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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지연 산책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삼지연초대소를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산책을 하며 대화하고 있다.
▲ 삼지연 산책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월 20일 삼지연초대소를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산책을 하며 대화하고 있다.
ⓒ 평양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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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서울 답방 문제로 우리 정부가 부심하고 있다. 12월 1일 미중 정상회담 직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월이나 2월에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것 같다"고 말해 기대감을 높인 상황에서, 4일 문재인 대통령이 뉴질랜드 총리와의 정상회담 뒤에 "김정은 위원장의 연내 답방이 가능하지만, 시기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연내 답방이든 아니든, 서울 답방이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난 2000년 6월 이후에도 우리 정부는 김정일 답방 문제로 애를 태웠다. 6·15 선언 1주년인 2001년 그날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이산가족 박연진씨, 법륜 스님, 김성수 대한성공회 대주교 등과 함께한 자리에서까지 김정일의 서울 답방을 촉구했다. 이 상황이 그해 6월 16일자 <매일경제>에 이렇게 소개돼 있다.
 
"특히 김 대통령은 '정상회담 정례화는 아주 중요하고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면서 '김 위원장은 와야 하고, 올해에 와야 한다'고 강조해, 김 위원장 연내 답방에 이어 내년에 평양 재방문을 추진할 뜻을 밝혔다."
 
김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와야 하고, 올해에 와야 한다"고 힘을 주어 말했다. 당시에도 '연내 답방' 때문에 무척이나 속을 태웠음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을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지금은 북미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우호적일 뿐 아니라, 양국 정상이 이미 싱가포르에서 한 차례 만남을 가졌다. 남한에 대한 북한의 태도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북미관계가 이처럼 양호하므로, 2018년을 2000년 무렵과 수평선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김정일 답방은 왜 실패했나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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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북한 지도자의 서울 방문에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공통 요인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한 번으로 그칠 일이 아니라, 앞으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이뤄져야 할 일이다. 그런 환경을 구축하려면, 그 두 가지가 김정일의 서울 답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6·15 공동선언 이후 한동안, 북미관계도 꽤 양호했다. 그해 10월 12일의 '북미 코뮤니케'가 그것을 증명한다. 열 살 무렵인 1938년경부터 김일성 부대의 전령으로 활약했으며 70세 때인 1998년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된 '빨치산 1세대' 조명록 인민군 차수가, 김정일의 '전령'으로 워싱턴에 날아가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합의한 사항이 북미 코뮤니케다.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청산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담은 이 공동성명에서는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5대 원칙이 천명됐다. 적대관계 청산, 상호 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 상호 경제협력, 미국의 한반도 통일 지지였다. 북한 최고위급 특사가 워싱턴에까지 들어가서 북미수교 5대 원칙을 도출했으니, 김정일의 서울 답방을 충분히 기대할 볼 만했다.
 
 조명록과 클린턴.
 조명록과 클린턴.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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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명수의 워싱턴 방문 한 달 뒤에 불안한 징후가 나타났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강경파인 공화당의 조지 부시가 민주당 후보인 앨 고어 부통령을 누르고 당선됐다. 김정일의 서울 답방 문제에 커졌던 청신호에 빨간 줄이 한 줄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미국 시각으로 11월 30일 아버지(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잃은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 그 당시 북미관계를 파탄내는 악역을 담당했다. 북미 코뮤니케를 뒤집고 대북 강경정책을 강화했다. 제1차 북·미 핵위기를 봉합한 1994년 제네바 합의마저 무시했다. 제네바 합의 이후의 소강 상태를 흔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거기다가 전지구적 미사일 방어망인 MD 계획까지 추진했다. 그런 조지 부시를 보면서 북한은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2001년에 역대 최고조로 반미 열기가 달아올랐다. 김정일의 서울 답방을 가능케 하는 첫째 요인인 북·미 우호관계가 요원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단법인 북한연구소가 발행하는 <북한> 2001년 8월호에 실린 정운종 시사문제연구소장의 '김정일 답방 왜 늦어지나?'는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은 스스로 6·25 전쟁을 일으킨 매년 6월 25일을 '미제반대투쟁의 날'로 정하고 있는데, 작년과 달리 올해는 매우 적극적인 반미 캠페인을 벌였다. 이미 6월 20일부터 각종 성토 모임과 기자회견이 이어졌고, 6월 24일에는 당·정·군 고위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린 뒤, 1992년 이후 중단되어 온 대규모 반미시위 행진까지 벌였다."
 
부시 행정부의 강경책에 맞서 북한 역시 투쟁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으니, 김대중 대통령이 열렬히 촉구한 서울 답방이 쉽게 실현되기는 불가능했다. 북한으로서는, 북미관계가 악화되는 속에서 서울 답방을 통해 얻을 게 별로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북한의 의중을, 그 해 6월 15일자 <아사히 신문>이 약간 꼬집는 듯한 태도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북한은 남북관계를 인질로 해서 한국을 궁지에 몰아넣고, 미국한테는 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하려 했는지 모른다"며 미국을 의식하면서 남북관계 수위를 조절하는 북한의 태도를 지적했다.

그런 뒤 "북한이 발상을 바꿔, 남북대화에 적극 나선다면 부시 행정부의 생각이 바뀔 수 있으며, 바로 그것이 남북관계를 호전시키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신문은 말했다. 남북대화에 적극 나서는 방법으로 북미관계를 개선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북한의 입장을 이런 식으로 보도했던 것이다.

갓 취임한 조지 부시는 너무도 기세등등했다. 김정일뿐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한테도 존중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2001년 3월 한미정상회담 직후에는 김 대통령을 This man('이 양반' 정도)으로 불렀다. 이후 한국 대통령이 무기력한 모습 때문에도, 북한이 미군 영향권인 남한에 자국 지도자를 보내는 모험을 감수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뒤로 9·11테러와 이라크전쟁 등이 발생해 미국의 강경 모드가 이어졌으므로 김정일의 서울 답방은 그렇게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좌절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는 조지 부시 대통령.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는 조지 부시 대통령.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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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정일 답방 불발이 오로지 미국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미관계가 최대 요인이었지만, 그것이 유일한 요인은 아니었다. 앞에서 "지금이나 그때나, 북한 지도자의 서울 방문에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공통 요인이 있다"고 했다. 북미관계에 이은 두 번째 요인은 남한 정부의 의지와 역량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이 점도 서울 답방을 결정하는 요인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북한의 최대 현안은 북미관계와 더불어 경제 문제다. 이 두 가지는 어찌 보면 한 가지 문제다. 북한이 북미관계 정상화에 집착하는 것은, 한국전쟁 이후 계속되는 경제 봉쇄를 풀기 위해서다. 이 봉쇄를 풀지 않으면, 동아시아에서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로, 동아시아에서 말라카해협 및 인도양을 거쳐 유럽과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다. 바닷길이 세계 교역을 좌우하는 시대에 북한 무역선이 바닷길을 마음대로 다니는 방법은 미국의 봉쇄를 푸는 것뿐이다.

이처럼 북한이 경제 문제에 목숨을 걸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한국 정부가 남북경제협력의 비전을 좀 더 확실히 보여줬다면, 김정일의 서울 답방이 좀 더 가시권에 다가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미국 및 보수진영과의 갈등을 각오하고서라도 남북경협을 과감히 추진했다면, 서울에 오고 싶어하는 강렬한 열망이 북한 지도부 내에 생겼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시 우리 정부의 문제점이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2001년 7월호 월간 <말>에 기고한 '누가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로막는가'에도 언급됐다. 강 교수는 "뭐니 뭐니 해도 남북정상회담을 가로막는 제1의 훼방꾼은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라고 하면서도, 김대중 정부한테도 문제점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가 김정일의 답방을 열심히 촉구하기는 하지만, 답방을 가능케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는 무기력하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그렇게 절실히 남북협력의 중점 사업으로 설정했던 전력지원 문제는 남한 내 냉전 수구세력에 의해 발목이 잡히고, 다시 미국에 의해 결정적인 제동이 걸렸다. 남북협력으로 경제를 복구, 장기적 경제 생존권을 확보한다는 북의 청사진이 심대한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남한이 미국이라는 외세에 대해 어느 정도 자주성을 가지고 남북공조를 통해 이 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이 있다면, 북한도 기꺼이 조기 정상회담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미정상회담 이후 남한의 무기력함은 이를 기대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남한 내부 사정 또한 우호적이지 않다. 김대중 정부의 인기도는 바닥에 떨어져 벌써 권력 누수현상이 나타나고, 대북 적대정책을 공공연히 표명하는 주류 언론과 야당이 미국의 적대정책에 부화뇌동하여 더욱 기승을 떨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오랜 시련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한 훌륭한 인격자이지만, 그의 정부는 아들 부시한테 'This man' 소리를 들은 뒤로 현저하게 과감성을 잃었다. 북한 입장에서는 그런 한국 정부가 미국과 보수진영의 훼방을 물리치고 남북경협을 끝까지 추진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지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에 더해, 김대중 정부의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가 김정일 답방을 막은, 부차적이지만 또 다른 요인이었던 것이다.

지금 상황은 그때보다 훨씬 호전돼 있다. 김정은을 로켓맨으로 불렀던 트럼프도 '알고 보니 괜찮은 사람'이라며 태도를 바꿨다. 문재인 대통령도 국제사회를 상대로 분위기 조성에 힘쓰고 있다. 그래서 북한 지도자의 서울 답방 가능성이 2000년 무렵보다는 훨씬 높아져 있다.

하지만 서울 답방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김대중 대통령의 바람처럼 정례화되려면, 그렇게 해서 한반도가 안정되고 한국 경제의 신뢰도가 높아지려면, 그 두 가지 요건에 모두 다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북미관계가 악화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에 너무 의존하는 나라로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지긋지긋한 대미 사대주의의 잔재를 말끔히 지워버리고 우리 스스로의 필요와 의지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것이다.

트럼프가 고래고래 고함치며 서울에서의 남북정상회담을 반대한다 할지라도 이에 개의치 않고 남북협력을 밀어붙일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매번 북한은 서울 답방을 앞두고 오랜 저울질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북관계 진전도 지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힘쓰며 가는 게 아니라 즐겁고 편안하게 남북정상회담을 기다릴 수 있으려면, 미국과 보수진영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기 입장과 자기 역량에 의존하는 당당한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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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