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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통합) 이광선(앞줄 왼쪽 네번째) 총회장 등 개신교 목회자들이 지난 20일 서울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위한 삭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안정원

나의 아침 기상시간은 다섯 시 반이다. 요즘은 겨울철이라 가끔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지만 늦어도 여섯 시 안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속옷 바람으로 거실에 나와 기도한다. 그 기도는 늘 절박하고 간절하다. 그것은 내 신앙이 돈독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 반대의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랄까?

기도를 하다보면 늘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두고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 지고지순한 사랑의 거울에 비쳐진 나의 몰골은 얼마나 추악하고 초라한가. 아이들에게 알량한 사랑을 주고 그것을 성급히 되받으려 했던 내 자신이 더없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BRI@기도를 통해서 먼저 허물어진 내 자신을 수습하고 난 뒤에는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중보기도라고 한다. 송구할 만큼 짧은 시간에 약식으로 드려지는 기도지만 내가 어려웠을 때 나를 위해 기도해준 고마운 분들을 생각하며 기꺼이 아침 첫 시간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거실에 나가 속옷 바람으로 짧은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오늘따라 기도가 잘 되지 않았다. 자꾸만 머리에 떠오르는 어떤 그림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학법 재개정을 주장하는 개신교 목회자들의 삭발 광경이었다. 그 장면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사립학교법이 뭐길래 연세 지긋하신 교계 지도자들이 삭발할 생각까지 했을까? 그분들 주장대로라면 사학법 개정에 찬성했던 나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사탄의 세력이 아닌가.

내가 사학법 개정에 찬성한 것은 순전히 아이들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전교조에 가입한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나는 1987년에 첫 교단을 밟았다. 바로 그해 6월 항쟁이 터졌고 일선학교에는 평교사회가 조직되었다. 대학시절 그 흔한 데모 한 번 변변히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신변의 위험도 무릅쓰고 전교조에 가입한 것은 아이들에게 보다 더 좋은 학교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당시 내가 생각하는 좋은 학교 환경이란 막대한 재정이 확보되어야 가능한 그런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에 앞서 학교 구성원들끼리 건강한 상식을 가지고 학생들의 바른 자람을 위해 뜻을 하나로 모으는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꾸었다 고나 할까.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교과서와 교사의 가르침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이론으로만 그치지 않고 삶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입으로는 참을 말하고 행동은 거짓을 일삼는 곳에서 어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예를 한 번 들어보자. 학교가 운영하는 급식실이 있다. 학생들은 일정한 돈을 주고 그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런데 다른 학교에 비해서 반찬이 형편이 없다. 그래도 엄연한 소비주체인 학생들은 아무런 발언권이 없다. 학생들을 대신해서 학부형들이 들고일어나고 싶어도 혹시라도 자녀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내버려둔다.

어쩔 수 없이 뜻 있는 교사 몇몇이 학교장을 찾아간다. 학생들을 대신해서 급식의 개선과 함께 예산 공개를 요구하지만 그것은 교사가 할 일이 아니란다. 결국 교사들은 학교를 고발하기에 이르고 그 결과 수년 동안 수억에 달하는 돈을 빼돌린 사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일로 학생들을 사랑했던 양심적인 교사들은 학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이것은 서울 모 학교에서 일어난 실제 상황이다. 이런 불량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우선, 같은 돈을 내고도 부실한 식사를 함으로써 건강을 해칠 수 있다.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한참 인생을 배워 가는 예민한 시기에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도덕심이 웬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학교에서의 가르침과는 달리 세상의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는 일에 익숙해질 가능성도 있다. 이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얼마나 큰 손실인가.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은 하나뿐이다. 구조적으로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 없도록 법을 탄탄하게 고치는 것이다. 사립학교법도 마찬가지다. 개정된 사립학교법은 개방형 이사제를 도입함으로써 불투명한 유리로만 되어 있던 학교 건물에 투명 유리가 한 장 끼어진 격이다. 원래부터 투명 유리를 사용한 학교라면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렇지 않은 학교라도 공공재인 학교 공간을 개인의 밀실로 착각하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투명해진 학교 환경을 박수치며 환영할 일이지 야단법석을 떨며 문제 삼을 일은 아닌 것이다.

20일 저녁 뉴스를 통해서 교계 지도자들의 삭발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개신교 목회자들이 입시교육에 반대하기 위해 삭발을 단행했다면 얼마나 보기가 좋았을까? 예수님이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셨던 천하보다도 귀한 아이들이 아니던가. 그들을 한낮 점수 기계나 공부의 노예로 전락시킨 살인적인 입시교육을 준엄하게 꾸짖는 삭발식이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런 아름다운 목회자님들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할 도리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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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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