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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상판나 대교 아래 란창강이 흐른다. 란찬강은 흘러 메콩강이 되어 라오스, 베트남, 타이로 흐른다.
ⓒ 최성수
징홍(景洪)은 운남성의 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다. 도시 전체를 돌아보는데 한 나절도 채 걸리지 않을 만큼 조그만 곳이지만, 나는 징홍을 떠올리면 아득해진다. 터벅터벅 걷던 야자수 가로수길이며, 길 가로 늘어선 허름한 가게들, 한낮이면 제법 덥다가도 해만 지면 상쾌하게 서늘해지는 겨울 날씨하며, 무엇보다도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란창지앙(瀾滄江)의 넉넉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징홍은 편안하고 느긋한 도시다.

징홍에는 나무야가 있다

늦은 오후, 징홍의 게스트하우스 나무야(納木呀)에 도착한다. 나무야는 징홍에 있는 한국 음식점이면서 게스트 하우스이기도 하다. 하루 20원의 싼 비용으로 묵을 수 있지만, '나무야'에서의 잠은 더없이 편안하다.

4-5인 1실에, 그저 침대만 덩그마니 놓여있는 방은 어떤 호텔보다도 깊은 잠이 들게 만든다. 복잡하게 꾸며진 방이 오히려 잠을 방해한다는 것을, 나는 '나무야'에서 사흘 묵으며 깨달았다. 상쾌하고 시원한 밤공기와 창가를 일렁이는 야자수 그늘이 잠을 재촉하는 '나무야'에서는 꿈도 없이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다.

'나무야'는 한국인 나선영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만징란루(曼景蘭路)의 과일 도매시장 바로 앞에 있는 이곳에서는 한국 음식까지 먹을 수 있으니, 오랜 여행에 지친 여행자에게는 가장 좋은 휴식 공간인 셈이다.

나는 사흘을 묵은 '나무야'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먹으며 그동안 못 먹은 한국 음식에 대한 갈증을 삭힐 수 있었다. 중국의 느끼한 음식에 질려하던 늦둥이에게는 '나무야'의 음식이 피로 회복제 같은 것이 되기도 했다. 녀석은 지금도 여행 이야기를 하면 '나무야'를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다.

▲ 징홍 유일의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 나무야. 편한 잠과 맛있는 한국 음식을 맛보여 여행의 피로를 달랠 수 있다.
ⓒ 최성수
밤이면 숙소 근처 술집을 찾아 늦도록 술을 마셨다. 야자수 가로수 그늘 아래에서 란창강에서 잡은 생선 구이를 시켜놓고 마시는 맥주는 시원하고 달았다. 어느 날 밤에는 술집 주인과 친구가 되어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기도 했다.

우리가 진도 아리랑을 부르자 그 노래를 듣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 그는 우리에게 술을 권했다. 그리곤 웃통을 벗어젖히고 자기도 한 자락 노래를 불러 화답했다. 어머니는 소수민족이고, 아버지는 한족이라서 자기는 한족이라고 설명하던 그의 둥근 얼굴과 불쑥 나온 배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나무야'의 한국 음식으로 해장을 한다. 그때쯤이면 햇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스적스적 걸어 길 건너편 과일 시장으로 가면 온갖 과일이 지천이다. 두리안도 있고, 망고스틴도 있다.

전에 쿤밍에서 먹어본 맛없는 과일 계란과와 인생과, 유자도 있고, 야자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과일이 그들먹하다. 그 중 나는 귤을 가장 즐겨 먹었다. 얼멍덜멍한 것이 꼭 한라봉의 변종 같은데, 달고 시원하기가 그만이다. 낑깡처럼 조그만 귤도 상큼해서 자주 먹었다. 징홍 하면 과일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나무야' 앞에 있던 그 과일 도매 시장 때문일 것이다.

외삼촌의 뒤를 잇는 지누어족 마을에 가다

란창강을 따라 야자수 길을 지난다. 차가 지날 때마다 자욱하게 먼지가 인다. 포장된 도로이지만 중앙선도 없다. 오른쪽으로 아득하게 이어지는 란창강이 누런 물빛으로 흐르고 있다. 잘못하면 그냥 저 물 속으로 굴러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 같은 길을 버스는 속도를 늦출 생각도 없이 마구 달린다.

▲ 지우너 족 마을 풍경. 돼지가 길가에서 자는 마을, 지우너 족은 외삼촌의 뒤를 잇는다는 뜻이다.
ⓒ 최성수
아름드리 야자나무 가로수들이 휙휙 스쳐 지나간다. 야자 기름을 짜는 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한자로는 유종수(油棕樹)라고 부른단다. 때로는 고무나무가 숲을 이룬 곳도 있다. 길 군데군데 온갖 과일을 늘어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다. 역시 남방이라 과일이 풍부하다. 그 중 한 곳에 들러 여러 가지 과일 맛을 본다. 야자, 구아바, 귤 따위를 먹으며 행복감에 젖는 것은, 과일 값이 너무도 싸기 때문이다.

다시 달리던 버스가 한적한 시골 마을에 멎는다. 지누어족(基諾族) 마을이다. 지누어족은 모계사회다. 지누어라는 이름도 외삼촌의 뒤를 잇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외삼촌의 뒤를 잇는다는 것은 곧 모계사회의 풍속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인구는 약 2만 명 정도이며, 주요 거주지는 이곳 지누어샨(基諾山) 일대다. 청나라 때는 이 지누어산을 요우러샨(攸樂山)이라고 불렀는데, 그래서 이곳을 '유락차산(攸樂茶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유락은 산을 뜻하고, 그 산에서 차가 많이 생산되어 다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리라.

그 말대로 지누어족은 찻잎을 수확해서 상품으로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비교적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차를 소중히 여기는 풍습은 그들의 민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임산부는 찻잎을 볶아 말리는 방에서만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풍습은 그들이 생명의 탄생처럼 차를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누어족의 건국 신화는 홍수 설화의 유형에 속한다. 어느 해, 세상에 홍수가 나 온통 물바다로 변해버렸다. 홍수가 멈추고 난 뒤, 커다란 나무 북이 물 위에 둥둥 떠있었다. 그 북 속에서 두 아이가 걸어 나왔다. 세상에 남은 단 두 명뿐인 그 아이들은 마헤이와 마뉴라는 남매였다. 세상에는 둘 뿐이 없었지만, 남매간이라 결혼을 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오래 흘렀다. 남매도 나이가 들어 흰 머리가 가득했다. 이러다가는 세상에 사람의 씨가 마르게 생겼다. 마헤이는 어느 날 동생에게 인간의 손을 잇기 위해 결혼을 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마뉴는 집 근처의 신령 나무가 허락하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뉴가 신령 나무에게 가 결혼을 해도 좋은 지 물었다. 그때 다른 길로 먼저 신령 나무 뒤에 가 숨은 마헤이가 목소리를 꾸며, 인간의 뒤를 잇기 위해 둘이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남매는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나이가 워낙 많이 들어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사는 마을에 커다란 조롱박 넝쿨이 있었다. 어찌나 무성한지, 마을 전체를 조롱박으로 뒤덮을 정도였다. 그런데 열매는 웬일인지 모두 조금 자라다가 썪어 버렸다. 그 중 한 개만이 크고 실하게 자랐다.

어느 날, 부부가 일을 하고 돌아오니 박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여기는 너무 답답해. 어서 나갔으면 좋겠어."

그런 소리들이 박 속에서 흘러나왔다. 부부는 얼른 장작불로 박을 지지려 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아이들이 다칠까봐 망설였다. 그때 박 속에서 웬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내 배꼽을 지지게. 나는 죽어도 좋지만 아이들은 살려야 하네."

그 말을 들은 박 속의 아이들이 기뻐하며 말했다.

"아삐어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을게요."

그 할머니의 이름이 어어였다. 아삐는 지누어족 말로 할머니라는 뜻이니, 아삐어어는 어어 할머니라는 말이다. 부부가 박을 지지자 제일 먼저 아핀이라는 아이가 튀어나왔다.

아핀은 박에서 튀어 나오다가 지진 자리에 피부가 데어 가맣게 변해버렸다. 그 아이가 유락산 자락의 소맹 지방에 사는 쿵꺼족의 시조가 되었다. 쿵꺼족의 피부가 까만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두 번째로 튀어나온 아이는 한족이었다. 그는 박에서 나오자마자 사방으로 마구 돌아다녔다. 그래서 지금 중국의 가장 넓은 땅을 한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세 번째는 따이족(태족) 아이가 나왔다. 그는 나오자마자 파초 숲속으로 들어 가버렸다. 햇빛을 피해 파초 숲에 있었기 때문에 피부가 검게 타지 않고 하얗게 되었는데, 따이족 사람들의 피부가 하얀 것은 그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온 아이는 지누어족이었다. '지'는 박이라는 뜻이고, '지누어'는 박에서 제일 마지막에 나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먼저 나온 아이들이 다른 곳을 다 차지해버리자 지누어 아이는 결국 마헤이, 마뉴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 아이가 바로 지누어족의 대를 잇게 되었다. 지누어 사람들은 지금도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조금 덜어놓고 "아삐어어, 어서 오세요"라고 하는데, 자신들을 태어나게 해 준 아삐 할머니에 대한 존경을 이렇게 지켜가고 있다고 한다.

지우너족의 탄생 설화인 이 이야기는 그들의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삶의 자세를 담고 있다. 그 설화 속의 인물들이 사는 지누어촌은 이야기대로 소박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작은 언덕을 올라가자 집들이 올망졸망 이어져 있다.

집은 전형적인 남방 형식이다. 나무 기둥을 높게 올려 이 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그냥 널찍한 공간이다. 경운기나 오토바이를 넣어두고, 여러 물건들을 쌓아두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층에 사는데, 아마도 습기와 온갖 해충들을 피하기 위한 주택 구조일 것이다.

▲ 열대 식물원의 그늘 큰 나무
ⓒ 최성수
길에는 돼지들이 올망졸망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다.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피할 기미가 없다. 동물과 사람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마을이다. 이 층의 베란다 같은 곳에서 한 할머니가 부지런히 일손을 놀리고 있다. 차를 팔아 상업적 성공을 이룬 부족이라지만, 그러나 생활은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는 모두 56개의 소수 민족이 있다. 그 상당수가 운남성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지우너족도 그 중의 하나다. 소수민족의 정책이 어떻고, 대우가 어떻고 하며 온갖 이야기가 세상을 떠돌지만, 이렇게 지우너족처럼 산자락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소수민족에 속하든 아니면 인구수가 워낙 적어 소수민족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든, 그들은 그저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리라. 인간이 만들어 스스로에게 굴레를 씌우며 아등바등하는 세상의 온갖 제도란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도 자체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우너족 마을을 돌아보며 문득 든다.

마을 위로 올라가려 하는데, 갑자기 커다란 개가 길을 딱 가로막고 으르렁거린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물 태세다. 마을 사람이 나오더니, 사람을 무는 개란다. 겁이 나 더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내려온다. 하릴없는 걸음으로 마을 건너편을 향해 출렁다리를 건너본다.

작은 개울에는 지우너족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고기를 잡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해 보이는 저 아이들도 자라면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울까?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헛헛한 기운이 온 몸으로 퍼져 오른다.

열대 식물원에서 남국의 풍정에 취하다

징홍의 열대 식물원의 원래 명칭은 중국과학원 시상판나 열대식물원이다. 식물원은 징홍에서 96키로 미터 떨어진 멍룬(勐侖)에 자리 잡고 있다. 900헥타아르의 방대한 면적에 온갖 열대 식물들을 가꾸고 있는데, 그 종류가 약 3천여 종이 넘는다고 한다.

▲ 징홍 시내의 길거리. 야자수가 싱그럽다.
ⓒ 최성수
1959년 식물학자 카이시타오(蔡希陶) 가 중심이 되어 만들었는데, 모두 11개의 테마 식물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족식물원, 수생식물원, 약용식물원 등이다. 식물원 내부는 깔금하기 이를 데 없다. 휴지조각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온갖 식물들이 잘 보전되어 있어 돌아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해 진다. 다 돌아보는데 여섯 시간은 족히 걸린다는데, 그저 주마간산 격으로 일부만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 한 곳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이 든다.

처음 보는 나무와 꽃에 이름조차 다 기억할 수 없는 식물들이 가득하다. 식물 아래에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처음에는 이름을 외우려고 애를 썼지만 나중에는 그 노력조차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너무 많은 나무와 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그 나무와 꽃은 늘 거기에 있을 테니 말이다.

▲ 징홍 열대 식물원의 꽃들. 마지막 아가씨는 라후족 안내원. 한국어를 열심히 받아적은 아가씨도 꽃같았다.
ⓒ 최성수
야자수를 감고 올라가 결국은 야자수를 죽게 만드는 용수(벵골 보리수, 앙코르와트 사원의 스펑나무)와 3~5㎏의 무게는 너끈히 견딜 수 있다는 왕련(王蓮), 호수 가운데 심은 나무 위를 마구 뛰어다니는 원숭이, 술병을 닮아 이름 붙었다는 술병나무는 지금도 식물원 생각을 하면 눈에 선하다. 그 넉넉한 바람과 햇살 속에 나도 한 그루 열대 식물처럼 겨울 어느 날의 하루를 온 몸 벌거벗고 서 있고 싶다.

다이족 마을 간란바(橄欖坝)에서 즐거운 물놀이

간란바는 다이족(傣族) 전통 마을로 징홍에서 약 28㎞ 정도 떨어진 멍한젠(勐罕鎭)에 자리 잡고 있다. 약 64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란창지앙의 한 굽이에 감람나무처럼 푸른빛을 늘 간직한 곳이라고 해서 간란바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예전 석가모니가 이곳을 방문해 설법을 했는데, 그때 바닥에 천을 깔고 석가를 지나가게 한 다음 그 천을 다시 말았다고 해서 한(罕)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한은 그물을 뜻하는데, 그물을 걷어 만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 글자다.

간란바에서는 다이족의 전통 공연이 눈길을 끈다. 대극장 널찍한 무대에 백 명 가까운 다이족 아가씨들이 나와 화려한 의상을 입고 민속춤을 춘다. 처음 운남을 찾았을 때, 쿤밍 소수민족촌 다이족 마을에서 다이 민속공연을 보고 나는 다이족 아가씨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이곳 다이족 아가씨들도 마찬가지다.

다이족의 아가씨들은 서양 바비 인형식의 미적 기준으로는 잴 수 없는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작은 체구에 날씬한 몸매, 좁고 작은 골반, 화려한 색깔의 옷이 다이 아가씨들의 특징이다. 그 아름다움은 결코 풍만함이 아니다. 가녀리고 작은 것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어쩌면 서양의 미적 기준에 눈 멀어버린 우리가 예전에 간직하고 있던 '그리운 아름다움'을 다이족 아가씨들은 지금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멍파라나시 공연.
ⓒ 최성수
그 다이족 아가씨들이 나와 소박하면서도 단순한 민속춤을 춘다. 우산을 돌리기도 하고, 단순한 손동작과 발동작을 반복하면서 추는 춤은 그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정감이 간다.

민속 공연이 끝난 뒤, 마을 광장에 해당하는 분수대에서는 포수웨이지에(潑水節) 행사가 재연된다. 다이족 전통 복장을 입은 사람들과 미리 옷을 빌려입은 관광객들이 분수대 곁 물 속에 들어가 시작을 기다린다.

시작 신호와 함께 사람들은 바가지에 물을 퍼 주변 사람에게 마구 뿌려댄다. 구경하던 사람들에게도 물세례는 여지없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이 불구경과 물장난이라는데, 발수제의 물장난은 그런 장난 중에서도 압권으로 보인다. 구경꾼과 마을 사람들이 물이라는 매개물로 하나가 되는 천진난만, 그것이 발수제의 진수였다.

▲ 감람바의 다이족 마을 풍경
ⓒ 최성수
발수제는 원래 다이족의 설날인 음력 4월 13일을 전후해 열리는 축제다. 이날이 되면 사람들은 불상을 물로 깨끗이 씻고, 집에는 온갖 종이 공예로 치장을 한다. 아이들은 대나무로 호스를 만들어 물 뿌릴 준비를 한다. 축제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이웃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이게도 물을 퍼붓는데, 심지어 트럭을 타고 지나다니면서 물세례를 주기도 한단다.

물은 행운을 상징하고, 온갖 악을 씻어내는 상징이다. 물을 뿌리는 행위는 곧 악을 씻고 복을 비는 주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복을 비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발수의 축제는 이곳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에서 자리 잡을 조건이 충분하다. 늘 더운 땅, 그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4월 무렵이면 물에 몸을 적시는 것 자체가 즐거움일 테니까 말이다.

시작 소리와 함께 분수대 물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마구 물을 뿌린다. 물은 관객석인 우리 자리까지 마구 퍼부어진다. 혹여 카메라가 젖을까봐 몸을 피하며 나는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빼앗겨 정작 즐겨야 할 것을 외면하는 국외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심과 질시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물의 축제, 그 아름다운 공동의 놀이, 그것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신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태국의 송크란 축제가 이곳 운남에서 시작해 내려갔다는데, 나는 그 물 축제에 참여하지는 못하고, 그저 물 축제의 이동 길을 따라 저 란창지앙을 따라 태국까지 흘러보고 싶다는 엉뚱한 꿈에 젖어 있었다.

멍파라나시, 징홍의 옛 땅에서

징홍(景洪)의 옛 이름이 멍파라나시(勐巴拉娜西)다. 멍파라나시는 이상향을 뜻하는 다이족 말이라고 한다. 샹그리라나 무릉도원 혹은 유토피아와 같은 말인 셈이다.

이름대로 징홍에서는 멍파라나시라는 다이족 공연이 열린다. 제법 번듯한 극장에, 온갖 화려함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나와 다이족의 민속 공연을 한다. 공연 전에는 극장 앞 광장에서 손님을 끄는 맛보기 공연도 한다.

멍파라나시 공연은 원색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드러난 춤으로 가득하다. 나무와 꽃과 짐승들로 분장한 배우들이 사람 역할을 한 배우들과 어울려 춤추고 노래한다. 식물 동물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들과 함께 삶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타이족 사람들의 품성을 공연을 통해 엿볼 수 있다.

▲ 감람바의 다이족 공연. 수수하고 소박한 공연이다.
ⓒ 최성수
그러나 공연 일부는 마치 서양의 쇼를 보는 것처럼 전통 공연에서 동떨어져 있기도 하고, 유행가 가수가 나와 노래하는 부분도 눈에 거슬린다. 알고 보니 이 공연의 출연자들은 대개가 한족 전문 배우란다.

다이족 공연을 하는 한족 배우들이라니! 소수민족의 전통마저 다 념겨 버리고 오히려 구경꾼이 되어버린 다이족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해 공연의 뒤끝이 개운치 않다. 이상향이라는 멍파라나시는 어쩌면 다이족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징홍은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출발지이다. 차마고도는 징홍과 사천에서 출발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티벳, 네팔과 인도로 이어지는 오래된 무역로다. 또 다른 실크로드인 셈이다. 길이는 약 5000㎞, 사천에서 라사까지만도 2000㎞가 넘는 아득한 길이다. 그 사이 해발 5000m가 넘은 험한 산과 노도와 같은 강물이 굽이치고, 한 발 잘못 디디면 그대로 자취조차 찾을 길 없는 절벽길이 셀 수 없을 정도다. 그 길을 따라 말에 짐을 싣고 사람들은 이방의 땅으로 무역을 떠났다.

중국에서 티벳으로 떠난 사람들의 말에 실려 있는 물건들은 차와 소금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싣고 돌아온 물건은 모피나 약재 따위였다. 이 길고도 험한 길을 걸어 그들은 히말라야가 가로막고 있던 양쪽 지역의 물건뿐만 아니라 문화까지도 전달했다. 인도나 네팔의 불교가 이 길을 통해 전파되었고, 티벳의 불교가 운남 쪽으로 퍼져나갔다.

티벳은 해발 3000m가 넘는 고원지대라 육식을 주로 할 뿐, 야채를 구할 수 없는 땅이었다. 그래서 티벳 사람들은 비타민을 비롯한 야채에서 얻을 수 있는 영양분을 운남 지역에서 생산된 차에서 구하게 되었다. 차 잎을 끓인 물에 버터와 소금을 넣어 만든 수유차는 티벳 사람들의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당나라 문성공주가 토번(티벳)의 송쓰엔감포(松贊干布)에게 시집와 전파시킨 차라고 한다.

▲ 발수제의 신나는 모습. 나도 저 물보라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 최성수
운남은 사철 봄 같은 날씨에 강우량과 일조량이 풍부하여 차를 생산하기에 최적지다. 특히 징홍을 비롯한 시상판나(西双版納) 지역이 그런 곳이었다. 운남은 차뿐만 아니라 소금 또한 풍부한 곳이다. 옌징(鹽井)은 질 좋은 소금의 산지다. 지각 변동으로 바다가 산악지형으로 바뀐 곳이기 때문에 소금이 풍부하게 생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차와 소금을 말에 싣고 사람들은 험한 길을 걸어 생존의 싸움에 나섰고, 그들이 다닌 산 속의 좁은 길이 히말라야 동서의 문화 통로를 이루었다. 얼마나 험하고 좁은 길이었는지, 산속으로 난 그 길을 사람이 다닐 수 없는 새와 쥐의 길(鳥路鼠路)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징홍을 비롯한 운남 남부에서 생산된 차 잎으로 발효시켜 만든 차가 바로 푸얼차(普洱茶)다. 오래 묵을수록 좋다는 이 푸얼차와 소금을 싣고 장사치는 말을 몰아 산 너머로 떠났으리라.

그 사람들을 마방(馬帮)이라고 부른다. 말방울을 울리며 천길 낭떠러지를 걸어 낯선 땅으로 떠났던 그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그 출발지인 징홍에서 자꾸 아득해진다. 그들 마음의 일부나마 내가 느껴볼 수 있는 것은 내가 여행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 란창지앙 가에 나가 술을 마신다. 어둠 속으로 란창지앙은 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 저 란창지앙은 차마고도의 옛 길에서 흘러내려와 이곳 징홍을 감돌고, 마침내는 흐르고 흘러 라오스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름도 메콩으로 바뀐다. 라오스, 베트남, 타이 등 동남아 여러 나라를 흐르며 그들 삶의 젖줄이 되는 것이다. 배를 타고, 란창지앙이 메콩으로 바뀌는 그 길을 따라가고 싶다.

세상에 가고 싶은 곳을 다 가볼 수 있는 여행자는 없다. 여행은 갈 수 있는 일부를 가보는 것뿐이다. 그러나 꿈꿀 수 있기 때문에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리라. 징홍은 푸르른 땅이지만, 도시 전체는 온통 먼지로 가득 차 있다. 아마 그 먼지는 아득한 세월 저편, 징홍이 멍파라나시였던 그 옛날로부터 날아오는 것은 아닐까?

나는 징홍의 한가한 거리를 걸으며, 켜켜이 먼지 내려앉는 길모퉁이 카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란창지앙에 매어둔 배 위의 주점에 앉아 란창지앙 맥주를 마시며, 또 다른 여행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차마고도의 옛 길을 따라 걷는 누지앙(怒江)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했고, 란창지앙을 따라 흘러 메콩이 되는 꿈이기도 했다. 아, 꿈꾸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꿈꾸는 것은 얼마나 그리운 것인가!

덧붙이는 글 | *징홍에 대한 더 많은 사진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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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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