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명당이라는 진종(영종의 맏아들 효장세자) 영릉
ⓒ 한성희
한국 사람 치고 '명당' 소리 한 번 안 들어보거나 조상의 무덤이나 집터가 '명당이다, 흉당이다'라는 소리 안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풍수라고 하면 대부분 묘 자리 잡는 것을 연상한다.

원래의 목적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지만 어원을 살펴보면 다시 묘나 고을, 집터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선 인간의 삶과 죽음이 땅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묘의 뒷자리에 있는 주산이 바람을 감춘다는 장풍(藏風)과 땅의 생기를 흘러 내려가지 못하게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득수(得水)를 줄인 말이 풍수(風水)다.

풍수지리설, 도참설이라고도 하는 풍수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이고 신라 말기부터 고려시대에 성행했다고 하나, 실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철저하게 풍수의 원칙을 지켜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왕릉이다. '겉 유교, 속 풍수'라는 소리가 있다.

공·순·영릉에서 가장 명당으로 치는 곳이 영릉이다. 이것은 요즘 때때로 찾아오는 풍수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강력한 왕권국가였던 조선은 초기부터 후손 발복에 목매달다시피 풍수에 의한 왕릉을 조성해왔다. 왕권을 대대손손 누리려는 마음에서다. 유교로 입신하고 풍수로 출세한다는 공식이 성립된 것도 조선왕조다. 때문에 신하들도 풍수에 대해 남다르게 열심히 공부해 자신의 입신양명과 후손 발복, 두 가지 토끼를 함께 잡았다.

철저한 신분제도로 이뤄진 조선왕조에서 풍수의 혜택과 권리를 누릴 수 있는 0순위는, 절대권력을 잡고 있는 왕이다. 그 다음이 명문귀족이지만 제 아무리 현재 높은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왕릉 택지로 결정되면 수십 기나 수백 기에 이르는 조상 묘를 하루아침에 이장해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심지어 성종의 작은할아버지뻘 되는 광평대군(세종의 5째 아들)의 묘도 성종의 능으로 결정되자 예외가 없었으니 가히 왕권은 무소불위의 권력이랄 수밖에…. 이러니 왕위 차지하려고 조카, 동생, 형 가리지 않고 죽고 죽이는 피 터지는 싸움판을 벌였던 게 아닌가.

▲ 영릉 무덤 앞에 서서 주산과 안산의 설명을 듣는 풍수 답사반.
ⓒ 한성희
선조의 묘 자리 이장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항하면? 두말 할 것도 없이 반역으로 몰려 삼족이 멸족 당한다는 게 뻔한데 누가 감히 입이나 뻥긋하겠는가.

그나마 명문귀족이나 공신일 경우, 왕실에서 위로비조로 곡식과 물품을 내리는 적도 있었지만 백성들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왕릉택지로 결정되면 무조건 이장을 해야 함은 물론, 논밭과 집도 몰수되고, 능에서 수십 리 밖으로 이장비용은커녕 돈 한 푼 못 받고 내쫓겨야 했다.

대개 왕릉 하나 넓이 기준이 24만 평이나 현재 이곳 공·순·영릉은 40만 평, 서오릉이 55만 평이다. 당시 기준을 적용한다면 두 배 이상 넓었을 것이니 뒤에 능을 더 조성해 늘리고 내쫓고 자리잡는 건 순전히 왕실 맘대로였다.

왕릉 터 때문만 아니라 명당에 일가견이 있는 세도가의 눈에 걸리면 조상의 묘도 뺏기기 일쑤였던 민초들은 조상 묘가 명당이면 더 괴로웠다. 생존을 위한 삶조차 힘겨웠을, 당시 백성들의 부역과 피땀으로 조성된 왕릉이 현대 우리의 문화재와 푸른 숲으로 남아 있으니 이것도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다.

보통, 한 번 묘를 쓴 자리에 다시 묘를 쓰지 않는다는 금기를 상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묘를 빼앗아 왕이나 왕비의 무덤으로 쓰는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당시의 풍수란 왕과 귀족에 국한한 소수만이 누리고 알고 있던 극비에 속했다. 특히 왕과 왕비의 능은 일반인은 수십 리 근처에 얼씬도 못하는 금지구역이었고 장례절차도 절대비밀에 속했다.

왕릉을 제외한 묘는 무조건 5척(1.5∼1.6m) 깊이로 묻으라는 법이 있었고 이것을 어길 시에는 큰 처벌을 받았다. 반대로 왕릉은 10척(3.2∼3.3m)을 파는 것이 원칙이었다. 땅의 생기에서 왕기를 받아 후손 발복으로 간다는 깊이가 10척이라는 풍수에서 연유된 왕가의 절대기밀이었다. 행여 알고 있는 대신이나 왕족이 이 흉내를 냈다간 삼족이 몰살하는 건 기본이었다.

그 때문에 5척에서 왕기가 새어나갈 리가 없으니 "왕이 주무실 자리가 필요하니, 니네들 묘 다 옮겨!" 풍수공식이 성립될 수밖에. 알다가도 모를 이해 안 가는 왕릉풍수다.

명당이란 무엇일까?

이렇게 난 데 없이 풍수타령을 시작하니 풍수에 대해 대단한 실력이라도 있는 것으로 오해할지도 모르지만, 실상 풍수의 기본도 모른다. 그러나 왕릉과 풍수는 지금까지 구구하게 설명했듯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풍수에 대한 내 상식은 명당자리라고 알려진 '혈이 있는 곳에 묻는다'는 남이 다 아는 개념 정도다.

"이 자리가 가장 기가 강하게 흐른다고 많은 풍수전문가들이 짚은 곳입니다."

아무리 명당이 별거냐는 식으로 생각해도, 박정상 공릉문화재청관리소장이 명당자리라고 하는 소리에 귀가 번쩍 하는 건 별 수 없는 속물근성 때문이다. 순릉에서 영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 자리를 지날 때마다 '요기가 명당이라는 데, 기나 받고 가지' 생각하면서 잠시 멈추는 것만 봐도 역시 속물을 못 벗어난다.

명당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바람이 잘 불고 기분이 상쾌해지긴 한다. 다른 곳에서 바람이 불지 않아도 이 자리만 영릉 쪽에서 넘어오는 바람이 내려온다. 넓이라야 한 2, 3m 정도나 될지?

지난여름, 무더위가 한창이던 날 장난 삼아 실험을 해봤다. 함께 걸어가던 문화유산해설사 권효숙씨에게 슬슬 미끼를 던졌다.

"이 자리가 명당이라고 오는 사람마다 그런 대요. 소장님이 그러던 걸요."
"그래요?"
"여기 오면 시원한 거 같지 않아요? 바로 옆에도 안 부는데 이 자리만 바람이 불잖아요."
"정말 그러네."

예상대로 권효숙씨도 호기심이 바짝 당기는지 멈춰서 둘러본다. 명당이라면 솔깃한 건 누구나 다 같다. 단풍나무가 영릉 언덕 쪽에 우거지고 가을 단풍 경치가 공릉 안에서 제일 멋있는 산책로다.

"지금 무지 더운데도 여긴 좀 시원하잖아요. 겨울엔 다른 곳보다 훈훈하대요."
"정말 시원하긴 하네."

▲ 영릉과 순릉 산책로 사이에 있는 '명당'자리.
ⓒ 한성희
권효숙씨는 한 술 더 떠서 그곳을 중심으로 몇 미터 떨어진 양쪽을 왔다갔다하며 감으로 더위를 측정해보더니 딱 멈춰서 "2도 정도 차이가 나는 것 같다"고 한다. 기가 빠지면 여기에 가부좌 틀고 두어 시간 앉아서 생기를 받아봐?

그러나 여기가 명당이라면 왜 이곳을 무덤으로 쓰지 않은 걸까? 그것은 조선왕릉 구조 법칙이 대답이 될 듯 싶다. 소위, 혈이란 딱 한 군데 있는 것이 아니고 새 을자(乙) 모양으로 흘러내린다고 한다. 흘러내리면서 살아있는 혈이 생혈이고 죽은 혈이 사혈이라나? 내 눈엔 혈이 어떤 건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신라왕릉과 고려왕릉을 조선왕릉과 비교한다면, 신라왕릉은 낮은 바닥에 자리잡고 고려왕릉은 조선왕릉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으며 조선왕릉은 신라와 고려의 중간 높이 정도다.

조선왕릉은 거의 다 나지막한 언덕, 즉 풍수용어로 강(岡) 위에 자리한다. 인공적으로 강을 만들지 않는 이유는 원래 있는 흙이라야 생기를 받는다는 풍수 때문이다. 그 혈이 응집된 곳이 강에 있고 조선왕릉의 특징은 강에 능침이 자리잡는다. 명당이라고 한 산책길은 낮은 바닥에 있으니 능침으로 쓸래야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시 풍수들이 알면서도 위쪽에 자리잡은 건지, 왕이 아닌 세자니까 대충 넘어간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명당이 있는 곳 주위는 다 좋은 기가 흐른다고 하니, 능에 오면 기분 좋은 이유가 그것 때문일까? 청정 산소를 내뿜는 숲의 맑은 공기가 더 확실한 설명이 되겠지만….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