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11 19:59최종 업데이트 24.04.11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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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5일 부산시 부산진구 삼광사를 찾아 대조사전에서 참배하고 있다. 2024.4.5 ⓒ 연합뉴스

 
4·10총선은 윤석열 대통령의 두 어깨에 여소야대의 짐을 한층 무겁게 얹어놓았다. 이재명에 조국까지 올라탄 여소야대의 보따리를 양어깨에 짊어지게 됐다. 그런 상태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짐도 들어줘야 하고, 처가의 짐도 함께 짊어져야 한다. 불필요한 짐들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남은 3년의 시간은 그에게 고초가 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출범했지만 불법 개헌을 감행한 뒤인 1954년부터 국회를 자기 수중에 두게 됐다. 이승만은 자유당을 내세운 1954년 제3대 및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그래서 그는 여소야대를 염려할 이유가 없었다.


윤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또 다른 대통령인 박정희도 여소야대를 만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부정선거를 통해 과반을 유지한 데 비해, 박정희 정권은 '부정한 선거법'을 통해 1963년·1967년·1971년·1973년·1978년 총선에서 과반을 획득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비상정부인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정한 국회의원선거법 제125조는 제1당의 득표율이 50% 미만일지라도 전국구(비례대표) 의석 절반을 제1당에 준다고 규정했다. 박 정권의 민주공화당은 1971년까지 이 규정의 혜택을 누렸다.

유신체제 하인 1973년 제9대 총선에서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은 전체 219석 중 73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위성정당인 유신정우회(유정회)가 73석을 획득함에 따라 박 정권은 과반을 넘는 총 146석을 갖게 됐다.

1973년 총선 때부터는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추천하고 대통령이 의장인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이들을 선출하는 해괴한 선거제도가 시행됐다. 여당이 의석 3분의 1을 확보한 상태에서 선거를 치르도록 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 유정회를 구성했다. 

윤 대통령이 '정치는 잘했다'고 평가하는 전두환은 박정희 방식을 응용해 여소야대를 방지했다. 전두환의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1981년 제11대와 1985년 제12대 때 과반을 차지했다.

1981년 총선 때 민정당은 35.6%를 득표해 지역구 의석 184석 중 90석을 얻는 데 그쳤다. 하지만, 지역구 1위 정당이 전국구 의석 3분의 2를 가져간다는 국회의원선거법 제130조 제2항에 따라 전국구 92석 중 61석을 확보해 전체 의석 276석의 과반인 151석을 갖게 됐다. 민정당은 '신한민주당의 돌풍'으로 각인된 1985년 2·12총선 때도 35.2%밖에 득표하지 못했지만 그런 해괴한 규정에 힘입어 전체 276석 중 148석을 확보했다.

이처럼 윤 대통령이 존경하는 선배들은 부정선거나 부정한 선거제도를 활용해 여소야대 기간을 줄이거나 그것을 미연에 방지했다. 이런 방식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4·10 총선 이후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선례를 궁리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임기 내내 '여소야대'는 윤 대통령이 처음
 

1990년 1월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오른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왼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 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 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한 뒤 청와대를 나서는 모습. ⓒ 연합뉴스


1987년 6월항쟁은 이승만 식의 부정선거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박정희·전두환 식의 선거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6월항쟁이 직선제 개헌투쟁으로도 불리는 데서 나타나듯이 이 항쟁은 부조리한 선거제도에 대한 국민적 저항에 기반했다. 그래서 이후로는 대통령 선거제도뿐 아니라 국회의원 선거제도에서도 많은 개선이 이뤄졌다.

그런 속에서 1987년 이후에는 여소야대 국면이 자주 출현했다. 윤 대통령 이전의 대통령들은 이를 여대야소로 바꾸는 '묘기'를 부렸다. 그런 방법으로 그들은 위기를 피해 나갔다.

자유당의 출현으로 집권당 개념이 본격화된 이후의 첫 총선이 1954년 제3대 총선이다. 그 후의 역대 총선 중에서 집권당이 거의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선거는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29일에 열린 제5대 총선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도주한 상태에서 치러진 이 선거에서 자유당은 민의원(하원) 233석 중 2석을 차지하고 참의원 58석 중 4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극단적으로 예외적인 이 사례를 제외하면, 1954년부터 6월항쟁 이전까지의 역대 총선에서 집권당의 지역구 평균 득표율은 39.2%였다. 6월항쟁 이후부터 2020년까지의 집권당 득표율은 평균 38.3%다.

6월항쟁 이전이나 이후나 집권당의 득표율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그 이전에는 여소야대 국면이 사실상 없었고, 그 후에는 이것이 잦았다. 민정당이 집권당일 때인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등장한 여소야대는 민정당의 후신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집권할 때인 1992년 제14대, 민자당의 후신인 신한국당이 집권할 때인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도 나타났다.

이 현상은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이 집권할 때도 있었다. 뒤이어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집권할 때인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도 재현됐다. 1987년 이후의 9차례 총선 중에서 5차례가 여소야대를 낳았던 것이다.

집권당 득표율이 1987년 이전이나 이후나 별반 다르지 않는데도 1987년에 이후에만 여소야대 국면이 빈번했다. 이는 제1당에 유리한 선거제도가 사라진 데다가 이승만 식의 노골적인 선거부정이 일어나기 힘들게 됐기 때문이다. 제1당의 평균 득표율이 40%가 안 되니, 부정한 방법이 동원되지 않는다면 여소야대 국면이 나타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6월항쟁 이후로 2020년까지 여소야대 국면을 겪은 대통령은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이다. 6월항쟁 이후의 모든 대통령이 여소야대를 경험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임기 내내 계속해서 여소야대를 겪은 것은 아니다. 1988년에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인위적 정계개편을 통해 여소야대를 피해 갔고, 1993년에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과 1998년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의원 빼내가기'라는 또 다른 형태의 인위적 정계개편으로 피해 갔다.

이명박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중의 총선을 통해 여소야대를 소멸시켰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대 국면에서 취임했다가 2016년에 여소야대를 허용하고 뒤이어 촛불혁명을 맞았다. 이처럼 임기 내내 계속해서 여소야대에 시달린 대통령은 윤 대통령 이전에는 없었다.

윤 대통령의 임기는 3년 남았다. 그가 이명박과 문재인처럼 총선을 통해 여소야대를 소멸시킬 가능성은 전무하다. 다음 총선은 그의 임기 종료(2027년) 이후인 2028년에 있다. 

윤 대통령에겐 '묘수'가 없다
 

지난 10일 한동훈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과 윤재옥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 등이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 마련된 국민의힘 제22대 국회의원선거 개표상황실에서 출구조사 결과를 시청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그래서 윤 대통령이 여소야대를 극복하는 방법은 인위적 정계개편 뿐이다.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과 합당하든가 아니면 야당 의원들을 대거 빼내가야 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다.

윤석열 정권은 흑백 논리로 정치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자체를 이분했다.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는 적대 진영과 손을 잡기도 힘들고 완충세력의 도움을 받기도 쉽지 않다. 인위적 정계 개편을 성사시키는 것도 힘들지만, 그 결과물을 오래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윤석열 정권이 가야 할 길은 지금의 여소야대를 인위적으로 변개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는 묘수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민심이반을 초래한 그간의 실책들을 돌아보고 정의가 회복되도록 길을 터주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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