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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동산비 아끼려고 유심히 쳐다본 전봇대 전단지, 여전히 비싼 주거비에 한숨만 나온다.
 부동산비 아끼려고 유심히 쳐다본 전봇대 전단지, 여전히 비싼 주거비에 한숨만 나온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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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기로 결정한 후 가장 먼저 걱정한 것은 학교 등록금과 '살 곳'이었다. 집을 마련하신 지 얼마 안 된 포항의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더불어 매달 대출금 이자를 내시면서도 이제 매달 월세를 내지 않아도 좋다고 하셨던 엄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이젠 내가 '월세'의 세상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매달 빠져나가는 방값 부담은 그 때부터 시작됐다. 내 집이라면, 전세였다면 다달이 그 돈을 아껴 더 맛있는 걸 사 먹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사고 싶은 것을 더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숙식' 아닌 '안정'을 주는 집 필요해

내 첫 서울살이는 당시 강동구 천호동에 살던 이모네 집에서 시작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처음 벗어난 나로서는 아예 모르는 사람이 아닌 이모네 집이 훨씬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새로운 가족 분위기에 적응하기도 어려웠고 TV 하나 내 마음대로 보지 못하는 답답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매 끼니 아침도 챙겨 주시고 편하게 대해 주셨던 이모네 가족껜 지금도 감사한 마음뿐이다. 하지만 사실 당시 난 굉장히 힘들었다.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 탓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게 힘들다는 걸 그 때 온몸으로 절감했다. 가족 아닌 다른 사람과의 동거는 하나부터 열까지 맞출 것들 태산이었다. 대학에 갓 들어온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친척 집에서 산다는 1학년들을 만나면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재수를 위해 포항으로 다시 향하던 날. 참 감사하고 아쉬웠지만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정말 행복했다. 죄송했지만, "다시는 친척 집에 살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고 부모님께서는 내 이야기를 충분히 존중해 주셨다. 2008년의 그 짧은 시간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집'에 대한 또 다른 정의를 만들어 준 시간이었다. '집은 단순히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곳만은 아니구나' 생각했다. 그냥 등 하나 누일 수 있다 해서 다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곳. 나에게 집은 그런 곳이었고 그런 곳이어야 했다.

고시원, 하숙방 그리고 반지하까지

2009년. 나는 다시 대학에 들어갔고 혼자 사는 생활이 시작됐다. 친척 집에는 가지 않겠노라 부모님께 엄포를 놓은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하숙이나 자취방을 알아보자니 또 막막했다. 앞서 말했듯 용돈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30만 원 이상의 월세를 같이 받기엔 우리 집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나 또한 이런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전교생 8000여 명이 넘는 학교에서 뽑는 기숙사생은 약 850명 정도였다. 엄청난 경쟁률에 나는 단방에 떨어졌고 다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안은 무보증금 28만 원짜리 고시원 입성이었다.

1학년 1학기 동안 지냈던 고시원 생활, 처음엔 괜찮았다. 작지만 창문도 있었고 누워 TV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여유는 딱 일 주일뿐. 불만 끄면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하고 좁은 공간에서 난 정말 외로웠다. 부르는 술자리는 다 나갔다. 혼자 밥 먹기 싫었기 때문이다. 4개월 동안 잠을 자고 옷을 갈아 입는 일 외에는 항상 학교와 음식점에서 있었다. 대학 친구들은 내가 사는 고시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기서 사람이 살아?"

그런 고시원살이를 끝내고 1학년 2학기 땐 3인실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고시원, 기숙사를 거쳐 대학 생활 1년여가 지날수록 주거비 부담은 계속 스트레스 요소였다. 고시원과 기숙사 모두 주거비 부담을 줄이고 싶은 욕심에 갔지만 오래 살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2010년. 2학년 땐 하숙을 하게 됐는데 내 생에 가장 비싼 주거비를 줬다. 보증금 100만 원과 방값 40만 원. 방은 고시원의 2배 정도 되는 아주 작은 방이었다. 밥값이 포함된 가격이었지만 40만 원은 하숙비로도 아주 저렴한 편에 속했다. 저렴한 만큼 침대와 문이 한 발자국이면 닿는 작은 규모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1년간 매달 부모님께 용돈과 방값까지 총 80만 원의 돈을 받았다. 매 등록금은 대출을 통해 해결했지만 매달 80만 원을 받기엔 마음이 힘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서 공부한다는 건 부모님께 죄인일 수밖에 없다.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뭐가 그리 서로에게 죄스러웠는지. 난 40만 원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사를 했다. 무조건 방값은 세금을 포함에 30만 원이 넘어서는 안 됐다. 2011년 3학년 시작 무렵, 결국 반지하에 거실과 각각 방을 따로 쓰는 '셰어하우스'를 시작했다.

돈 때문에 시작한 셰어하우스? 스트레스 폭발

 노량진 고시원의 모습. 성인 남성은 몸을 쭉 뻗고 자기도 불편해 보인다.
 노량진 고시원의 모습. 성인 남성은 몸을 쭉 뻗고 자기도 불편해 보인다.
ⓒ 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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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과 분노를 안고 시작한 반지하 생활. 반지하여서 그런지 방값은 매우 쌌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25만 원. 이 정도면 꽤 훌륭한 집이라 생각했다. 반지하를 처음 살아봤지만 빛이 안 들어오는 것 말고는 꽤 참을 만한 수준이었고, 혼자 지내는 것보다 친하진 않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도 안심을 줬다.

그러나 반지하 생활마저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처음 겪어보는 방의 눅눅함에 꽤 당황했다. 침대에 누울 때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이불 덕분에 매일 밤 늪에서 자는 기분이었다. 선풍기를 아무리 돌려도 습기는 가시질 않았고 반지하를 살던 첫 해는 곰팡이 때문에 버린 옷만 5벌이 넘었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장마철이 지나면 한 번씩 도배를 해주시긴 했지만 "이 정도 습기는 모든 집에 있고, 25만 원이면 그래도 괜찮지 않냐"고 거듭 말하셨다.

문제는 습기만이 아니었다. 공유지의 비극은 이곳에서 드러났다. 거실과 부엌의 청소 상태 때문이었다. 옆 방 여자와는 언제부턴가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고 보이지 않는 싸움이 계속됐다. 난데없이 토끼를 데려와서 문을 열고 키우질 않나, 머리를 감고 하수구가 다 막히도록 머리카락을 그냥 두지를 않나. 공동체라는 목적 의식이 없이 돈만 앞선 셰어하우스는 삶의 질을 떨어뜨렸다. 청소를 두 배로 해야 하는 부담감으로 심적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그곳에서 3년을 버텼다. 매년 다닌 이사가 너무 귀찮기도 했고 점차 반지하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한여름에도 전기장판을 틀어 눅눅한 침대 습기를 제거하는 방법도 알게 됐다. 물 먹는 하마 8통을 다 써도 모자랐지만 틈틈이 작은 창문과 현관문까지 열고 환기를 시키는 방법으로 곰팡이로 옷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우스메이트는 몇 번 바뀌었다. 여전히 이상한(?) 사람들만 들어왔다. 하지만 어차피 나도 사는 곳, 내가 다 청소하자는 마음으로 화장실 쓰레기통, 거실 청소, 방 청소까지 하면서 그렇게 3년을 살아왔다.

 지금 살고 있는 원룸. 작은 원룸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원룸. 작은 원룸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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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지상으로, 취업만큼이나 어려운 반지하 탈출

2014년. 지금은 고등학교 친구인 룸메이트와 작은 원룸에서 살고 있다. 부동산 복비가 아까워 매번 발품 팔아서 직접 집을 구했는데 적절한 비용의 방을 찾는 게 너무 어려워 결국 부동산에 의뢰했다. 보증금 500만 원에 40만 원짜리 3층 원룸. 친구랑 둘이 사는 조건에 42만 원으로 살고 있다. 월 21만 원의 방값, 세금 3만 원으로 지금 주거비는 25만 원 정도다. 지난날에 반추해 보면 이상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1인에게 최적화된 원룸에서 친구와 같이 사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옷을 정리하고 널려 있는 화장품들을 간수해야 한다. 머리카락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불편을 줄이려고 새로 책상과 서랍장을 사서 최대한 깔끔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계약기간은 1년. 내년엔 다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언제까지 친구랑 같이 살 수도 없는 노릇. 다음 해부턴 동생과 같이 살아야 할 수도 있어 투룸으로 알아봐야 한다. 적정한 임대료를 위해선 일정의 보증금도 있어야 한다. 대학 졸업할 때가 되니 내 앞으로 된 빚만 3000만 원. 생활비에 등록금도 갚고 보증금도 마련하려면 한 달에 10만 원씩밖에 저축할 수 없는 상황이다.

6년 동안 이사만 5번, 불안보다 먼저 '화'가 났다

그렇게 주거비 부담을 덜고자 서울에 올라온 후 지금까지 6년 동안 다닌 이사만 4번. 처음 계약과 맞지 않아 나온 것까지 치면 5번의 이사를 했다. 짐을 싸고 푸는 건 이제 도가 텄지만 이사 때마다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위로하기도 했지만 역시 성에 차지 않았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지방 학생들은 항상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부모님 집에서 어쩔 수 없이 독립하는 청년들은 언제나 주거비 부담을 안아야 하는 현실, 돈 없으면 안정적인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상이 싫었다.

이 현실이 특이한 상황은 아니다. 지방에서 서울로 공부해 보겠다고, 좋은 인생 살아 보겠다고 올라온 학생들의 서울살이는 6년, 7년 후엔 지금의 내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내가 언급한 1인 청년 주거의 모습은 그들이 매일 부딪힐 생활의 연속이다. 안정적인 삶을 꿈꾸는 국민들이 늘 염원하는 '내 집'. 그러나 정부는 오직 경제 활성화와 부동산 시장 침체를 막기 위한 정책만 쏟아낸다. 부동산 시장 활성화를 내세우며 전세자금대출 등 국민들을 빚쟁이로 모는 대책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주거 문제가 아직도 사고파는 '매매'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보증금 오백만원. 누구에겐 쉽지만 누구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보증금 오백만원. 누구에겐 쉽지만 누구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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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사고파는 물건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잦은 이사와 계약 기간에 대한 불안으로 삶의 질이 떨어지는 상황은 언제쯤 해결될까. 공공 임대주택, 장기임대주택의 공급을 늘리는 등 제3의 대안이 나와야 한다.

또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집값이 주춤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득과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임대료와 집값을 내며 살 수 있는 '임대료 상한선 제도' 등의 도입도 필요해 보인다. 단순히 제도적 차원이 아닌 '집'을 통해 마을과 공동체를 살리는 지자체의 노력도 필요하다. 집을 매물로 보는 관점의 변화가 전제돼야 하는 것이다.

집을 물건이 아닌 인권을 지키는 대상으로 바라보고, 누구나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 지금의 부동산 정책과 주거 정책은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돈이 없으니 불안정하고 불편한 주거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버리고 주거도 보호 받아야 할 '인권'으로 인식해야 한다.

힘들지도, 불안하지도 않은 '진짜' 집에서 살고, 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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