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97년부터 약 1년간 공직을 담당했지만, 그가 공직자보다 논객에 더 어울린다는 점이 1895년부터 명확해졌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격분해 일어난 을미의병 때 격문을 작성했고, 고종이 일본의 간섭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긴 1896년 아관파천 이후에는 고종의 환궁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작성했다. 고종이 환궁한 뒤인 1897년에는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상소문의 초안을 작성했다.
결국 그는 관직이 아닌 언론으로 방향을 잡게 됐다. 1898년에 <대한황성신문>과 <황성신문>에 참여했고, 이듬해에는 <시사총보> 주필에 이어 <황성신문> 주필을 맡았다. 1900년에 광문사라는 출판사로 잠시 이적했다가 1901년에 <황성신문>으로 복귀한 그는 이듬해에는 <황성신문> 사장직까지 맡게 됐다. 언론계 진출 몇 년 만에 이 분야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로 성장한 것이다. 그런 뒤에 나온 것이 1905년 '시일야방성대곡'이다.
한국을 강점한 이후의 일본제국주의는 장지연의 그 같은 능력을 탐냈다. 일본에 저항하는 논설을 썼던 그의 능력을 역이용해 그를 식민지배 선전에 앞장세우고자 했다. <매일신보>가 그를 초빙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들인 것은 그 때문이다.
1910년 강점 이후의 <매일신보>는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일본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데 역점을 기울였다. 한국인들의 의식 구조를 일본 지배에 유리한 상태로 바꾸는 일에 분주했고 이런 일에 장지연을 끌어들인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장지연 편은 50세 때인 1914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같은 해 음력 10월경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있었다고 소개한다. 이때 장지연은 <매일신보>는 거짓이 많다고 비판하면서 스카웃 제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23일자 <매일신보> 사고(社告)에는 그가 객경(客卿)이라는 이름의 객원위원으로 초빙됐음을 알리는 내용이 실렸다.
장지연의 <매일신보> 입사는 엄밀히 말하면 장지연이 먼저 '싸인'을 보낸 결과였다. 그는 <경남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시기에 <매일신보>에 축시를 보낸 일이 있었다. 매일신보사가 윤전기를 증설했다는 소식을 듣고 1913년 7월 19일자 <매일신보>에 축시를 기고한 것이다. 그는 "매일신보도 윤전기처럼 영원히 돌고 돌아 무궁하여라"라고 찬미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인해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으로 부각된 장지연이 자신이 속한 신문사도 아닌 총독부 기관지의 윤전기 증설을 축하하며 무궁한 번영을 기원했다. <매일신보>의 스카웃 제의가 아니었어도, 그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발적 친일이 아니라고 부정하기 힘들게 만드는 장면이다.
일본 지배 열렬히 칭송
장지연이 상당히 후한 대우를 받고 <매일신보>에 합류했음을 알려주는 사실관계들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매일신보사는 조선의 문사로 알려진 장지연을 영입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라면서 <경성일보> 사장인 아베 미쓰이에와 <매일신보> 편집국장인 방태영이 영입 작전에 동원됐다고 설명한다. <매일신보> 자매지인 <경성일보>까지 장지연 스카웃에 가담했던 것이다.
또 1915년 3월 14일자 <매일신보> '기창만필'에 따르면, 장지연은 자신이 배불리 먹고 따스한 옷을 바라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베 미쓰이에의 권유를 저버릴 수 없어 합류하게 됐다고 밝혔다. '배불리 먹고 따스한 옷'이라는 표현에서 <매일신보> 측이 꽤 후한 조건을 제시했음을 느낄 수 있다.
장지연은 1918년 12월까지의 4년 동안에 700편 이상의 글을 <매일신보>에 기고했다. 이틀에 한 번 정도 글을 보낸 셈이다. <매일신보>가 제시한 후한 조건이 이런 열성을 추동케 했을 수도 있다.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장지연은 '남의 노예'가 된 사실을 비통해했다. 그런 그가 <매일신보>의 후한 대우를 기초로 친일재산을 축적하고 이를 기반으로 살아나갔던 것이다.
장지연 본인도 <매일신보>의 일원이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인용된 '위암 선생 자필수기'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입사한 것은 아베 미쓰이에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아베가 <경성일보> 사장을 그만두면 나도 <매일신보>를 그만둔다'는 조건을 제시했노라고 밝혔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이런 조건이라도 꺼내지 않고서는 <매일신보>에 들어가기가 어색했던 듯하다.
그는 <매일신보>에 들어가는 과정에서는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막상 그 일원이 된 뒤에는 '시일야방성대곡' 못지않은 글들을 쏟아냈다. <친일인명사전>에 열거된 그의 <매일신보> 논설이나 시를 살펴보면, 1905년 11월에 일본을 비판했던 그 열정으로 1914년 12월 이후에 일본 지배를 열렬히 칭송했음을 알 수 있다.
1915년 12월 26일자 '송재만필'에서 그는 한국인이 일본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합리화하면서 한국인들의 단체성 결여를 거론했다. 그는 한국인들을 "단체성 없는 인종"으로 비하하면서 "어찌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랴. 아아! 슬프도다"라고 썼다. 일본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글을 쓰면서 '시일야방성대곡'을 연상케 하는 문구를 썼던 것이다.
그달 15일자 글에서는 5년간의 식민통치로 한국인들의 삶이 개선됐다면서 '지금의 성적에 만족하지 말 것'을 총독부에 촉구했다. "위에 있는 이는 목하의 성적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욱 독칙하며 장려와 지도와 계발에 여력을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총독부의 분발을 강조했다.
자발적 친일의 전형적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