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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중국은 북한을 월등히 능가하는 입장에 있지만, 1960년대 전반의 '중공'은 지금의 북한만큼이나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영국 및 미국 경제를 따라잡겠다며 1958년에 개시한 대약진 운동이 4년 만에 실패로 끝나면서, 최소 2200만, 최대 4000만 이상의 중국인이 굶은 채로 숨을 거뒀다.

중국이 무척 어려웠다는 점은, 대만(타이완) 장제스(장개석) 정권이 대륙 수복을 추진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장제스는 중국 침공을 목적으로 군대 동원까지 추진했다. 하지만 미국이 제지했다. 대약진 실패 뒤의 중국은 영토 크기를 무색케 할 만큼 그렇게 힘겨운 상황이었다.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당시의 북한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중국 핵 개발 추진과 미국의 묵인 

생산량 달성을 위해 야간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대약진 운동 당시의 중국 노동자들.
 생산량 달성을 위해 야간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대약진 운동 당시의 중국 노동자들.
ⓒ 위키백과 중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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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태에서 중국은 핵개발을 추진했다.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된 일이다. 인류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규모 아사 사태를 기록하면서도 핵개발을 추진하는 중국. 그런 중국을 가장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나라는 미국이었다.

1961년 대통령에 취임한 존 에프 케네디가 특히 그랬다. 케네디가 중국 핵개발을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관해, 2011년 <미국사 연구> 제33권에 실린 김정배의 '케네디 행정부의 중국정책 그리고 냉전체제'는 "(케네디가 중국과 관련해) 크게 우려했던 문제는 중국의 핵무기 개발이었다"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중국의 핵실험은 중국의 팽창 의도와 능력에 더하여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1960년대의 최악의 사건이 될 것'이라고 케네디는 판단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 핵무기를 우려하는 것 이상으로 케네디 행정부는 중국 핵무기를 염려했다. 중국의 핵 보유가 1960년대 최악의 사건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 그런 인식이 표출된 것. 그에 기초해 케네디 행정부는 기존의 대(對)중국 경제제재를 이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다음과 같은 견제 조치들을 검토했다. 위 논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미국이 소련과 공동으로 (혹은 소련의 묵인 하에) 중국의 핵무기 보유를 막기 위해 고려한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핵실험 금지조약 체결이고, 다른 하나는 핵시설에 대한 예방적 혹은 선제타격이었다."

케네디 행정부는 기존의 경제제재에 더해, 외교적 압박(국제적인 핵실험 금지조약 체결)과 핵시설 선제공격까지 검토했다. 처음에는 두 카드 중에서 후자 쪽에 무게가 실렸다. "케네디는 처음에는 핵실험 금지조약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었다"고 논문은 말한다. 핵시설 선제공격 쪽에 기울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전자를 택했다. 1963년, 소련·영국과 함께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중국의 핵실험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다.

중국의 핵 무장을 막고자 선제타격까지 고려했던 미국이다. 그랬던 미국이, 중국이 막상 핵실험에 성공하자 태도가 바뀌었다. 중국이 1964년 10월 6일 원자폭탄 실험을 하고 1967년 6월 17일 수소폭탄 실험을 하면서 핵 보유국의 위상을 굳혀가자, 미국은 이를 국제법적으로 공인해주는 조치까지 취했다.

중국 원자폭탄의 모형.
 중국 원자폭탄의 모형.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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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969년 6월 12일 유엔 총회를 통과한 핵확산금지조약(NPT) 제9조 제3항을 통해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 보유에 성공한 국가'를 합법적 핵 보유국으로 인정했다. 미국·소련·영국·프랑스에 더해 중국까지 합법적 핵 보유국으로 인정한 것이다.   

미국의 '호의'는 그치지 않았다. 1971년 10월 25일에는 대만이 보유한 '유엔에서의 중국 대표권'과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중국에 넘겨줬다. 전통적인 동맹국을 버리고 핵보유국을 지원한 것이다. 베트남전쟁 여파로 중국의 지원 없이는 아시아 패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절박한 사정이 미국을 이런 상황으로 이끈 핵심 요인이다.

미국의 호의가 계속되는 상태에서 1972년에는 경천동지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해 2월 28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한 것이다. 닉슨은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는 물론이고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모택동)과도 만났다. 중미 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이다.

당시의 미국은 '한국전쟁' 하면 북한 못지않게 중국도 떠올렸다. 중국의 개입으로 세계 최강 미군은 남쪽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북한 못지않게 중국을 싫어했던 미국이, 또 중국의 핵 보유를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미국이 중국과 정상회담까지 갖게 된 것이다. 

닉슨의 중국 방문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가는, 베이징에 도착한 뒤에도 마오쩌둥이 닉슨을 만나줄지 말지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중국 최고지도자와의 만남이 확실치도 않은 상황에서 닉슨이 비행기에 올라탔던 것이다.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가 발행하는 <한국정치연구> 제23권 제2호에 실린 마상윤의 '적에서 암묵적 동맹으로: 데탕트 초기 미국의 중국 접근'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실, 마오와의 만남이 확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닉슨은 정상 간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심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사전 약속이 없던 상태에서 외국 지도자를 불시에 불러들여 만나는 방식은, 마치 과거에 외국 사절이 중국 황제를 알현하는 것과 비슷하였다."

닉슨 대통령과 저우언라이 총리.
 닉슨 대통령과 저우언라이 총리.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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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후의 상황 전개는 상대적으로 더뎠다. 양국의 수교는 7년 뒤인 1979년 1월 1일에야 성사됐다. 관계 개선에 열의를 갖고 있던 닉슨이 1974년에 사임하면서, 수교 추진을 위한 동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거기다가 '하나의 중국' 문제도 걸림돌이 되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미국이 따라줄 것을 요구했다. 대만과의 국교도 단절하고 동맹조약도 파기하고 미군도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대만과의 기존 관계 때문에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에 소련의 팽창이 가속화되자 양국은 수교를 서둘렀다. 이것이 1979년 국교 수립으로 이어졌다.

트럼프와 김정은 정상회담의 의미

5월 안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1972년 닉슨의 방중만큼이나 세계를 놀라게 하는 일이다. 회담이 성과를 거두면, 1970년대의 중국과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북한과 미국도 수교를 향해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수교로 가는 동안에 숱한 변수들이 작용하겠지만, 1970년대의 중국과 비교할 때 북한은 한 가지 변수에서는 중국보다 불리하고 한 가지 변수에서는 유리하며, 한 가지 변수에서는 애매한 처지에 놓여 있다. 어느 변수가 더 큰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북미수교가 중미수교보다 느려질 수도, 빨라질 수도, 아니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1972년 정상회담 당시, 중국은 핵문제를 이미 털어버린 뒤였다. 미국이 더 이상 중국의 핵 보유를 문제 삼지 않는 상황에서 양국 정상이 만났던 것이다. 정상회담 전에 특사 자격으로 베이징을 비밀 방문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중국 측에 제시한 회담 의제에 핵문제는 없었다. 위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키신저는 7개의 회담 주제를 제시하였다. 이는 대만 문제, 인도차이나 문제, 소련·일본 등 주요국과의 관계, 남아시아 문제, 양국 간 연락채널 확보, 군비통제 그리고 기타 중국이 원하는 주제였다."

하지만 김정은은 트럼프 면전에서 핵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김정은은 한반도 비핵화나 세계 비핵화를 주장하고, 트럼프는 북한 비핵화를 주장하고 있다. 접점을 찾지 못하면 대화 국면이 깨질 수도 있다. 핵 보유를 공인받지 못한 상태에서 정상회담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 김정은은 마오쩌둥보다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북미수교는 북한의 의도와 달리 늦어지거나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중국이 1972년까지는 중미관계를 신속히 진전시키고도 정작 수교를 빨리 성사시키지 못한 핵심 요인 중 하나는 '하나의 중국' 문제에 있었다. 이 점에서 북한은 중국보다 불리하지 않다. '하나의 코리아' 문제가 북미 정상회담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홍준표 같은 수구세력이 청와대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날이 오지 않는 한 그렇다. 

1970년대의 대만 정부와 달리, 지금의 한국 정부는 북미수교를 열심히 중재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이 한국 눈치를 보는 일로 회담이 난항을 겪을 가능성은 낮다. 이 점에서는 김정은은 마오쩌둥보다 유리하다.

1972년 이후로 중국이 수교 문제를 빨리 진척시키지 못한 결정적 요인은 닉슨 사임이란 변수였다. 물론 트럼프도 어느 정도는 불안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재임 중에 북미관계를 마무리하지 못하거나, 지지율이 상상 이하로 추락해 국정 운영의 동력을 상실하거나, 혹은 재선에 실패할 수도 있다. 트럼프는 강력한 대통령이 되고자 하지만 불안 요소가 내재돼 있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트럼프는 닉슨처럼 사임해야 할 상황까지 내몰린다고 예단하기는 힘들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 변수'는 북한한테 불리하다고도 유리하다고도 보기 힘들다. 그래서 애매한 변수다. 그러므로 북한 입장에서는 트럼프 변수가 닉슨 변수처럼 되지 않도록 기원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또다른 변수도 있다. 트럼프 지지율이 상승하면 남한이 통상문제나 주한미군 분담금 문제 등에서 미국의 압력에 더욱더 노골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모순까지 동시에 해결하면서 한미관계·북미관계에 대처해야 한다는 점에서, 남과북이 가야 할 길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라 할 수 있다. 


태그:#북미 정상회담, #미북 정상회담, #중미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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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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