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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피고인 유우성씨는 "저는 간첩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고 항변했다. 그는 '재북화교'란 이유로 간첩 혐의에 사기죄까지 적용당한 처지에 괴롭지만 그럼에도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믿는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서 있는 법정과 재판부를 믿는다고 했다. 다음은 그의 최후 진술 전문이다.

존경하는 판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아버지(유진룡), 어머니(조인하)의 1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북한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경성의학전문학교 의학과에 입학하였고, 2001년경 의학과를 졸업 후 함경북도 회령시 제1인민병원에서 준의사로 2004년 2월경까지 근무하다 북한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과 인권이 없는 사회에서 더 이상의 비전이 없다고 판단되어 2004년 3월경 북한을 떠나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목숨 걸고 자유와 인권, 그리고 저의 미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대한민국을 찾아 왔습니다.

그 후 저는 2007년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하였고 2011년 2월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여 그해 6월 서울시청 복지정책과 (시간제 계약직)공무원으로 채용되어 2013년 1월 10일까지 계약직 공무원으로 근무를 한 유우성이라고 합니다.

1. 탈북동기 및 정착 과정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남들과 똑같이 성장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외국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고 그리고 유난히 사람들을 좋아하여 각종 모임에 많이 참석하고 활동도 많이 했습니다.

의학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병원에서 근무하며 북한의 독재정권에 의해 서민들은 고통 받고 인권이 침해받는 현실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고 북한정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날로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며 의약품이 없어 환자 치료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병원에서 주는 월급은 한 달에 한국 돈으로 2~3만원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병원에서 주는 월급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었으며 따로 장사를 하여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저도 제가 장사꾼인지 아니면 의사인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북한에서 살면서 저는 재북화교로 비교적 중국을 쉽게 드나들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중국 친척을 방문, 외국에서 들여다 본 북한은 그야말로 큰 감옥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고민 끝에 인권과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찾아 4개국을 거쳐 목숨 걸고 오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처음부터 하나하나씩 배우면서 정착했습니다. 탈북자라고 관심을 가지는 분들도 있었고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로부터 도움도 받고 사기도 당하고 힘들게 정착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병원에서 준의사로 근무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어디가도 인정받을 수가 없어 저는 페인트칠, 높은 아파트에 밧줄을 타고 방열재 스티로폼 붙이기 등 건설현장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일은 힘들고 몸은 지쳤지만 내가 일한 것만큼 보수를 받아 갈 수 있어 기뻤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며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영어학원을 등록하여 다시 의대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2년 동안 일하며 공부하며 준비했지만 의대 시험을 통과할 수 없어, 아쉽지만 포기하고 2007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으로 진로를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제일 힘든 건 한국 학생들과 친구가 되고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말투도 다르고 또 다른 친구들 보다 나이도 있어 이것저것 일일이 다 물어 볼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항상 주변분들에게 폐가 된다는 생각이 들어 우울했습니다. 그렇게 1~2년을 다니면서 학교생활에 적응하게 되었고 주변에 한국친구들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동아리 모임도 참석하게 됐는데, 그때 알게 된 모임이 남북청년들 함께 하는 통일한마당 동아리입니다. 그곳에서 탈북자들에게 관심 많은 남한대학생들과 친구도 되고 여러 가지 대학교 정보도 주고받으면서 학교정착생활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직접 피부로 느끼고 경험했던 어려웠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탈북자 후배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대학교 4학년경 남한가톨릭 청년들과 함께 신부님 지도를 받으며 영한우리 동아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임원진으로 활동하며 탈북자 청년들이 한국에 살 때 필요한 부분에 도움을 주고자 각종 봉사활동과 멘토링 프로그램 등을 추진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봉사활동과 모임을 통하여 작성된 회원 명단은 현재 북한에 넘긴 탈북자 신원이라고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되었습니다.

저는 2011년 2월에 연세대학교 졸업하고 2011년 6월경 서울시청 복지정책과 생활보장팀에서 계약직 공무원으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 곳에서 담당한 것은 서울시 수급자 관련보조 업무입니다. 기초 생활수급자 관련 보조업무를 맡은 것이지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업무는 아니었습니다.  기초생활 수급자에는 장애인, 독거노인, 북한이탈주민 등이 포함돼 있긴하지만 북한이탈주민이라고 해서 따로 표시되어 있진 않습니다. 저는 서울시 복지정책과에서 근무하며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듬해 2012년 2월부터 연세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에서 복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북한 이탈주민들에 대한 편견을 저를 통하여 깨고 싶었습니다. 대학원 재학기간, 각종모임에서 자발적으로 총무 등 임원진을 맡았고, 다른 사람들 보다 못한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했습니다. 처음엔 대학원 모임 많은 분들이 과연 탈북자 유우성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한국청년들도 많은데 왜 하필 유우성인지 하는 불만과 의문도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저는 그분들로부터 조금씩 인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주변 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탈북자라고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없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임을 조금이나마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사회복지대학원 선배님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분들도 탈북청년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분들은 어렵게 정착하고 있는 탈북청년학생들에게 소중한 장학금과 옷 신발 등 물품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물품을 전달하기 위하여 모임 동아리 회장으로 명단을 작성하여 전달했을 뿐입니다. 지금도 그 명단에는 신발 사이즈와 옷 사이즈들이 적혀져 있습니다.

저는 정말 순수한 마음에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봉사를 한 것입니다. 그런 저의 마음을 탈북자 신원을 모집하는데 썼다고 하니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언론에서는 계속 탈북자 신원 200여명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소 내용은 정확히 170명이고, 또한 이름 대부분이 중복되고 한국 사람과 중국 유학생 등이 섞여 있으며 순수 탈북자는 74명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74명 중에 이름, 전화번호, 주소, 3가지 다 기재된 사람은 불과 30여명뿐입니다.

공소사실대로라면 저는 2006년 북한 보위부에 포섭되어 2013년까지 7년 동안 공작하여 북한이탈주민 신원을 74명밖에 모집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게을러도 너무나 게으른 공작원입니다. 
또한 공소장에는 제가 2006년 어머님 장례식 갔다 온 이후 다시 북한에 들어가 7일 동안 고문 받아 다리는 절고 얼굴과 입에서는 피 나고 링거까지 맞았다고 나옵니다. 그렇게 7일 동안 얻어맞고 3일 동안 초스피드 간첩 교육받고 남파됐다고 합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정말 초스피드로 3일간 교육을 받으면 간첩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또한 저는 그렇게 머리가 좋고 똑똑하지도 못합니다. 3일 만에 초스피드 간첩 교육받고 7년 동안 북한이탈주민 신원 74명을 모집할 만한 능력이 못됩니다. 

저는 정말 너무 억울하고 억울합니다.

2. 사건내용

저는 2007년경부터 국정원으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국정원, 경찰청, 검찰 수사 거쳐 2010년 7월경 최종적으로 남북한교류협력법위반 혐의를 통보받았습니다. 그때 핸드폰 통화내역 등도 수사를 받았고 2010년 3월경 가택수색도 당했습니다.

저는 그때 수사를 받으며 저의 재북화교 신분 때문에  혹시 중국으로 강제출국 될 것 같아 너무나 두려웠고 무서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정착하고 싶어서 고향을 떠나 4개국을 거쳐 목숨을 걸고, 북한의 학력과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에 왔습니다. 그리고 2010년 당시는 연세대학교 4학년 재학 중이었습니다.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정식 취직하여 저의 작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그때 계속 부모님은 재북화교이고, 저도 재북화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북한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각종 구실을 대면서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당시 수사관님들은 다른 탈북자들 증언에 의하면 북한 국적 신분으로 중국에서 여행통행증 떼고 북한에 갔다 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고, 만약 정말 북한에 갔다 올수 있었다면 북한의 공작원이거나 엄청난 뇌물을 바쳤다고 하던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추궁했습니다. 저는 그때 "제가 북한 국적임에도 북한 어머님 장례식 무사히 갔다 올수 있었던 것은 뇌물을 많이 줬기 때문이"라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재북화교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어머님 장례식 갔다 온 대가로 쌀도 주고, 기름도 주고, 노트북컴퓨터도 줬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어떻게 보냈냐는 질문에는 2006년 가을쯤 택배를 보냈던 기억이 있어 대충 둘러댔던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거짓말은 한국에서 너무나 살고 싶었고 또한 대학교 재학 중에 있어 만약 재북화교인 신분이 들통 나면 대학교도 더 이상 못 다니고 결코 한국에서 못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들어진 거짓말이었습니다. 

부모님들은 의학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님 곁에서 의사를 하면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꿈을 찾아,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제 고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또한 정착하는 과정에 엄마와 전화통화하다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북한 국적과 그 알리바이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말을 증명하기 위하여 중국에 계시는 삼촌에게 미리 전화 연락을 드렸고, 삼촌도 자신의 일 때문에 많이 바빴지만 저의 마음과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제 요구를 들어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국정원에서 보내신 분 만나면 뇌물도 많이 주고 맛있는 밥도 좀 사주시고 꼭 유광일은 북한 국적 있었다고 해달라며 심심당부의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재북화교 신분은 지난 2013년 1월 국정원 체포 당시에도 저를 제일 괴롭혔던 부분입니다. 저는 계속 북한 국적이 있다고 주장을 하다가 수사 10일 만인 2013년 1월 21일경 "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북한 국적은 적극적으로 취득한적 없는 재북화교"라고 시인했습니다.

한국에 가족 한 명 없이 9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다른 분들과 똑같이 가족과 함께 살고 싶어 2012년 10월 30일경 여동생 유가려를 한국에 데려다 공부시켜서 한국에서 좋은 남자 만나 결혼 시켜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2013년 1월 10일 저는 영문도 모른 체 국정원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간첩이 되었습니다. 그 후 8개월 동안 구치소 안에서 저는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조사가 시작되어 얼마 안 되어 서울시 공무원 북한이탈주민 1만 명의 신원이 북한에 넘어갔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 기사가 저에 대한 내용이라고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었습니다. 국정원과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저는 저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여동생과의 대질을 요구했지만 끝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소되고 1심 재판은 강행되었습니다.

1심 재판에서도 저에게 유리한 증거는 제출되지 않았고 중국에서 찍은 사진은 북한에서 찍었다는 증거로 제출되었지만 변호사님들 의하여 중국에서 찍은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여동생도 변호사님들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인신구제청구 재판을 통하여 합신센터에서 풀려 나올 수 있었고 본인의 억울함을 세상에 폭로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민변 변호사님 못 만났다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이 많은 조작된 증거와 사실은 결코 밝혀 내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1년 넘게 재판을 받으며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21세기에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70년대 살고 잇는 것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간첩이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힘도 없고 백도 없고 그냥 지금 이 자리까지 사건의 진실만 추구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번 간첩사건 재판을 받으며 간첩으로 억울하게 살았던 분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죽을 만큼 억울하고 힘들어도 왜 그 당시 진실을 밝히지 못했는지 저의 사건을 통하여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저는 2심 재판을 받고 있지만 간첩사건의 본질과 상관없이 일부 언론에서 저에 대한 왜곡 기사를 내보내고, 저를 헐뜯고 있습니다. 또한 매일 같이 변호사님 사무실과 심지어 제가 살고 있는 동네까지 기사화하여 이상한 사람들이 저희 동네까지 와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숨어서 다녀야만 하고 저에 대한 악플과 기사를 보며 분노하고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합니다.

어떤 지인 분은 저에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진실을 밝혀진다고 해도 수사기관들은 결코 어떤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너에 대하여 꼭 보복할 거라고……. 그래서 그 사람들 원하는 대로 해야만 끝날 거라고 합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재북화교입니다. 북한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재북화교 집안 자식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북한에서 성장하고 남들과 똑같이 된장국, 김치찌개 먹으면서 자랐고 한글을 쓰면서 성장한 저는 중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음식과 생활, 문화 모든 것이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남들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이름조차 잘 모르는 조상님 덕분에 저는 저의 모든 것을 잃고 사기꾼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여기 앉아 계시는 모든 분들 부럽습니다. 선생님들은 좋은 나라 한국에서 태어나 그런 걱정을 해본 적이 없겠지만, 저로서는 제 운명은 왜 이렇게도 험난한고. 힘든지 괴롭습니다.

평범한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것은 저의 소박한 소원인데, 저에게는 히말라야 산보다 더 높고 험난하여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정착한지 어느덧 10년 됩니다.  저의 고향에서 넘어온 친구들은 작은 가족을 이뤘고 아이도 2명 이상 키우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도 꿈을 이루고자 열심히 살았습니다. 낮에는 서울시에서 일하고 밤에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며 하루 24시간 부족하게 살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정착을 잘하고 인정받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 노력과 작은 꿈도 제게는 이루기 힘든 일들입니다.

3. 결론

저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생각하며 가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작년 2013년 1월 10일 수가기관에 체포되어 조사받으면서 만약 수사기관에서 원하는 진술을, 동생처럼 허위로 진술했다면 지금의 상황과 다를 수도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들 때도 있습니다. 여동생은 꿈에도 살고 싶은 한국에서 살 수도 있었고 이 오빠도 억울하지만 얼마간 구치소에서 살고 지금 현재 TV에 출연하고 있는, 간첩이라고 자칭하며 그것도 하나의 업적인 것 마냥 자랑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대단한 사람인척 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저는 한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결코 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첫째 : 어머님은 북한 보위부 놈들 때문에 돌아갔습니다. 북한 보위부는 우리 가족의 원수입니다. 그런 원수 놈들에게 포섭되어 제가 공작원 활동했다는 것은 저와 저의 어머님에 대한 모독이고 저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저의 가족은 북한에서 살면서 많은 괴로움과 갈취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것이 싫어서 저는 북한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둘째 : 저는 정말 순수한 마음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리 모임에서 회장을 하며 탈북청년들과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같이 해왔습니다. 또한 사회복지대학원을 다니면 많은 선배님들로부터 탈북청년후배들을 위한 장학금과 여러 가지 물품 등을 후원 받았습니다. 그렇게 저를 믿고 도와주셨던 분들의 고마운 마음에 거짓으로 보답할 수는 없습니다.

셋째 : 저는 한국에 정착하여 10년 동안 살면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경험해볼 수 없는 좋은 분들과 신앙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가르쳐 주고 저를 10년 동안 보호를 해준 고마운 대한민국 정부입니다.

저는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지는 정확히 분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 대한민국에 결코 해로운 일을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도 모르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의 가족이나 한국에 살고 계시는 북한이탈주민 가족 분들은 다 똑같이  소중합니다. 

저는 그 분들한테 떳떳합니다. 그 분들 단 한 명의 신원도 보낸 적 없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유우성은 간첩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진상을 규명하는데 있어 제 이름이 더렵혀지고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해도, 저는 저의 가족과 여러분들한테 떳떳하게 살 것 입니다.

제 자신한테 숨김이 없고, 비록 모든 것을 잃고 노숙자로 살아갈지언정 누명 안 쓰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대한민국 사랑하고 믿습니다. 또한 제가 서 있는 이 법정과 재판부를 믿습니다. 그 어떤 판결을 내려주셔도 저는 달게 받겠습니다. 꼭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고 제 가족의 누명을 벗겨 주십시오. 장시간 저의 최후변론을 들어주신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신 변호사님과 신부님, 목사님, 교수님 그리고 진실을 널리 알려준 언론계에서 근무하시는 선생님들에게 머리 숙여 깊은 감사 드립니다.


태그:#유우성, #국정원, #증거조작, #검찰,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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