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2 12:02최종 업데이트 23.10.2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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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기수, 함화진의 흉상이 있다. 이들의 친일 행적 등이 논란이 되자 국립국악원은 흉상 옆에 친일 행적을 포함하는 설명문을 세워놨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 동상 처리에 대한 모범사례로 보고 있다. ⓒ 김종훈


20세기 한국에서는 큰 상처를 남긴 사건들이 특히 많았다. 대표적으로 일본에 의한 35년간의 억압과 착취, 3년간의 한국전쟁, 제주·광주·여수·순천 등지에서 자행된 대규모 학살 등이다. 이런 사건들은 각각의 역사적 의의와 맥락을 갖고 있으므로, 동일 인물이 이 중에서 여러 개의 사건과 관련될 경우에는 그 여럿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인물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해방 직후의 친일세력이 모태가 된 한국 보수세력은 한국전쟁에 대해서만 최우선 가치를 부여하고, 나머지 사건들의 비중은 낮추거나 무시해 왔다.

균형을 상실한 그 같은 평가의 극단적 수혜자 중 하나가 백선엽이다. 백선엽은 육군 정보국장 시절인 1949년 2월 극우적인 서북청년단원들을 중심으로 호림부대를 창설하고 이들을 앞세워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고 여성들에게 죄를 저질렀다. 빨치산 토벌을 빌미로 그런 악행을 범한 백선엽은 해방 이전에는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간도특설대 장교가 되어 항일조직 토벌에 앞장섰다.


그렇지만 보수세력은 백선엽의 친일은 물론이고 민간인 학살에도 개의치 않는다. 한국전쟁 때 실적을 쌓았다는 점만 강조할 따름이다. 이 같은 편향성은 윤석열 정부에 들어 백선엽을 성웅시하는 극단적 풍조의 저변을 이루고 있다.

그간 한국을 이끌어온 보수세력이 한국전쟁에만 올인하고 일제 수탈이나 민간인 학살은 외면하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 후자의 비중은 실제보다 훨씬 낮게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이 형편 없는 대우를 받고, 학살 피해자들이 천덕꾸러기 비슷한 대우를 받은 데는 그런 평가 시스템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백선엽과 정율성, 그리고 김기수
 

정부와 여당의 광주광역시 '정율성 역사공원' 건립 사업 비판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29일 오전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전시관 앞을 시민들이 걷고 있다. ⓒ 안현주


이 시스템의 파급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정율성 논란이 그것이다.

음악가이자 항일투사인 정율성이 중국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은 남한 사람들에게 환영받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그가 동아시아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엄연한 사실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팔로군 대합창' 작곡 등을 통해 항일 진영의 사기와 전투력을 고무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국인으로서 중국군 진영에서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한·중 두 민족이 항일투쟁 전선에서 연대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하지만 보수세력은 그가 일본제국주의를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는 일절 평가하지 않고, 중국군의 일원이 된 사실을 부각시키며 광주광역시의 정율성 추모에 제동을 걸고 있다.

균형을 상실한 평가 태도는 정율성과 동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음악인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정율성보다 3년 뒤인 1917년에 출생한 김기수(金琪洙)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도 그런 태도와 무관치 않다.

지금의 서울금화초등학교인 죽첨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김기수는 14세 때인 1931년에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옛 대한제국 황실을 관리하는 이왕직의 아악부원 양성소가 그의 학교가 됐다. 전공은 대금 연주였다. 국악인으로 음악계에 첫 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19세 때인 1936년에 양성소를 졸업하고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가 된 그는 정율성과 정반대 진영에서 '마일리지'를 쌓아갔다. 일본 왕실의 역사가 2600년임을 전제하는 일본 기원 2600주년 행사에 곡을 출품해 당선되는 성과도 거뒀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기수 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1939년 12월 이왕직에서 일본 기원 2600년이 되는 194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 '황기 2600년 축전 기념 근작 봉축가'를 공모하자, 김천룡과 함께 출품했다. 이 중 이능화의 한시 악장에 곡을 붙인 김기수의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이 당선·채택되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 왜곡에 가담한 친일 역사학자 이능화가 작사한 <황화만년지곡>은 이른바 천황에 의한 세상의 교화가 만세토록 무궁하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전환된 메이지 시대(1867~1912) 이래의 일본 침략사를 미화한 작품이다.

일본 침략 미화한 황화만년지곡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능화 편에 따르면, <황화만년지곡>은 메이지를 연호로 사용하면서 대만·오키나와·조선을 순차적으로 공격한 무스히토 일왕의 시대를 가리켜 "메이지 대제는 중흥을 이루어 앞길을 밝히시네"라고 찬미했다. 제국주의국가로 전환시킨 일을 '중흥', '앞길을 밝힌다'라는 말로 찬양한 것이다.

그런 뒤 "그 위세는 청국과 러시아를 아우르고 교화는 조선에 미치도다"라고 읊었다.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 및 1904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일왕의 교화가 조선에 미치게 됐다는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이 보호국이 된 것을 두고 조선이 일왕의 교화를 받게 됐다고 해석한 것이다.

뒤이어 "오늘날 우리 황제 폐하께서 금과옥조로 엄숙히 다스리시니/ 만주를 다시 일으키고 지나를 응징하도다/ 아시아를 일으키시는 그 크신 업적이 이로부터 혁혁히 빛나도다"라고 찬양했다. 1931년 만주사변 및 1937년 중일전쟁(지나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아시아를 부흥시키는 혁혁한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김기수는 제국주의 관점에서 1867년 이후의 역사를 해석하는 친일 역사학자의 가사에 곡을 붙여 <황화만년지곡>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일본 기원 2600주년 기념을 식민지 한국에서 대표하는 작품이 됐다. 라디오 생방송과 공연 등에서는 이 노래가 계속 울려퍼졌다. 일례로, 1940년 2월 11일자 <조선일보> '봉축 아악'은 조선방송협회가 그달 13일 개최하는 '기원 이천육백년 봉축 아악과 가무의 밤' 행사 때 황화만년지곡 등이 연주된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국악을 일왕 찬양과 침략전쟁 미화에 접목시킨 이 작품은 일제의 전쟁 선전전에 요긴하게 활용됐다. <친일인명사전> 김기수 편은 "황화만년지곡은 이후에도 계속 일본의 기념일에 맞춰 부민관에서 연주하거나 실황으로 중계 방송되었다"고 설명한다. 부민관은 나중에 국립극장·국회의사당·시민회관과 세종문화회관으로 별관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서울시의회 청사로 쓰이고 있다. 이런 데서 황화만년지곡이 자주 연주됐던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황화만년지곡은 김기수가 아악부에서 교육받은 서양 음악 이론과 궁중 아악곡을 오선악보로 채보하면서 쌓은 서양 음악 실력을 바탕으로 처음 작곡한 곡"이라며 "오선보로 작곡된 근대 국악 창작곡의 시초로 평가"된다고 소개한다.

예술가가 배 곪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김기수는 이왕직 아악부에 적을 두고 친일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친일 재산의 뒷받침을 받은 김기수는 정율성의 반대 진영에서 음악 선전전에 참여했다. 그는 해방 뒤에도 정율성의 반대편에 섰다. <친일인명사전>은 1950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같은 해 10월 성경린이 대장으로 있는 육군본부 휼병감실 군예대 국악소대 제3소대원으로 근무했다"고 말한다.

정율성이 항일 선전음악의 최일선에 있었던 것처럼, 김기수도 일제 침략전쟁 선전음악의 최선두에 있었다. 정율성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처럼, 김기수도 이 전쟁에 참여했다.

재평가 필요한 김기수의 과거
 

김기수의 국악 앨범. 그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 지구레코드

 
그렇지만 그동안 한국 사회는 정율성 같은 사람에게만 주목하고 김기수 같은 사람에게는 주목하지 않았다. 보수세력이 친일 선전음악의 해악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고, 이것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로도 김기수는 맹렬한 활동을 이어갔다. 국립국악원장도 지냈고 국립국악고등학교장도 지냈다. 1964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인 종묘제례악 기예능 보유자로 지정됐고, 197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인 처용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이렇게 사회적 주목을 받았지만, 김기수는 정율성이 받은 혹독한 폄하 같은 것을 경험하지 않았다. 김기수가 세상을 떠나고 이틀 뒤에 나온 1986년 10월 23일자 <조선일보> '국악인 김기수 씨 별세'는 "신국악의 창작에도 힘을 기울여 '송(頌)광복' 등 1백여 곡의 작품을" 남겼다는 말로 그의 인생을 요약했다.

국악을 친일 부역에 활용한 그의 음악 활동은 '신국악의 창작'으로 표현됐다. 그의 최대 히트곡은 '황화만년지곡'이 아닌 '송광복'으로 바뀌어 언급됐다. 마치 광복을 찬송하는 민족주의 음악인이었던 것처럼 언급된 것이다. 일제의 착취나 민간인 학살의 심각성은 지극히 낮게 평가하고 한국전쟁에만 매몰되는 보수세력의 시각과 관점이 반영된 보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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