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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지동 여전도회관 14층에서 대선불출마 선언 기자회견을 하려던 고건 전 총리가 지지자들의 저지로 인해 회견장에 입장을 못하게 되자 지하 2층에서 승용차를 탄 고건 전 총리가 굳은 표정으로 여전도회관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고건 전 국무총리가 16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대선 레이스에서 중도하차했다.

비록 '1강 2중' 구도에서 처지는 3위 후보이긴 하지만 한때는 부동의 1위였고 여전히 여권의 유력후보였던 그이기에 그의 중도하차는 뜻밖이다. 그의 참모들과 캠프를 출입한 정치부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지지자들도 '허'를 찔린 느낌이 들 정도다.

그래서 그의 갑작스런 중도하차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오지만, 그가 지지자들의 반대로 기자회견이 무산될 것에 대비해 직접 작성한 서면 일문일답의 '액면'을 그대로 믿고 싶다. 그가 짧은 경력의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결정하면서'(16일 배포한 불출마 선언문의 제목) 내린 결단의 순간에 거짓이 끼어들리는 없기 때문이다.

고건 "'제3후보'나 '선거용 정당' 설립의 전철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렇게 자문자답했다.

- 불출마 선언한 가장 큰 이유는 뭔가.
"기존 정당의 벽이 높아 현실정치의 한계를 느꼈다. 우리나라 선거 정치사에 있어서 '제3후보'나 '선거용 정당' 설립의 전철을 결과적으로 초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제3후보론이 나오니까 추대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불출마를 결심한 것 아닌가.
"추대 형식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새로운 대안 정치세력의 통합에 현실정치의 한계를 느꼈다."

물론 이보다 더 큰 불출마 선언의 현실적 배경은 지난해 후반부터 시작된 지지도 하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또한 불출마 선언문에서 "저의 활동의 성과가 당초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는 여론의 평가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지지도 하락과 당초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는 여론의 평가 또한 '현실정치의 한계'가 수치로 표출된 것임을 감안하면, 두 가지 진단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 점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우리나라 선거 정치사에 있어서 '제3후보'나 '선거용 정당' 설립의 전철을 결과적으로 초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는 대목이다.

고건 전 총리는 자신의 표현대로 "본래 정치권 밖에 있던 사람"이다. 그리고 본디 "탄핵 정국의 국가 위기 관리를 끝으로 평생 공복의 생활을 마감하려 했"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과분한 국민 지지를 받게 되어 그 기대에 부응하는 역할을 모색하며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5·31 지방선거 '불개입' 선언으로 '무임승차론'과 '밥상론' 자초

돌이켜보면 지난해 그에게는 대선후보로서 정치·경제·안보 분야에서 국가경영의 비전과 리더십을 검증받을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5·31 지방선거와 부동산 폭등 그리고 북핵실험 사태 등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지난해 국민여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0대 이슈를 묻는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여론조사(중복응답) 결과에 따르면 ▲북한 핵실험 사태(52.3%) ▲부동산 가격폭등(51.2%) ▲대통령 임기중 사퇴 논란(28.4%) ▲한미 FTA 문제(23.1%) ▲5·31 지자체선거 한나라당 압승(12.3%) 등의 순이었다.

하나하나의 국면이 정치 지도자로의 비전과 리더십을 평가받음으로써 지지도가 크게 출렁일 수 있는 중대한 기로였다. 그러나 고건 전 총리는 대선후보로서 목소리를 내야 할 때 타이밍을 잃거나 엉뚱한 목소리를 냈다. 전략의 부재였다.

우선 정치 분야에서 5·31 지방선거는 정당 경력이 거의 없는 그가 정치 지도자로서 대중성과 지지기반 그리고 선거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 민정당 공천으로 전북 군산·옥구에 출마해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에는 여당인 국민회의 공천으로 제31대 민선 서울시장을 지냈으나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행정가의 이미지가 강하다.

게다가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지도가 바닥세였던 여당으로서는 호남지역 기반을 가진 고 전 총리의 '역할론'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3월 12일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과의 오찬에서 여권이 내민 SOS의 손길을 외면하고 여권 합류를 거부했다.

고 전 총리는 그후 '지방선거 불개입'을 선언하고 정치권의 '러브콜'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지도 1위였던 그로서는 질 것이 뻔한 선거에서 잘해야 본전이라는 '부자 몸조심' 계산을 했을 법하다. 물론 예상대로 선거결과는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검증받지 않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정치인들과 대중에게 과시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지방선거를 계기로 열린우리당의 '무임승차론'과 민주당의 '밥상론'이 그를 압박한 것은 응분의 결과였다.

부동산 폭등·북한 핵실험 국면에서도 이슈 주도나 미래 비전 제시에 실패

▲ 고건 전 총리가 공동대표로 참여하는 '희망한국 국민연대' 현판식이 지난해 11월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인의빌딩에서 열렸다. 고 전 총리가 '5.31 지방선거 불개입'을 선언하고 정치권의 '러브콜'에 일절 응하지 않았던 것도 지지율이 떨어진 이유 중 하나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5·31 지방선거 이후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10%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고 전 총리의 지지율도 6월에 20%대 초반으로 하락했다. 그는 지방선거 '불개입'을 선언했지만 결과는 여당과의 '동반하락'으로 나타났다.

판세가 5·31 지방선거 전까지는 이명박 서울시장과 양강구도를 형성했으나 지방선거를 계기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가세하는 3강구도로 바뀌었다. 선거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은 그가 얼굴에 면도칼 상처를 입으며 한나라당의 압승을 이끈 박근혜 전 대표에게 2위 자리를 넘겨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고 전 총리는 지난해 우리 사회에 가장 영향을 미친 양대 이슈인 부동산 폭등과 북한 핵실험 사태 국면에서도 이슈를 주도하거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북핵 사태와 부동산 광풍 같은 위기상황은 오히려 그의 '우유부단'함과 대비되는 이명박 전 시장의 강점인 강한 추진력과 능력이 부각되는 계기로 작용하면서 1강 2중 구도를 고착시켰다.

그 실현 가능성을 떠나, 한나라당 후보 진영이 '반값 아파트' 같은 국민의 눈길을 붙잡는 정책을 개발해 발표하는 동안 그는 국민의 삶과 직결된 민감한 이슈를 주도하지 못한 채 원론적 입장만을 되풀이해야 했다. 결국 30대 등 참여정부 핵심 지지층의 분노가 표출된 가운데 그는 집 문제에 민감한 젊은층의 관심을 끄는 데도 실패했다.

안보와 직결된 북한 핵실험 정국에서도 그는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핵실험으로 유권자들의 심리가 보수화되자 그는 '가을 햇볕정책'이라는 애매모호한 용어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4년 평가에서 유일하게 50%대의 지지를 받은 것이 햇볕정책을 승계한 대북포용정책임을 감안하면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실제로 북한 핵실험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큰 틀에서의 대북포용 기조는 유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주류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높게 나타났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어정쩡한 입지도 줄어들었다.

고 전 총리의 '중도하차'는 정체성과 정당이 없는 '중도'의 비극

지난 15년 동안 크고 작은 선거에 참여한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씨의 저서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에 따르면, 승리하는 정치인의 9대조건은 ▲대중성 ▲자기다움 ▲지지기반 ▲선거기여도 ▲이슈주도력 ▲권력의지 ▲미래비전 ▲정치감각 ▲시대적 운 등이다.

박성민의 '승리하는 정치인 공식'에 대입해도 고건 전 총리의 중도하차는 당연해 보인다. 그에게서 호남이라는 '지지기반'과 노무현 대통령의 불안정한 정국운영에 따른 반사이익이라는 '시대적 운'을 제외하고는 다른 후보들보다 우위에 있는 조건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고건 후보의 중도하차는 대선 국면에서 정치 지도자로서 정체성(자기다움)과 민주정치의 근간인 정당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고 전 총리는 자신의 지지도가 좀처럼 오르지 않는 이유를 후보로서의 정체성의 혼란에서 찾았다. 즉 자신은 여당 소속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여권 후보로 인식하기 때문에 여당의 지지도와 함께 동반하락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러나 이미 현실적으로 한나라당에는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강력한 후보군이 자리잡고 있음에 비추어 그가 여당 아닌 야당의 유력후보가 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야당 후보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권 후보로 인식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중도'의 비극이다.

또한 그의 중도하차는 정당의 지원을 받지 못한 '제3후보'의 길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드러내 준다. 비록 기성 정당이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설령 지지도 한 자릿수의 정당일망정 후보가 정당 활동을 벗어나서는 자금이나 조직 면에서부터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대선 후보들은 하다못해 경부운하 건설이나 한·중간 열차페리라도 들고 나오는 동안 정당의 지원을 받지 못한 그는 아무런 정책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개인의 지지도에 도취되어 정당을 평가절하함으로써 정당의 지원을 스스로 외면한 그가 대학 강연 등으로 소극적인 대선 행보를 계속하는 동안 경쟁자들은 멀찌감치 도망간 셈이다.

결국 정체성과 정당을 갖지 못한 '제3후보'로서 '원탁회의'라는 멍석을 깔아 놓으면 자신을 지지하는 많은 원내 정치인들이 속속 모여들 것이라는 그의 꿈은 그가 받은 '과분한 국민 지지'만큼이나 헛된 것으로 드러났다.

▲ 지난해 8월 28일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다산 정약용 유적지를 방문해 다산 생가를 둘러보고 있는 고건 전 총리. 그의 깨끗한 결단은 '모든 것을 다 거는 대선판'에서는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끝까지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드는 기성 정치인과는 확실히 다른 그만의 미덕이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깨끗한 결단은 기성 정치인과는 확실히 다른 그만의 미덕

그러나 현실에서 고 전 총리처럼 기존 정당의 벽이 높아 현실정치의 한계를 느낀 정치인은 많았으나, 그처럼 우리나라 선거 정치사에 있어서 '제3후보'나 '선거용 정당' 설립의 전철을 초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불출마를 선언한 유력한 여권후보는 없었다.

역대 대선후보로 나선 이인제·김종필·조순·이인제·정몽준씨의 사례에서 보듯, 경선에 불복하거나 DJP 연합으로 손잡거나 합당으로 후보 대신 당권을 잡거나 여론조사로 단일화한 적은 있어도 고 전 총리처럼 여권의 유력 후보가 자발적으로 깨끗이 물러난 사례는 없었다.

물론 이 또한 '승리하는 정치인 공식'을 대입하면, 그의 권력의지가 약하거나 정당에서 훈련받지 못한 행정가형 리더십의 한계라는 지적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깨끗한 결단은 '모든 것을 다 거는 대선판'에서는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끝까지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드는 기성 정치인과는 확실히 다른 그만의 미덕이다.

고 전 총리를 얘기할 때 배놓을 수 없는 것이 부친 고형곤 박사의 영향이다. 전북대 총장을 지낸 원로 철학자인 고 고형곤 박사는 61년 셋째아들 '건이'가 행정고시에 합격해 사무관으로 공직에 나설때 '목민관 수칙 3계명'을 내렸다. 공직에 있는 동안 남의 돈을 받지 말고, 술 잘 마신다는 소문을 내지 말며, 누구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말게 하라는 3계명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돈과 술 그리고 '줄'을 멀리하라는 것인데 고 전 총리는 공직에 있는 동안 이 3계명을 잘 지킨 것으로 평판이 나 있다. 그가 30대 전남지사에서 청와대로 들어올 때 관행이었던 전별금을 받지 않은 것이나 어떤 공직도 '연줄'로 취한 바가 없음은 잘 알려진 바이다. 애주가인 고 전 총리 또한 사석에서 술을 제외한다면 아버지의 말씀을 충실히 지켜 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비록 공직에 있는 동안 누구에게 줄을 서지 않았지만 후배 공직자들이 자신에게 줄 서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짧게나마 정치판에 몸담는 동안에는 자신을 지지했던 정치인들을 줄 세우는 데도 실패했다. 정당과 정체성이 없는 그를 마지막까지 지탱해준 지지도마저 떨어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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