는 할머니들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재활용센터에도 들르고 영록서점에 찾아가 박희찬씨와 LP 수집 정보도 나누고 종종 LP를 구입하기도 한다.

자영업을 하는 그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좋아하는 가수 배호의 레코드를 찾는다. 정성들여 닦은 후 턴테이블 바늘을 판 위에 올려놓는 순간 느껴지는 행복은 말로 다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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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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