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0 10:37최종 업데이트 23.09.1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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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의 묘는 서울 현충원 장군3묘역 최상단에 자리해 있다. 장군3묘역은 임정요인과 애국지사묘역과 고개 하나를 두고 있지만 두 묘역 간 거리는 직선으로 따지면 65m에 불과하다. ⓒ 김종훈


백선엽과 동시대에 활동한 군인 중 하나가 이종찬이다. 참군인이라는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국회 간선제하에서 재선이 어려웠던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중에 계엄령을 선포한 뒤 폭력적 방법으로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킨 1952년에 대통령의 군대 동원 지시를 거부한 일로 유명하다.

이종찬이 지시를 거부한 명분은 군의 정치적 중립이었다. 1990년 3월 30일 자 <한겨레> 13면 특집 기사에 따르면, 1952년에 이종찬 육군총참모장 겸 계엄사령관이 전군에 하달한 '육군 훈령 제217호'에는 "군의 본질과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고 의식·무의식을 막론하고 정사에 관여하여 경거망동하는 자"가 있어선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때문에 경무대의 미움을 산 이종찬은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 19일 뒤인 그해 7월 23일에 백선엽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8월 4일자 <조선일보> 2면 좌하단에는 그가 미국 육군참모학교로 유학을 떠난다는 기사가 실렸고, 8월 5일 대선에서는 자유당 후보 이승만이 74.6% 득표율로 2위 무소속 조봉암(11.4%)과 3위 무소속 이시영(10.9%)을 제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부정선거였기 때문에 득표율은 의미가 없었다.

정치에 관여 않겠다며 그해 8월 17일 대구 동촌비행장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36세의 이종찬에게 쿠데타 제안서를 건넨 대담한 인물이 있었다. 남로당(남조선노동당) 활동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가 군에 복귀한 지 2년밖에 안 된 35세의 박정희 대령이었다.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 인용된 1987년 3월호 <신동아> 기사에 따르면, 박정희는 구국을 위한 거사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종찬이) 1년 후 귀국하면 다시 지도편달을 받겠다"며 훗날을 기약했다.

미국으로 떠난 이종찬은 1년 뒤인 1953년에 귀국 명령을 받고 돌아와 그해에 육군대학 총장이 됐다. 그가 총장직을 떠난 것은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허정 대통령권한대행이 과도 국무원을 이끌던 1960년 5월 2일이다. 이날 이종찬은 과도 국무원의 국방부장관에 임명됐다.

4·19 혁명이 절정에 달하기 얼마 전인 그해 3월 20일, 이종찬은 쿠데타를 제의하는 편지를 또다시 받게 됐다. 발신자는 박정희 소장이었다. 위 <신동아> 기사에 따르면, "혁명의 최고 지도자로 모시겠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종찬은 이번에도 거절했다. 대통령의 요구건 하급자의 부탁이건, 군의 정치적 동원을 거부하는 일관성을 보였던 것이다.

1979년 12·12쿠데타 때 전두환의 기습을 받고 수감된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회고록인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에 따르면, 1960년 4월 26일 아침 8시에 열린 육군 1군사령부 회의에서 '이승만이 하야하지 않으면 이종찬 육대총장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결의가 채택됐다. 그런 뒤 이종찬을 태우러 갈 경비행기가 대기됐다.

10시 20분에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지 않았으면, 그 비행기가 이종찬 쪽으로 날아갔을 수도 있다. 이 정도로 이종찬 주변에는 그를 정치로 끌어들이려는 손길이 많았다. 그런 것들을 전부 외면하고 군인의 길을 고수했으므로 참군인이란 칭송이 나온 것이다.

관심받지 못한 그의 친일 행위
 

이종찬의 모습 ⓒ wiki commons

 
이종찬의 항상 칭송받는 삶을 살았다. 해방 뒤에도 그랬고, 1945년 이전에도 그랬다. 그의 이름이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에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4권에 기재된 것도 그런 일관성 때문이다.

이종찬은 국권 상실 6년 뒤인 1916년 3월 10일 서울에서 일본 자작 이하영의 손자이자 일본 자작 이규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종찬은 친일 명문가를 3대째 이어가는 길을 걸었다. 1933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입학하고 1937년에 본과를 졸업한 뒤 공병 소위가 되어 중일전쟁(지나사변)에 뛰어들었다.

이종찬이 일선 소대장으로 참여한 부대는 전쟁 초반에 연전연승을 거뒀고 그런 활약상이 식민지 한국과 일본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1937년 11월 3일 자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은 '공병 이종찬 씨 상해에서 연전연승'이었다. 이 기사는 이종찬 소위가 "황군의 향하는 곳, 연전연승을 하게 되여 실로 유쾌하다"는 편지를 일본군 장교에게 보낸 사실도 보도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도 그의 활약상을 크게 다뤘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종찬 편은 "<매일신보> 1937년 11월 3일 자, <매일신보> 1938년 9월 13일 자 등에서 이종찬이 지나사변이 시작되자마자 참전하여 상하이 방면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이후에도 북지(北支)와 남지를 전전하며 공훈을 세웠다고 크게 보도됐다"고 설명한다. 북중국과 남중국을 전전하며 곳곳에서 공로를 세우고 있다고 칭송을 받았던 것이다.

일본은 1938년에 중위가 되고 1941년에 대위가 된 그에게 서보장과 금치훈장을 수여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군 최고의 영예인 금치훈장을 받은 일을 두고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것은 강점기를 통틀어 이종찬이 유일하다"고 말한다.

1942년에 전쟁터를 잠시 떠나 도쿄 육군포공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이번에는 태평양 지역인 뉴기니로 파견됐다. 이곳에서 소좌(소령)로 승진한 그는 일제 패망으로 인해 뉴기니에 억류됐다가 종전 이듬해인 1946년 5월에야 풀려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본 귀족이었으니, 1916년 출생 이후 그의 삶은 친일재산에 토대를 둔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1937년부터 8년간 일본군의 녹봉을 받았으니 친일재산으로 살아간 기간이 1916년부터 무려 29년간이나 된다.

이 기간에 그가 한 일은 역사상 가장 악독한 반인류 범죄인 제국주의 침략에 가담하는 일이었다. 군대를 정치에 동원하는 이승만의 명령은 대한민국 안에서 불법인 반면, 그 같은 제국주의 침략에 군대를 동원하는 히로히토 일왕(천황)의 명령은 일본 안에서 '합법'이었다.

전자는 군대를 국내 정치에 동원하는 것이고, 후자는 군대를 국제정치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불법으로, 후자는 '합법'으로 간주됐다. 후자는 일본 국내법상 합법이지만, 실제로는 전자보다 훨씬 악한 불법이었다. 한국 현대사는 이종찬이 이승만의 불법 지시를 거부한 일은 높이 평가하면서, 그보다 훨씬 더한 불법인 히로히토의 명령에 순종한 일에는 관심을 별로 두지 않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4권은 그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여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고 "중일전쟁 참전을 공적으로 인정받아 금치훈장을" 받은 사실을 근거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그가 친일파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돼 있지 않다. 위 보고서가 나온 뒤에도 그를 참군인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그가 히로히토의 왕명을 따른 행위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파'의 리더... 진정 그가 참군인일까?

군인이 유혹이나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국내 문제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칭송받을 만하다. 이와 함께 고려할 것이, 이종찬이 그런 중립을 통해 지켜 낸 시스템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종찬은 한국 군부 내에서 일본파에 속했다. 2010년 3월호 <신동아> 기사 '1962년 미 대사관 기밀문건'에 소개된 1962년 8월 17일자 주한미국대사관 보고서는 "현재 한국군의 가장 중요한 세력 집단의 중심"은 일본파라면서 이 파벌의 리더로 이종찬을 지목했다.

보고서는 "일본파는 작지만 긴밀히 짜인 선임 육군·공군 장교들로 구성"돼 있다고 한 뒤, 그들은 "일본과 이전에 맺은 긴밀한 관계를 통해 형성된 위치를 누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일본의 주장에 대해 일정하게 동의하고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군부의 중심부에 일본파가 있고, 그들이 식민지 시절에 일본과 맺은 관계를 토대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해방 뒤에도 일본의 주장에 대해 일정하게 동조하고 있다고 주한미국대사관은 평가했다. 그러면서 파벌의 중심에 이종찬이 있다고 지목했다.

이종찬이 표방한 군의 정치적 중립은 한국 국민들의 반이승만·반독재 투쟁을 고무시키는 긍정적 측면이 있었다. 동시에, 일본파 이종찬에 의해 주도되는 군부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도 기여한 면이 있다. 그의 선택은 군부가 이승만과 거리를 두도록 만드는 작용을 했다.

독립운동권에서 쫓겨난 이승만은 친일파들의 협력을 받아 대통령이 됐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는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한민당 같은 친일파 주류들과 거리를 뒀다. 국회 반민특위를 와해시켜 친일 청산을 무산시키는 일에서는 뜻을 같이하면서도, 장기집권을 위해서라면 정통 친일파들과의 대결을 불사했다.

군부 내의 일본파 리더인 이종찬이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한 일은 그런 각도에서도 조명될 필요가 있다. 그와 이승만이 완전한 한편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의 명령 거부는 이승만을 견제하고자 하는 정통 친일파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그의 역사인식이 부족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유신체제하에서 박정희에 의해 임명되는 유정회(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지낸 일은 그의 정치적 처신이 항상 옳지만은 않았다는 판단을 갖게 만든다.

한국 사회는 이종찬이 대통령에게 대들며 중립을 지킨 용감한 군인이었다는 점에 지나치게 주목한 나머지, 그가 표방한 중립이 친일파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하지 않는다. 그가 참군인이었다는 명제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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