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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3일 목요일 동의보감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념하는 국제학술세미나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렸다. 이날 발표자들 중 나카자와 도시코(中澤俊子)라는 60대 일본인 할머니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도쿄 인근에서 고려박물관(高麗博物館)을 운영하면서 소설 <허준>의 열혈 애독자였던 남편의 유지를 받아 소설 허준을 일본어로 번역출판하신 분이다.

고려박물관은 유물전시보다는 다양한 교육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KBS에서 제작하는 역사 다큐나 드라마를 매주 1-2편씩 같이 보고 토론을 진행한다. 아직까지 역사토론에 자유롭지 못한 일본에서는 과거 그들의 잘못에 대해 외면하기 때문에 젊은 학생들, 교육자 및 언론인들에게 새로운 시각의 역사를 보여주려고 만든 단체라고 한다.

2010년 11월에는 동의보감의 집필 400주년을 맞이하여 "허준 작 <동의보감> 완성 400년 기념 국제포럼"을 나고야에서 개최할 예정이라고 하여 좌중을 숙연하게 하였다.

소설 <허준> 스승을 해부하고, 드라마 <대장금> 외과수술을 하다

1724년 여름 일본의 의관인 源元通에 의해 간행된 동의보감. 9월 1일부터 25일(금)까지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 전시실에서는 <영상과 책으로 만나는 동의보감>이라는 기획전시가 진행 중이다. 고문헌 및 관련 도서, 영상물, 디지털콘텐츠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자료 등 37종 176점이 전시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 일본판 동의보감 1724년 여름 일본의 의관인 源元通에 의해 간행된 동의보감. 9월 1일부터 25일(금)까지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 전시실에서는 <영상과 책으로 만나는 동의보감>이라는 기획전시가 진행 중이다. 고문헌 및 관련 도서, 영상물, 디지털콘텐츠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자료 등 37종 176점이 전시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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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허준이 일본어로 번역출판되고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에서는 동의보감 기획전시를 하고 있는데, 한의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극복해야 할 과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지난 1999년 KBS에서는 "허준 과연 스승을 해부했을까"라는 제목으로 역사스페셜을 방송한 적이 있고 이후 다양한 논의들이 쏟아져 나왔다. 허준이 스승을 해부하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2004년 3월에 종영된 드라마 대장금의 마지막 장면은 대장금이 제왕절개 수술을 집도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이후 서양에서 발전한 현대의학의 괄목할만한 연구와 임상 효과는 대부분 해부학적인 지식에 바탕하고 있다. 외과수술 역시 해부학에 기초하고 있으며 현대의학의 빛나는 결과물 중 하나이다. 허준이 시체 해부를 하지 않았고 한의학에 현대의학적인 제왕절개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과 드라마에서 해부와 외과수술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현대의학의 성과 강조하는 역사기술이 해부학의 신화 만들다

그것은 현대의학의 성과를 위주로 하는 의학사관의 영향 때문이다. 무엇인가 특출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면 남다른 계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남다르다는 것은 해부학적인 지식이 아니고서는 얻기 어려웠을 것이란 통념 때문이다. 즉 전근대적인 전통의학은 해부학적인 지식을 습득하면 근대적인 의학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의학사관인 셈이다.

이러한 논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외세의 침입이 없었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자본주의가 발생하였을 것이고, 과학혁명도 이루어졌을 것이며, 민주주의도 획득했을 것이란 역사적 가설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중세까지 경제적, 과학적, 정치적으로 앞서 있던 동아시아 사회가 유럽사회에 뒤처지게 된 계기가 산업혁명, 과학혁명, 그리고 민주주의 혁명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논의와 마찬가지 구조인 것이다.

한의학에서 외과시술은 침구학의 중요한 부분이다

현대의학에서 해부학적 지식과 외과수술의 성과가 강조되면서 자연스럽게 한의학에는 해부학적인 지식이 없었고 외과수술이 없었다는 통념이 생겼다. 예외적으로 소설과 드라마에서는 다른 한의사들과 달리 허준과 대장금이 해부학적 지식을 습득하였고, 수술까지 시행한 것으로 그리면서 한의학을 뛰어넘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그렇다면 한의학에서 해부학적 지식과 외과수술의 분야는 실제로 어떠했을까?

동아시아 지역은 인류의 문명이 오래 되었고,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늘 전쟁과 싸움이 많았고 인구의 대다수는 몸 쓰는 일을 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외상이 많았던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에 대한 다양한 처치법이 존재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의서는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으로 13세기 초 고려시대에 집필된 것이다. 이 책에는 칼에 찔린 상처를 치료하는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배가 파열되어 장이 튀어나온 경우에는 보리 끓인 물로 깨끗이 씻어낸 후 뽕나무 껍질에서 실을 뽑아 꿰매주라고 하였으며, 지혈을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지혈시킬 수 있는 한약재를 으깨거나 가루내어 상처 부위에 붙여 놓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동의보감>에도 소개되고 있다. 임진왜란 중에는 허준과 같이 함경도 일대까지 선조와 광해군을 수행하여 공신이 된 이공기가 명나라 장수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 외에도 골절상에 뼈를 맞추고 상처를 소독한 후 약을 바르고 부목을 대어 묶어주는 치료법, 암이나 궤양, 종기 등이 생겨 환부를 칼과 비슷한 침을 사용해서 째고 나쁜 기운을 제거하는 방법 등 다양한 외과적 처치들이 각종 한의학 서적마다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에 의해 한의사들은 '의생'으로 신분이 격하되다

서양의학이 전래된 이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한의학의 외과시술은 크게 쇠퇴하였다. 첫번째는 한의사들 스스로가 한약을 위주로 하는 내과 시술을 더 우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유학자들이 의학을 하게 되면서 의학이론 위주의 연구가 한의학의 본질을 파악하는 경향이 생기면서 외과시술 쪽도 천시된 것으로 생각된다.

두번째는 일제 시대에 학문적으로 기술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1913년 일제에 의해 양의사들은 '의사(醫師)'라고 하여 의사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게 한 반면, 한의사는 한 단계 격하된 '의생(醫生)'이라 하여 의학을 배우는 학생, 또는 기술자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한의들은 대학이 아니라 사설학원에서 의생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최신 의학지견을 섭렵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고, 단지 가느다란 침과 한약만을 쓰는 기술자 교육, 식민지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주변 학문과 교류하면서 발전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강제로 대학 교육에서 제외되고 의생 신분으로 격하된 일제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한의학은 주변 학문과 소통이 단절된 경우가 많았다. 역사에 가정이란 것은 없지만, 만약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제도권에서 축출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일부 한의사들은 스스로 경쟁력을 찾기 위해 보다 정교하고 강력한 외과시술을 배워왔을 것이고 한의학의 외과시술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침의는 전문의가 아니라 외과시술을 맡은 하급관리였다

한의학보다 중국의학에 더 관대했던 미끼 사까에조차 중국의 유명한 외과의사였던 설기(薛己)나 진실공(陳實功)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탁월하다고 평가한 16세기 조선의 외과학 전문 의서. 
쐐기표시의 모양과 방향을 이용하여 칼로 환부를 째는 방향을 표시한 그림이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제공
▲ 임언국(任彦國)의 <치종지남(治腫指南)> 한의학보다 중국의학에 더 관대했던 미끼 사까에조차 중국의 유명한 외과의사였던 설기(薛己)나 진실공(陳實功)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탁월하다고 평가한 16세기 조선의 외과학 전문 의서. 쐐기표시의 모양과 방향을 이용하여 칼로 환부를 째는 방향을 표시한 그림이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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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느 비전문가 모임에서 <침구경험방>이란 책을 쓴 허임은 조선시대 '침의(鍼醫)'로서 지금의 침구사였고, <동의보감>을 쓴 허준은 '약의(藥醫)'로서 현재의 한의사를 지칭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약의라는 것은 침 뿐 아니라 약도 쓸 수 있는 의사에 가까운 개념이고, 침의라는 것은 다양한 도구를 이용하여 외과시술을 맡았던 한단계 낮은 관직의 의관을 말한다.

최근 조선시대 내의원에 대한 몇몇 논문이 발표되면서 복잡한 내의원 운영에 대한 사실이 많이 밝혀졌다. 조선시대 내의원(內醫院)은 본청(本廳), 침의청(鍼醫廳), 의약동참청(議藥同參廳)이라는 세 개 기관으로 구성되었다. 내의원 본청이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내의원을 말하며, 이곳에 근무하는 의관을 내의라고 한다. 이 내의들은 반드시 의과(醫科)에 급제하여야만 임명받을 수 있는 고위직 관료였다. 반면 침의청에는 침의들이 근무하였는데 <동의보감> 침구편에 소개되어 있는 것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침을 사용하여 외과시술을 담당했던 의관이었다.

궐 안에서 내의원에 소속된 것은 침의청이었고, 궐 밖 전의감에 소속된 것은 치종청(治腫廳)이었는데 둘다 비슷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근무한 의사들은 의과에 합격한 사람도 있고, 추천에 의해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의약동참청이라는 것은 약을 쓸 때 함께 토론하기 위한 사람들로서 양반으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의학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필요에 따라 소집하여 의논하기 위해 만든 임시기구였다.

의과에 합격한 의사들만이 내의로 근무하다

결과적으로 내의원 본청은 상급 관청이었고, 침의청은 하급 관청, 그리고 의약동참청은 임시 관청인 셈이다. 의과에 합격한 초기 의관들과 추천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침의청에 근무할 수 있었다. 그 중 의과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은 내의원 본청으로 승진해서 근무할 수 없었고 의과에 합격한 사람들만 승진하여 본청에 근무할 수 있었다. 즉 내의원 본청에 근무하는 의관들은 침 뿐 아니라 약까지도 쓸 수 있는 고위직 의관이었던 것이다.

흔히들 '침은 가는 호침'이라던가 '침의는 침구 전문의, 침구사', '침의는 약의 또는 의원과 다른 직군'이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일제시대 이후 만들어진 한의학에 대한 왜곡된 정보들이다. 침의는 외과시술을 담당했던 내의원 하급 관리들을 말할 뿐이다. 조선시대에 침과 뜸, 약은 분리된 적이 없다. 또 침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가는 바늘처럼 생긴 호침만을 침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지금의 외과수술 도구와 같이 생긴 다양한 침이 존재하였고, 침의라고 하는 사람들의 영역이 바로 외과시술 분야였다.

대한제국, 한의와 양의를 모두 의사로 선포하다

나카자와 도시코(中澤俊子)와 고려박물관(高麗博物館) 관계자들이 출판한 일본판 소설<허준>의 표지. 현재 일본 내 주요 방송과 출판사들은 한국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외면하고 있다. 이 일본판 소설 <허준>도 기존의 일본 내 출판사들이 외면하여 자체적으로 출판사를 만들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사진제공 : 동의보감 발간400주년 기념사업단
▲ 일본판 소설 <허준> 표지 나카자와 도시코(中澤俊子)와 고려박물관(高麗博物館) 관계자들이 출판한 일본판 소설<허준>의 표지. 현재 일본 내 주요 방송과 출판사들은 한국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외면하고 있다. 이 일본판 소설 <허준>도 기존의 일본 내 출판사들이 외면하여 자체적으로 출판사를 만들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사진제공 : 동의보감 발간400주년 기념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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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영향력이 강하던 때인 1900년 1월 4일 의사규칙(醫士規則)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 의사규칙 1조와 2조에는 의사의 범주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중 1조에서는 '의학(醫學)을 배워 약과 침뜸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2조에서는 '의과대학이나 약학과를 졸업한 후 내부시험을 통과한 사람들'만을 의사라고 하였다. 즉 1조에서는 한의를, 2조에서는 양의를 말하였고, 한의와 양의 모두를 의사라고 지칭하였다. 뿐 아니라 국가에서 운영하는 내부병원(광제원)에 서의들을 감원하고 한의를 증원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안타깝게도 1905년 일사늑약 이후 일본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내부병원의 모든 한의 인력들은 축출당하고 일본인 양의사들이 장악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의 변화는 지난 번 연재에서 언급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한의들은 1913년 의생규칙(醫生規則)에 의해 의사(醫師)가 아닌 의생(醫生)이 되었으니, 졸지에 주권을 빼앗긴 조선의 운명이나 한의들의 운명은 같은 처지였던 셈이다.

이후 일제는 일본인들의 의료시술은 서구에서 들여온 양의학으로 하되, 식민지 사람들의 의료시술은 자신들 관점에 따라 낙후된 한의학에 맡기는 정책을 펴게 된다. 이것이 의생제도가 생기게 된 이유지만 해방 후 한의사제도 부활의 밑거름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일본은 1895년 전통의사를 제도권에서 완전히 말살하였기 때문에 양방의사들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인 침만 놓는 침사, 뜸만 뜨는 구사, 안마만 하는 안마사, 약만 지어주는 한약업사 등 권한을 축소시킨 유사의료업자들에 대한 제도를 시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후 한의사제도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대한제국 의사규칙 제1조처럼 한의사들의 업무범위를 되돌려놓아 민족정기를 되살리려 하였고, 이에 따라 유사의료업자에 대한 제도들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한의과대학에서 현대의학의 해부학적 지식 뿐 아니라 생리학, 병리학 등 주요한 기초의학을 강의한지 30여 년, 다양한 학문분야와의 교류가 시작된지 20여 년, 국가의 지원을 받고 연구룰 시작한지 10여 년이 흘렀다. 앞으로 외과시술이나 전염병 분야처럼 현대의학의 장점을 충분히 배우고 교류하여 우수한 연구성과와 임상결과물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09년 8월 고 장준하 선생님의 思想界 복간준비호에 본인의 이름으로 기고한 "한의학의 왜곡과 위기"라는 글의 일부을 부분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태그:#의학사, #수술, #해부학, #침구사, #과학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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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의사학교실 (주)민족의학신문사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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