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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9월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출범식에 참석한 장애인단체 회원과 휠체어 장애인 50여명은 청계천 복원구간을 행진하며 '청계천은 차별천' 스티커를 부착하고 벽에 스프레이로 구호를 남겼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웅장하고 도도한 한강 위로 수많은 대형 다리가 놓여 있고, 테헤란로, 종로, 을지로 뿐만 아니라 서울 전역 어디에나 펼쳐져 있는 고층빌딩들, 넘치는 차량 행렬, 상품이 차고 넘치는 대형 상가들, 또 왜 이리 음식점은 많은지, 이제 홍콩을 부러워할 것 없는 화려한 밤거리, 그리고 사대문과 그 안의 아름다운 고궁들까지….

이렇게 활기가 넘치고 현대 문명의 화려함과 우아한 문화유산을 동시에 가진 서울은 세계 어느 대도시와 비교해도 별로 뒤질 게 없는, 말 그대로 국제적인 도시이다.

최근 이명박 시장은 청계천 복원사업을 통해, 이제 서울을 환경 문제까지도 해결한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었다는 듯이, 건설회사 사장 출신답게 개발추진형 지도자의 이미지로 대한민국까지 접수해보겠다고 기세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과연 청계천 복원 사업이 그 업적으로 대통령 자리까지 넘보겠다는 치적이며 그가 시장으로 재직한 몇 년 간의 서울이 과연 세계에 자랑할만한 국제적인 도시였을까?

우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결론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청계천은 차별천!"

▲ 지난해 10월 1일. 장애인 단체 회원들이 복원된 청계천이 장애인들의 이동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해 10월 1일 복원된 청계천 개통이 있기 하루 전인 9월 30일, 이명박 서울시장은 청계천 복원을 빌미로 국제적인 도시, 서울을 뽑내고자 세계 유수도시의 시장들을 초청해 롯데호텔에서 '서울세계도시시장포럼'을 개최하였다.

그런데 세계 대도시 시장 30여명과 환경전문가 500여명을 초청한 이 국제회의는 이명박 시장이 환영사를 하는 회의 초반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명박 시장이 자랑을 맘껏 하기도 전에 "청계천은 장애인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은 차별천입니다"라고 외치는 장애인인권운동가들이 플래카드를 단상에 펼치며 기습적인 시위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명박 시장은 짐짓 불쌍한 사람들의 가엾은 해프닝이라고 치부하며 넘기려 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청계천복원사업으로 세계 주요 인사들 앞에서 한마디로 '개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날 참석한 세계 주요인사들은 동북아시대의 허브공항으로 세계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나 같은 전동휠체어 사용자가 이용할 수 있는 서울로 들어오는 교통수단이 전무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그리고 그날 장애인들이 무례한 시위를 벌인 것이, 청계천 공사가 시작될 때부터 서울시 측에 장애인의 접근권이 보장되는 공간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수차례 권고했지만 서울시장이 이런 장애인의 요구를 철저히 무시한 채 청계천을 복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과연 알고 있을까?

한국 신문의 사회면에서 가장 큰 비중으로 지면을 장식했던 데모 소식은, 요즘 민주화학생운동은 그 자취조차 찾기 어렵고, 신자유주의에 의한 개방 압력과 미군기지 이전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농민들의 처절한 항거와 국가인권위원회 혹은 시청을 점거하거나 단식 및 노숙으로 목숨을 내놓는 듯한 장애인들의 극한 투쟁이 그 지면을 메우고 있다.

추락사고로 촉발된 장애인 이동권 투쟁

한국의 장애인들이 국가의 시혜적 복지정책에 속아 조금 더 사탕을 달라고 요구하는 차원을 떠나, 장애인의 인권을 이야기하며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장벽 때문에 겪는 장애에 대해 그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이다.

바로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공동대표 박경석 등, 아래 이동권연대)라는 단체가 발족하며, 장애인 문제를 장애인 인권 옹호와 국민으로서 권리 쟁취 차원에서 요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2001년 1월 22일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수직형 리프트가 추락하여 장애인 노부부 중 한 명이 사망하고 한 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장애인단체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서울역에서 정부에 책임 및 대책을 촉구하는 집회를 개최한 뒤 30분간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는 시위를 감행하고,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휠체어를 탄 채 1인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장애인과 함께 지하철 타기' 행사를 통하여 대중교통마저 이용할 수 없는 한국의 장애인 인권 실태에 대해 국민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 2001년 8월 '장애인 이동권쟁취를 위한 연대회의' 박경석 공동대표가 자신의 손과 휠체어를 버스손잡이에 수갑과 쇠사슬로 묶은 채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리고 그해 장애인의 날인 4월 20일, 이들 장애인단체들은 '이동권연대'를 공식 출범시키고 100만인 서명운동, 서울시청 앞 천막농성, 서울역 앞 천막농성 등을 벌이며, 13회에 걸친 '장애인과 함께 버스 타기' 캠페인을 전개한다.

그러나 장애인정책을 시혜적 복지정책이란 시각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정부 당국자들은, 장애인들이 살 권리를 외치는 절규에 왜 저렇게 난리를 치냐며 눈살만 찌푸리지 진정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경찰을 동원하여 일반 집회 시위보다 더 강경하게 진압하고 처벌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그런데 다시 2002년 5월 19일, 지하철 5호선 발산역에서 1급 중증장애인 윤재봉(남, 63)씨가 고정형리프트를 이용하다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이동권연대는 5호선 광화문역사 내에서 무기한 천막농성에 돌입하며 서울시가 운영하는 서울시 지하철 추락참사에 대하여 서울시가 책임지고 공개사과할 것을 요구하며 강도높은 시위를 진행하였다.

그동안 장애인 단체들은 현재 지하철에 설치되어 있는 장애인 리프트의 잦은 고장과 위험성을 경고하며 안전대책 마련과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것을 요구해왔으나 서울시는 이러한 요구를 묵살해 왔으며, 4호선 오이도 사건으로 장애인 한 명이 죽은 뒤 1년 3개월 만에 똑같은 참사가 나게 방치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이 참사를 장애인의 부주의에 의한 사고라고 책임을 도리어 장애인에게 돌리려 하였다. 그리고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시정의 책임자인 서울시장은 "전임시장 때 발생한 일이니 전임시장을 만나서 요구해야지 왜 나에게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사과를 거부하였다.

아니 이게 세계적인 도시, 서울의 시장에 취임한 시정책임자가 할 말인가? 아니 그 잘난 '인간 이명박'에게 사과하라는 게 아니라 서울시에 책임이 있으니 시정책임자로서 사과하라는 것인데 전임 시장에게 요구하라니? 그러면 시정 책임을 전임자에게 다시 이양하겠다는 말인가?

시장과 담당공무원들의, 장애인의 최소한의 인권마저도 인정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발언에 격분한 장애인들은 시청식당을 점거하기도 하고 급기야 서울시의 공개사과를 촉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2006년 아직 지켜지지 않은 약속

이에 서울시는 단식하는 장애인들을 찾아 보지도 않다가, 인권단체들의 지지성명 발표와 동조 단식 돌입, 온라인 시위 등으로 장애인들을 향한 동조여론이 형성되자 부랴부랴 서울시 홈페이지를 통하여 '장애인 여러분께 드리는 글'의 제목으로 서울시장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그 발표문에는 자기가 잘했다는 이야기만 늘어 놓고, 앞으로 선거공약대로 장애인 콜택시를 도입하겠다는 등의 이야기만 했지, 결코 시정책임자로서 사과는 하지 않았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이동권, 교육권, 그리고 최소 생활권마저 박탈당한 채 처절한 삶을 사는 장애인들의 정당한 요구에 그들의 마음을 달래줄 한마디 따뜻한 사과의 말을 품을 가슴이 정녕 없단 말인가?

그렇게 장애인에게 사과하기가 싫단 말인가? 장애인에게 사과하면 그 권위에 큰 손상이라도 간다고 여기는 것인가? 과연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다. 그를 보면 진짜 '권위주의와 개발독재'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을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항상 내세우는 그에게서 무릎 꿇어 제자의 발을 씻기는 예수의 가르침을 닮으려는 모습은 전혀 볼 수가 없다.

장애인들은 결국 39일간의 단식을 통해, 그나마 2004년까지 모든 지하철역에 리프트가 아닌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이명박 시장에게 받아내었고, 저상버스도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정책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2006년 현재까지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고 있고, 서울시는 46개 역은 기술적으로 설치가 불가능하다고 발표하였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강력한 추진력은 장애인용 승강기를 설치하는 데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는가? 안되면 되게 한다는 '현대건설 신화'의 주역이라고 자처하는 그의 불굴의 추진력은 왜 이리 무능하단 말인가?

올해 들어서도 장애인들은 '활동보조인서비스제도화'를 위하여 서울시청 앞에서 노숙농성을 계속 하고 있으며, 시청 앞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전국장애인교육권연대가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한 데 이어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도 독립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 수갑으로 휠체어를 펜스에 묶고 시위하는 미국 장애인을 체포하는 경찰
ⓒ knowonk.com

극한투쟁으로 일궈낸 미국 '장애인인권법'

이와 같은 장애인들의 극한투쟁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 보건교육복지부가 엄청난 예산의 소요를 예상하고 재활법 504조의 사인을 보류하고 있는데 항거하여, 1977년 4월 쥬디 후만이 이끄는 장애인들이 샌프란시스코 보건교육복지부 사무실을 6층을 점거하고 25일간 점거농성을 펼쳤다.

당국은 전화선을 끊고 음식물 반입과 간병인 접근조차 차단하였지만 욕창, 감염, 탈진 등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은 끝까지 투쟁하여 결국 최초의 장애인 인권법이라 할 수 있는 재활법 504조의 사인을 이끌어 내었다.

1983년 미국 덴버시에서 창립된 '대중교통접근권를 위한 미국장애인협회(ADAPT: American Disabled for Accessible Public Transit)'는 당시 일부 시내버스에만 리프트시설이 되어 있는 것에 항의하며 모든 시내버스에 리프트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며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회사 사무실을 점거, 쇠사슬로 몸과 휠체어를 사무실 가구에 묶고 투쟁했다. 또 승차를 거부하는 시내버스의 운행을 저지하기 위해 휠체어에서 버스 앞 차도로 몸을 던지기도 하였다.

▲ 미국 국회의사당 계단을, 마비된 몸을 끌어서 기어오르는 미국 장애인들
ⓒ ablenews.com
특히 대표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인 미국장애인법(ADA: American with Disabilties Act)이 의회 통과를 앞두고 심의 중이던 1990년 3월 ADAPT 주도 아래 500여 명의 장애인이 미국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ADA법의 통과를 촉구하며 장애인차별 철폐를 외치는 시위를 하였다.

30여명의 휠체어 장애인들이 휠체어에서 몸을 던져 의사당의 정문에 있는 83개의 대리석 계단을 몸을 끌며 기어올라가는 시위를 통하여 헌법이 보장한 시민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박탈 당하고 있는 장애인의 인권 탄압 상황을 전 미국 국민에게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ADAPT는 ADA법 제정으로 대중교통의 접근성이 확보되자 장애인의 독립적인 삶을 위해 꼭 필요한 활동보조인서비스를 제도화하기 위한 운동으로 단체의 사업목적을 수정하고 그 명칭을 'ADAPT(American Disabled for Attendant Programs Today)'로 바꾸었다.

미국에는 현재 펜실베이니아,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3개 주에서만 주예산으로 활동보조인서비스가 지원되고 있는데 ADAPT는 'Nursing Home' 예산의 1/3만 활동장애인서비스 예산으로 재편성하면 장애인이 'Nursing Home'에 있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다면서 'MiCASSA'라는 법안을 연방 의회에 제출하고 있으며, 매년 워싱턴D.C.에서 대규모 랠리를 개최하고 있다.

▲ 랠리에 참가 중인 미국 장애인들
ⓒ disabilitymuseum
이와 같은 미국의 장애인인권운동은 1968년 버클리대학에서 박사과정 학생으로 있던 에드 로버츠가 학교의 장애학생 정책에 반발하며 'Rolling Quads'라는 자조모임을 만들고 최초의 독립생활센터(Independent Living Center)를 버클리대학교에 설립하면서 독립생활운동(Independent Living Movement)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태동하게 되었다.

14세에 소아마비로 전신마비가 된 에드 로버츠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고자 캘리포니아 재활국에 학비지원을 신청하였는데 캘리포니아 재활국은 그의 장애가 너무 심해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대학 진학을 지원해 줄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하지만 에드는 이를 언론에 알리고 재활국의 결정에 맞서 투쟁한 결과 1주일 만에 주정부의 재정지원 허가를 받아내었다. 15년 후 에드는 그가 너무 심한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가 일할 수 없다고 진학지원을 거부했던 바로 그 캘리포니아 재활국의 국장이 되었다.

▲ 에드 로버츠와 쥬디 후만
ⓒ bancroft.berkeley.ed
한국은 미국이 100년 이상에 걸쳐 겪은 산업화 현대화 과정을 불과 30, 40년 만에 경험하였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인권운동도 미국이 30년에 걸쳐 경험한 것을 불과 5년 사이에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미국의 장애인인권운동은 흑인인권운동 및 여성인권운동과 함께 대표적인 시민운동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으며 가장 늦게 출발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성공한 시민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각 대학에 앞다투어 '장애학' 과정이 개설되고 있으며 성공적인 시민운동으로서 장애인인권운동의 가치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서울시장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이제 세계적인 도시, 서울의 시장을 꿈꾸며 선거를 준비하는 분들은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로 장애인 인권문제에 대한 분명하고도, 시대에 걸맞은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와 있다. 그래서 그 선거를 준비하는 분들께 아래와 같이 시대에 걸맞은 의식의 과감한 전환을 요구한다.

첫째, 장애인들의 시위가 왜 갈수록 과격해지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들은 서울시의 잘못된 행정으로 장애인들이 리프트에서 떨어져 죽어가는데도 서울시장은 공개사과 요구를 묵살한다는 것이다.

장애인들은 사탕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인권을 존중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정당한 요구가 무시당하는 것에 더 큰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시장에 당선되는 분은, 전임시장 시절에 이루어진 일이라도 서울시가 잘못한 것에 대해, 그들의 공개사과를 묵살한 것에 대해서, 서울시장으로서 이들 장애인단체를 찾아가서 진실한 마음으로 무릎 꿇고 사과하고 그들의 울분을 달래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기 바란다.

둘째, 이제 우리 경제가 세계 10위권에 왔듯이 우리의 의식 수준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래야 서울도 세계적인 도시가 되는 것이다. 개발을 앞세운 권위주의 따위는 이제 박물관으로 모셔 드리자.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으로 반도체, 조선, 철강, 전자, 자동차 등에서 이제 세계 최고를 넘나들면서 언제까지 복지부분에만 항상 예산 타령만 할 것인가? 그리고 왜 꼭 복지분야만 꼴찌를 면하는데 급급하려 하는가? 복지분야도 세계 최고를 이룰 비전을 왜 못 가지나?

이제 건설 좀 그만해도 된다. 제발 지금 장애인들이 요구하는 것들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우리나라 경제수준이면 당연히 하고도 남을 사항이다. 그러니 제발 다른 분야를 좀 희생해서라도 복지분야에 과감하게 예산을 배정하는 의식 전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셋째, 현재 한국에서 누가 가장 장애인 인권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그를 서울시 장애인복지 담당 책임자로 과감히 기용해야 한다. 여성부 장관은 당연히 여성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왜 장애인정책의 수장은 당연히 장애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지 못하는가?

그렇지 못하는 이유에 바로 한국 장애인 인권의 현주소가 있는 것이다. 한국에도 에드 로버츠나 쥬디 후만 같이 장애학에서 장애인인권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훌륭한 장애인인권 운동가들이 얼마든지 있다.

끝으로, 불편한 몸으로 목숨을 내걸고 단식 투쟁을 하고 지금도 노숙투쟁으로 밤 서리를 맞고 있는 그분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덧붙이는 글 | 김종배 기자는 재활과학박사로 현재 미국피츠버그대학교 재활과학기술학과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척수장애인사이버센터의 신경재생포럼과 보조기구게시판 운영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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