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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재산을 거두어들이기 위한 노력이전개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친일파의 재산은 과연 환수 대상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친일파의 재산 축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무리 친일파라 할지라도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면 국가가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산 형성 과정에서 시대와 민족 앞에 부끄러운 발자취가 발견된다면, 단지 시간이 오래 지났다거나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이유만으로 재산 환수의 부당성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친일파의 재산 형성 과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에 관한 시사점을 얻기 위하여, 한국의 대표적 친일파인 김성수(金性洙, 1891~1955년) 집안의 최근 150년간 재산 축적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에 침투하기 시작한 1876년 개항 이후, 그리고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1910년 이후 이 집안이 어떤 방식으로 재산을 축적했는지 살펴봄으로써 한국 친일파의 재산 형성 과정을 압축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수 집안의 재산 형성 과정을 분석하는 것은 김성수나 그 후손들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다. 김성수가 대표적 친일파일 뿐만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 발전사에서 표본적인 지주 겸 자본가였기 때문이다. 김성수 집안의 재산 문제를 다루는 것은, 지주 겸 자본가로서 친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재산을 모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 <기자 주>


'뼈대는 있지만 돈은 없는 선비집안'

▲ 대표적 친일파인 인촌 김성수. 1914년까지 일본에서 공부한 후에 경성방직주식회사·동아일보·고려대학교·한민당의 주역이 되었다.
ⓒ 1969년 발행된 <경성방직오십년>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김성수의 조상들은 부자가 아니었다. 그의 집안이 흥기한 것은 할아버지인 김요협(金堯莢, 1833~1909년) 때부터였다.

김성수의 동생인 김연수(金秊洙)의 일대기를 다룬 1985년 주식회사 삼양사 발행 <수당 김연수>에 의하면 "그는 청렴한 선비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그'는 김성수의 증조부이자 김요협의 아버지인 김명환(金命煥)을 가리킨다.

또 1991년 동아일보사 발행 <평전 인촌 김성수-조국과 겨레에 바친 일생>에 의하면 "김요협은 어려서부터 인품이 뛰어나고 기골이 장대했지만 가난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위와 같은 몇 가지 기록에 의거할 때에, 김성수 집안은 할아버지 김요협 때까지는 가난을 겪은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울산 김씨에 속하는 이 집안의 본래 근거지는 전라남도 장성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집안은 오래도록 전남 장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장성 지방에 정착한 이 집안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선비 집안이었다고 한다. 즉 '뼈대는 있지만 돈은 없는 선비 집안'이었던 셈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요협의 아버지이자 김성수의 증조부인 김명환은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또 김요협는 3남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유산 상속에서도 다른 형제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런 김요협이 어떻게 집안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선비와 만석군의 결합... 김성수의 할아버지 김요협

김요협 이후로 김성수 집안에서 드러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어떤 '외부적 기운'이 이 집안의 재산 축적에 관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집안 나름의 근면·성실도 중요한 원동력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이 집안에게 다가온 '외부적 행운'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 집안의 재산 축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19세기 이후의 김성수 집안은 내부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한편, 외부적 기운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 김요협이 결혼 이후 정착한 전북 고창의 인촌리. 김성수의 호인 인촌(仁村)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 사진 출처 : <수당 김연수>
그럼, 김성수 집안이 결합한 그 외부적 기운 혹은 행운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처음에는 만석군(萬石君) 집안과의 결혼이었고, 나중에는 개항(1876년) 이후 상황과의 '결합'이었다.

만석군 집안과의 결혼을 이룬 사람은 바로 김요협이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김요협이 뼈대있는 선비 집안의 자제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점이 김요협의 인생 특히 결혼에서 중요한 메리트(merit)로 작용했던 것이다. 유명한 선비 집안의 영광을 빌리고자 하는 돈많은 만석군 집안에서 청년 김요협의 이같은 배경에 주목하였다.

조선 후기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가 분리되던 시기였다. 한 집안에서 사회적 지위('뼈대있는 양반 집안')와 경제적 지위('돈많은 만석군 집안')를 동시에 갖추기 힘들기 때문에, 각각의 요건을 구비한 집안들끼리 결혼을 통해 결합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났던 것이다.

전국적인 선비 집안의 자제 김요협과 고부 지방의 토착 지주 정계량(鄭季良)의 딸이 결혼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부 지방은 오늘날의 전라북도 고창·부안·정읍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는데, 정계량은 만석군으로 불리는 대지주로서 고부 지방의 유수한 부호였다.

그런데 통상적인 경우라면 정계량의 딸이 김요협의 집으로 시집을 왔겠지만, 이 경우는 그와 정반대였다. 김요협은 결혼을 위해 전남 장성에서 전북 고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수당 김연수>에 의하면, 이는 정계량의 부인이 딸과 사위를 가까이에 두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같은 책에 따르면 "그(정계량)는 가난한 선비인 사위를 장성으로부터 인촌리에 이주케 하여 자기 집 근처에다 살림을 차려 주었다"고 한다.

김요협이 정착한 곳은 고부군 부안면(富安面)의 인촌리(仁村里)였다. 이 곳은 김성수가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이 지방에는 1977년에 복원된 '인촌 선생 생가'가 남아 있다. 훗날 동학농민전쟁이 폭발한 곳이기도 하다.

결혼 이후로 김요협은 경제적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시초는 장인이 그에게 증여한 재산이었다. <수당 김연수>에 의하면, 그는 장인에게서 "약간의 전답(田畓)"을 받았다고 한다. 김요협이 지주 대열에 들어서게 된 단서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김요협이 재산을 늘리게 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김성수 집안을 부자로 탈바꿈시킨 요인은

첫째로는 장인의 영향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김성수 집안의 재산 문제에 관한 논문인 <고부 김씨가의 지주경영과 자본전환>에서 김용섭은 "이 경우 친정 정씨가의 위력이 가산 경영에 힘이 되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겠다"라고 추론하였다.

둘째로는 김요협의 부인인 정씨의 근검절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김성수 집안에서 대대로 찬양하고 있듯, 정씨 부인은 친정 아버지가 증여한 땅을 밑천으로 가산을 철저히 경영하여 재산을 늘리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셋째로는 김요협의 관직 취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김요협은 지주인 동시에 관료였던 것이다. 장인의 도움에 힘입어 경제적 기반을 확보한 김요협은 이후 정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김요협이 관직에 진출한 것은 마흔이 되던 1872년(고종 9년)이었다. 대원군의 권력이 서서히 기울던 시기였다. 하지만, 김용섭의 논문에 의하면, 그는 과거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관직에 취임하였다.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435 소재 ‘인촌 선생 생가’. 1861년 이후 김요협 등에 의해 건축되었다가 1977년 김연수에 의해 복원되었다.
ⓒ 고창군청 홈페이지
과거를 치르지 않은 김요협은 선공감 감역을 시작으로 해서, 이후 민씨정권 하에서 의금부도사·영릉참봉·상서원별제·사옹원주부를, 1888년 이후에는 화순·진안·군위군수 등을 지냈다. 또 동학농민전쟁이 좌절된 후에는 중추원의관·비서원승·시종원부경에 임명되었다.

과거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높은 관직에 진출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관직 경력에 관하여는 <울산 김씨 족보> 을편 변계량공파 부분과 <구한국관보> 1012·1051·3052·3358호를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김요협의 두 아들인 김기중(金祺中)과 김경중(金暻中)의 관운도 순조로운 편이었다. 이들의 관직 경력에 관하여는 위 <울산 김씨 족보> <동북읍지> <지산유고> <구한국관보> 1553·2019·2142·2909·3255·3277호를 참조할 수 있다. 여기서 김경중은 김성수의 친부이고 김기중은 그의 양부다.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을 함께 장악

이와 같이, 김성수 집안은 정치적 권력(관직)과 경제적 권력(지주)을 동시에 장악함으로써 재산 축적을 위한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할아버지나 아버지 대(代)뿐만 아니라 김성수 대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김성수 역시 <동아일보> <경성방직> 설립자인 동시에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오늘날 한국의 재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정치권력을 이용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지만, 김성수 집안의 경우에는 정치와 경제의 양쪽을 직접 장악하는 특징을 보여 주었다.

김요협의 초기 재산 형성에 기여한 요인들로서 위와 같은 3가지 점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40대까지만 해도, 김요협는 어디까지나 중소지주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위의 요인들은 그가 중소지주의 지위를 갖거나 유지하는 데에만 기여했을 뿐이다. 김성수 집안을 한국 굴지의 부자로 탈바꿈시킨 요인은 다른 데에 있었다.

덧붙이는 글 | * 제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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