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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시간, 학교 뒷산에 가서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시를 쓰고 서로 이야기 나누고 있다.
 국어 시간, 학교 뒷산에 가서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시를 쓰고 서로 이야기 나누고 있다.
ⓒ 구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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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영이가 칠판 앞에서 두 팔을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위로 하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고, 입을 아! 벌리고 멈춰 서 있다.

"지금 이 몸짓은 무엇을 표현하는 것 같아요?"
"추워서 난로에 손 쬐고 있어요."
"방학 동안 공부 안 해서 하늘 보고 반성하나."
"첫눈?"


여기저기서 온갖 답이 나온다.

"그럼 근영이한테 직접 들어 봅시다."

나는 검지로 근영이 어깨를 살짝 눌렀다.

"겨울방학 때 강원도에 갔는데 그때 마침 눈이 와서 이렇게 손바닥을 펴고 눈을 맞았습니다."

네 사람씩 칠판 앞으로 나오게 해 방학 동안 겪은 극적인 장면을 정지 동작 하나로 표현해 보자 했다. 지윤이는 의자에 앉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같은 몸짓을 하고 있고, 승희는 바닥에 나자빠져서 다리를 움켜쥐고 있고, 수현이는 두 무릎을 바닥에 꿇고 왼손은 배 위에 대고 오른손은 가위를 쥔 채 턱을 받치고 있다.

지윤이는 방학 때 미술을 계속할 것인지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하고, 승희는 오빠가 술에 취해 밤늦게 집으로 오다 자빠져서 다리를 다쳤다고 오빠의 아픔을 대신 표현했다. 수현이는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보고 영재 엄마가 아들한테 버림받아 자살하려는 장면이 너무 가슴 아파 따라 해보았다고 한다.

지난 겨울방학 전교조 참실 발표 때 배운 교실 연극을 나도 따라 해보았다. 이 좋은 걸 이제야 알다니. 그동안 뭐 했던고 싶다. 올해는 문학 시간에 해보아야겠다. 소설을 읽고 가장 인상적인 한 장면을 정지 동작으로 표현해보게 하거나, 시를 읽고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이나 마음에 드는 표현을 몸짓으로 표현해보게 할 참이다. 아! 생각만 해도 벌써 가슴이 떨린다.

학생부종합전형인 '학종'은 달랐다

"현실은 '스카이 캐슬'보다 더 참혹, 학종 폐지해야" 이런 제목으로 어느 기자가 쓴 글(뉴스1, 2019.01.27)에 댓글들을 읽어 보니, 온통 수시 폐지하고 정시 100%로 부활시켜야 한다고 난리다. 하도 답답해서 나는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 수시(학종)가 확대되면서 일어난 변화
1) 지방 일반고 학생들 대입성적 아주 좋아짐. 특히 명문대 합격자 크게 늘어남.
2) 고등학교 수업 변화: 수능 문제 풀이식 수업 → 발표, 토론, 글쓰기, 영상 제작, 교실 연극 활동 같은 학생 활동 중심으로 바뀜.
3) 특목고, 대형입시학원, 서울강남학군은 수시 전형 비율 높아지는 것 반대함. 왜냐, 명문대 합격률이 눈에 보이게 낮아졌을 테니까.
*학종 전형이 문제가 없는 거는 아니지만 장점이 더 많음. 폐지보다 수정 보완해 나가는 게 바람직함. 이 글을 쓴 나는 현직 공립고 교사임.

이 글을 페이스북에 옮겨 놨더니, 이틀 만에 263명이 공감했고, 46명이 공유하기를 눌렀다. 학부모나 교사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 대학 입시 제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우리 대학 입시 제도는, 그 옛날 '예비고사-본고사' 시절을 빼면, 크게 세 단계로 변화를 거쳐 왔다. 이른바 '학력고사'와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과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이다.

학력고사는 그야말로 암기력 테스트였다. 교과서를 달달 외운 지식을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그런가 하면, 수능은 문제 유형 익히기다. EBS 수능 문제집을 들고 자나 깨나 문제를 풀어서 비슷한 유형으로 문제가 나오면 맞추는 훈련이다. 겉으로 보기엔 조금 발전한 듯이 보이나 내 보기엔 그게 그거다. 교육부는 암기력 측정에서 사고력 측정으로 바꾼다고 말했지만, 아이들이 외우고 푸는 교재가 교과서(자습서)에서 EBS 수능 문제집으로 바뀐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학생부종합전형인 '학종'은 달랐다. 서울대가 2014년 입시부터 교과 성적 말고도 전공 적합성, 숨은 잠재력, 인성 같은 것을 보고 학생을 뽑겠다고 선언했다. 인성을 무슨 재주로 평가한단 말인가? 하면서 교사들은 모두 긴가민가했다.

모든 교사가 뒷짐 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 싶다. 자사고, 외국어고, 과학고, 국제고 같은 특목고는 이게 웬 떡이야! 하면서 반겼다. 그리고 발 빠르게 준비했다. 과거 명문(?) 사학들은 곧바로 자사고로 학교를 바꾸기도 했다. 이 무렵 전국에 자사고가 크게 늘었다. 2013년 전국에 26개이던 자사고가 2016년 49개로 늘었다.

정시 늘려서 수능 시절로 돌아가자는 학부모들
   
자율동아리 활동으로 독서 발표와 토론을 하고 있다.
 자율동아리 활동으로 독서 발표와 토론을 하고 있다.
ⓒ 구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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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고가 크게 늘어나면서 고등학교 지형 변화도 함께 일어났다. 자사고는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고, 일반고는 우수한 아이들 다 빼앗겼다고 투덜댔다. 신문은 이 판도 변화를 무시한 채, 단순히 서울대 합격자 수만 따져서, '학종' 이후 특목고의 서울대 합격자 수가 대폭 증가(2006년 18.8%→2016년 46.6%)했다고 보도했고, 지금도 그 보도를 우려먹고 있다.

특목고는 우수한 아이들만 모여 있어 내신 성적에서 일반고 학생들에게 크게 불리했는데 구세주를 만났던 것이다. 그 결과 일반고 입시 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그 무렵 일반고에서 근무해본 교사는 누구나 느끼는 바였다. 나도 학종은 부잣집 아이들을 위한 기득권 세력의 횡포라고 생각했다.

일반고 교사들도 마냥 뒷짐 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름난 대학 합격자 수를 신문에 발표하면, 그 화살은 지역 교육청으로, 학교로, 또 교사들에게로 날아들었다. 일반고도 크게 바뀌었다. 개방형자율학교, 자율형공립고, 혁신학교 같은 시범학교를 운영하면서 몇몇 학교가 앞서가고, 나머지 학교들은 앞서가는 학교를 보고 배웠다.

학교마다 초청 강연, 토론대회, 이야기대회 같은 교과 밖 활동이 크게 늘어났고, 아이들 스스로 자율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다. 교육청도 방학 때마다 서머스쿨, 윈터스쿨 같은 학교밖학교를 열어 학생들이 학생부에 쓸 거리를 마련해 주었다.

무엇보다 고등학교 교실이 바뀌었다. 죽으나 사나 수능 문제 풀이만 하던 교실이 조금씩 바뀌었다. 글쓰기, 토론, 발표, 영상 제작, 교실 연극 같은 학생 스스로 하는 활동으로 바뀐 것이다. 학생이 선생님이 되어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역사 사건 한 장면을 짧은 연극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고3 교실에서도 자라온 이야기 쓰기나 시 쓰기를 한다. 그전에는 이런 활동을 할라치면 눈치가 보였지만, 이제는 그러면 수업 잘하는 교사로 인정받는다. 위에 보인 교실 연극도 참 재미나고 살아 있는 교실 모습이다.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수능 문제 풀이만 해서는 교사가 학생부(학교생활기록부)에 써 줄 말이 없고, 아이들도 자소서(자기소개서)에 쓸 이야기가 없다.

이러면서 일반고 아이들 대학 입시 성적이 눈에 보이게 좋아졌다. 온 나라 고등학교를 두루 다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있는 학교나 이웃 학교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학부모들은 정시를 늘려서 수능 시절로 돌아가자고 한다. 거기에는 신문 방송도 한몫하지 싶고, 거기다 정답 빼돌리기 사건이나 <스카이 캐슬> 같은 드라마도 학부모의 불안한 마음을 부추기지 싶다.

잠자던 고등학교 교실이 깨어나고 있다
     
정말로 수능 시절로 돌아가면 일반고가 특목고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수능 시절로 돌아가도 일반고는 특목고에 더욱 밀릴 게 뻔하다. 앞서 말했지만, 이미 고등학교 판도 변화가 일어나서 일반고가 그 옛날 명문 일반고가 아니다.

특목고란, 특정 교과에 우수한 학생을 뽑아 그 재능을 기르겠다는 고등학교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본뜻과 달리 이름난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고등학교로 탈바꿈했다. 나는 우리 대학 서열을 무너뜨리고, 본뜻에 벗어난 특목고를 없애는 게 답이라고 생각한다. 학생 한 명꼴로 국가가 지원하는 돈은 일반고 학생보다 특목고 학생이 많게는 몇십 배까지 쓰고 있다.

좀 지난 자료이긴 하나, 2008년 인문계교와 특목고 지원 예산을 분석한 <전북일보> 자료에 따르면 학생 1인당 지원금이 서울 국제고는 1890만 10원으로, 서울 지역 인문계고 58만 1620원보다 32배 많았고, 인천 국제고는 710만 3200원으로, 인천 지역 인문계고 46만 9550원보다 15배가 많았다.

그렇게 많은 나랏돈을 쓰고도 외국어고나 과학고를 졸업한 학생이 의과대학을 진학했다. 서울 과학고는 2013년 졸업생 114명 중 25명이 의대에 진학했다(뉴스에듀신문). 그렇다면 특목고에 지원하는 돈을 끊든지, 아예 그 길을 못 가게 막든지, 학교를 없애든지 해야 할 게 아닌가.

정답을 맞히려고 똑같은 문제를 끝없이 풀고 또 푸는 수능 공부는 앞으로 펼쳐질 4차 인류 문명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가는 일이고, 또 우리 아이들도 더 이상 할 짓이 못 된다. 학종 탄생 배경이 깨끗했는지는 지금도 의심스럽다. 정말로 우리 교육을 걱정해서 입시 제도를 바꾸었는지, 특목고 아이들을 위한 특혜였는지.

고전 영웅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비정상으로 출생하여 어려서 온갖 어려움을 겪고 위기에 빠지지만, 뜻밖에 은인을 만나 위기를 벗어난다. 그러고는 스스로 힘을 길러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다. 학종이 설령 비정상으로 탄생하였다고 하더라도, 또 몇몇 문제점도 보이지만, 우리 교육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도 사실이다.

방과 후와 방학 때 하는 보충수업과 아이들을 밤늦게까지 강제로 잡아두던 야간자율학습이 무너졌다.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지만 참여 학생이 크게 줄었다. 방과 후 밤늦게 학원 가는 아이도 줄었다. 무엇보다 잠자던 고등학교 교실이 깨어나고 있다. 교사 노릇 30년에 이런 교실 변화는 처음이다. 교실 연극으로 공부하는 아이들! 이게 꿈이 아니고 현실이다.

태그:#학종, #스카이 캐슬, #고등학교, #교실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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