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0 10:06최종 업데이트 23.11.10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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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서울시장이 11월 7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부실공사 ZERO 서울' 추진계획 기자설명회를 하고 있다. ⓒ 서울시

 
이승만기념관을 서울 경복궁 동편인 송현광장 내에 건립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오세훈 시장은 9일 오후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관계자들에게 '송현공원 내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 검토'라는 파워포인트(PPT) 자료를 설명했다. 재단 관계자들이 이곳에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역설하자 오 시장이 "의견을 모아 주시면 적극 검토하겠다"고 답해 박수를 받은 사실이 9일 보도됐다.

송현(松峴)은 글자 그대로 솔고개다. 음력으로 태조 7년 4월 16일 자(양력 1398년 5월 2일 자) <태조실록>은 "경복궁 왼쪽 언덕의 소나무가 말라서 언덕 주변 인가들에 철거를 명령했다"고 알려준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나라를 다스린 임금의 관점이 세상의 표준이었던 시절이다. 그런 시대였으므로 경복궁 왼쪽은 경복궁 동쪽이었다. 경복궁 동쪽인 솔고개의 소나무가 고사하고 있어 이를 보호하고자 철거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한양 주산인 백악산(북악산)과, 좌청룡인 타락산(낙산), 우백호인 인왕산, 남산인 목멱산에 대한 종교적 관념의 보호를 위해 소나무 심기에 신경을 쓴 조선왕조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다. 이로 인한 당시 대중의 고통 역시 함께 읽을 수 있다.

1398년 5월에 이성계·정도전 정권이 소나무 보호를 위해 민가 철거를 명한 이곳은 5개월 뒤 쿠데타 현장으로 변모했다. 최강국 명나라의 지지를 받는 이방원과 사대주의세력이 요동정벌(만주정벌)을 추진하는 삼봉 정도전과 개혁 진영을 살해한 장소가 바로 이 솔고개였다.

음력으로 태조 7년 8월 26일(1398년 10월 6일) 밤에 지안산군사(안산군수) 이숙번의 부대를 이끌고 경복궁 앞으로 진격한 이방원은 지금의 트윈트리타워 부근에서 모임 중이던 정도전을 기습해 정권을 무너트렸다. 송현광장은 이 현장의 바로 옆이다.

조선 건국 직후에 사대주의세력이 승리를 거둔 이곳은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수탈기관인 식산은행과 그 사택 자리가 됐고, 해방 뒤에는 미군 숙소로 이용되다가 정부수립 이후에 미국대사관 숙소로 쓰이게 됐다.

정부수립 다음 달인 1948년 9월 11일 체결되고 9일 뒤 발효된 '대한민국정부 및 미국정부 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한미재정재산최초협정)'은 이 협정 제9조에 근거한 보충협정에서 "식산은행 소유재산 전부"를 미국에 넘긴다고 하면서 "송현동 49의 1 전부"가 포함된다고 규정했다.

송현동에 이승만기념관 세우려는 이유
 

2022년 10월 6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인근 송현동 부지 모습. 서울시는 '이건희 기증관' 건립이 본격적으로 착수되기 전인 2024년 상반기까지 3만 6642㎡ 규모의 송현동 부지 전체를 열린녹지광장으로 재조성해 시민들에게 개방한다. ⓒ 연합뉴스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령(政令)이 나오는 곳이었다. 경복궁과 그 인근에서 창칼을 휘둘러 아버지의 정권을 무너트린 이방원이 그 뒤 이곳을 기피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창덕궁이 제1궁궐처럼 쓰이기는 했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이 최고의 궁궐인 법궁(法宮)으로 생각한 곳은 이곳이었다. 이런 관념은 구한말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함에 따라 더욱 강해졌다.

경복궁의 그 같은 이미지가 남아 있었던 20세기 중반에, 미국은 경복궁 남쪽 입구에는 미국대사관을 세우고 경복궁 동쪽에는 미군 숙소에 이어 대사관 직원 숙소를 만들었다. 조선 건국 이후로 정령이 나오는 곳으로 여겨지던 통로들을 미국이 틀어쥐는 형국이었다.

억압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이런 건물 배치가 가능했던 것은, 언론보도로도 나와 있듯이 미국과 미군을 붙들어 두려는 이승만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그런 생각으로 이 땅을 확보해 미국에 제공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인들의 소유물로 굳어진 곳이라, 1997년 삼성그룹이 인수하기 이전인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송현광장은 미국의 이미지가 강하게 풍기는 장소였다. 기다란 담벼락과 단단히 잠긴 대문, 어쩌다 한 명씩 드나드는 미국인들의 모습이 1990년대 초반 이전 이곳의 풍경이었다.

송현광장에 이승만기념관을 세우고자 하는 쪽이 중시하는 것도 그런 측면 때문인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한미동맹의 상징적 장소인 이곳이 이승만기념관 부지로 적절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석열 정권과 보수진영은 이승만의 최대 업적 중 하나를 한미동맹 강화에서 찾는다. 이승만이 1953년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적극 추진한 것에 대해 높은 의의를 부여한다. 미국과 인연이 깊은 송현동에 이승만기념관을 세우려는 데는 그런 정서가 묻어 있다.

그러나 그런 정서는 터무니없는 세뇌의 결과다. 이승만이 상호방위조약을 애걸하지 않더라도 당시의 미국은 전 세계적인 동맹 연합체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를 이승만의 치적으로 포장하는 것은 당시의 세계적 분위기를 도외시한 것이다.

미국이 한국에 가조인 요구한 이유
 

1957년 11월 18일 자 <조선일보> 기사 "미, 아주 방위 강화책 검토"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한국을 세계적인 동맹 네트워크에 포함시키는 미국의 구상은 한국전쟁 이전에도 있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창설된 1949년 4월 4일로부터 얼마 안 있어 본격화된 일이다.

1957년 11월 18일 자 <조선일보> 기사 '미(美), 아주(亞洲)방위 강화책 검토'는 미 국무부의 세계전략을 논의하면서 "지난 10여 년간 여러 번 논의된 바 있는 하나의 계획은 동북아세아조약기구 설치안"이라고 한 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조치는 아세아 우방제국(諸國)을 방위조약으로 미국과 연결시키고 또한 NATO 및 바그닷드조약, 리오조약제국과 연결시키는 일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유럽-중동-동남아-동북아-미국-중남미를 연결하는 동맹 네트워크로 세계제국을 만드는 구상이 1940년대 후반부터 논의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이 한반도의 군사적 가치를 중시했다는 점은 1948년 제주 4·3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데서도 역설적으로 표출된다. 1946년 10월 22일 자 <조선일보> '제주도는 군사적 요지'에 소개됐듯이 그달 21일 자 AP통신에 "제주도가 금일과 같은 장거리 폭격기 시기에 있어 그 군사적 중요성을 띠우고 있음은 이 기지로부터 동양 각 요지에 달하는 거리를 일별하면 능히 해득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미국이 제주도에서 대학살을 자행한 데는 이런 전략적 기지를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선언으로 한국을 방위 라인에서 배제했다고들 하지만, 그로부터 5개월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미국이 제일 먼저 이 전쟁에 뛰어든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이 굳이 동맹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미국이 한국에 대해 고도의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마치 바짓가랑이를 붙잡듯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읍소했다. 이런 태도가 한국의 협상력과 국익을 갉아먹었다는 점은 이 조약의 가조인에서도 나타난다.

2016년에 <한일군사문화연구> 제22집에 수록된 방준영·김회동 육사 교수의 공동논문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과정과 일본 요소'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보이는 특수성으로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정식 체결에 앞서 가조인이 행해졌다는 점"이라고 한 뒤, 미국이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에 대해 가조인을 요구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 의회가 조약을 비준할 것이라는 보증을 바라고 있던 이승만을 회유하고, 동시에 쟁점이 된 조약 조항의 내용을 미국 측 초안대로 합의하는 데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덜레스의 조치였던 것이다."

정식 조인을 희망하는 이승만에게 가조인 카드를 꺼내놓음으로써 덜레스 국무장관은 이승만을 애태우고 자국이 의도한 대로 체약을 마무리했다. 이런데도 한국 보수·극우 진영은 이를 이승만의 업적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무능과 허약의 극치, 이승만의 대미정책

1948년에 미군정 지배가 끝난 한국은 5년 뒤인 1953년 10월 1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에 패배한 일본은 미군정 지배가 종료(1952년 4월 28일)되기 전인 1951년 9월 8일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했다. 1946년까지 미국의 지배를 받은 필리핀은 일본보다 빠른 1951년 8월 30일에 미국과 동맹조약을 맺었다.

이런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동북아를 글로벌 동맹에 묶는 일뿐 아니라 동북아 국가들을 개별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데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이 애걸했다고 해서 해준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에 패한 일본과 미국의 지배를 받은 필리핀은 한국보다 2년 먼저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런데도 윤 정권과 극우·보수 진영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승만의 최대 치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일본과 필리핀에는 이승만보다 훨씬 위대한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미국과 누가 먼저 체결했건 간에 애당초 업적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과 일본·필리핀 등을 자국 중심의 동맹으로 끌어들인 해리 트루먼 대통령(재임 1945~1953)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재임 1953~1961)의 업적이라면 모를까 이승만의 업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미동맹에 지나치게 의존한 이승만의 태도는 홀로 일어설 자신이 없는 극우·보수 세력의 나약함을 보여줄 뿐이다. 한미동맹을 하건 한중동맹을 하건 최소한의 자주적 기반만큼은 구축해야 하는데도 강대국의 후원에만 기대는 무능과 허약의 극치를 보여준 것이 이승만의 대미정책이다.

그런 이승만을 높이 기리고자 미군 및 미대사관 숙소 터에 이승만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한국은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나라라고 세계만방에 광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승만기념관을 세우는 것 자체도 잘못된 일이지만, 이를 송현광장에 세우는 것은 더욱더 잘못된 일이다.

1398년 그날 송현 정자에서 모임을 갖던 중에 사대주의 세력의 기습을 받은 정도전이 사망 직전에 지었다는 자조(自嘲)라는 시가 문집인 <삼봉집>에 남아 있다. 정도전은 스스로에게 비웃음을 던지는 이 시에서 "삼십 년 동안 애쓰고 힘들인 업적/ 송현 정자에서 한번 취하는 사이에 결국 헛되이 되었구나"라고 한탄했다.

윤석열 정권이 이승만의 망령을 송현동으로 불러 이 사회의 가치관을 혼란시키고 나라를 더욱 망가트리게 되면, 한국인들이 해방 이후 80년간의 노동과 민주화 투쟁으로 쌓아온 공든 탑이 하룻밤 사이에 허무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 송현동에 이승만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은 '자조'를 읊는 지경으로 한국 사회를 몰아넣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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