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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요즘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한때 남자들은 역사 속 모든 위대한 업적은 모두 남자들이 쌓아 올렸으니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말을 하곤 했다. 실제로 시중에 출판되는 대부분의 위인전에는 남성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남성이 여성보다 원래 출중한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는 사회적 토대 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다.

말하자면 착시 현상인 셈이다. 또한 여성은 재능이 있어도 시대에 묻히거나 혹은 옆에 있는 남성 때문에 빛이 바래길 반복한다. 대표적인 예가 실비아 플라스다. 재능있는 문학인이었던 그녀는 결혼 후 가사와 육아 탓에 제대로 글쓰기에 전념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자살의 연구>로 유명했던 알프레드 알바레즈가 '실비아는 시인으로서의 존재는 지워져 젊은 엄마와 가정주부의 자리로 물러앉은 듯 보였다'고 썼을까.

이후의 전개는 모두 알다시피다. 테드 휴즈는 그런 실비아를 버렸고, 자녀들과 남겨진 그녀는 뒤늦게 재능을 꽃피우지만 우울증과 생활고 속에서 결국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이런 인물이 실비아 플라스 뿐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잉에 슈테판은 자신의 책 <남과 여에 관한 우울하고 슬픈 결론>에서 비슷한 삶을 살다간 역사 속 여성들을 다룬다(베를린 훔볼트 대학 문예학과 교수인 저자의 유명한 책 <유명한 남자의 그늘에 가려진 재능있는 여자의 운명>의 번역본이다). 그러니까 제목과 달리 이 책에서 '우울하고 슬픈 결론'을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여성들인 것이다.

그들의 남편이 누구인지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 남자들은 자신의 성(姓)만으로도 이름을 자동적으로 연상시킬만큼 유명세와 명성을 누렸기 때문이다. 가령 이 책이 다루는 인물 중 하나인 밀레바 마리치 아인슈타인만 봐도 그렇다. 누구인지 딱 떠오르지 않는가.

왜 '우울하고 슬픈 결론'은 항상 여성의 것인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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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용만 들으면 작정하고 '불행한 여성들'의 역사를 골라서 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저자는 책의 후기에서 좌절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고자 한 것이 아니라, 남성 파트너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기 재능을 발현시킨 여성들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이 애초의 목표였다고 전한다.

실제로 이 책에 등장하는 남성 파트너들은 문학·과학·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들이 보인 재능에 반해 구애하고, 결혼 생활 속에서도 독자적으로 재능을 발휘하거나 혹은 동등한 협업관계를 맺을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잉에 슈테판의 의도는 그 다음부터 꼬인다. 자신이 공언한 바를 지킨 남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즉 저자가 찾고자 한 성공 사례가 없었다.

이들은 어쩌다, 어떻게 망했을까. 책에 수록된 여러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의 경우로 수렴된다. 첫째, 남성에게 재능과 능력만 착취 당하고 결국 그의 '아내·연인'으로만 남게 된 여성들의 경우. 일기·편지에 쓰인 문장들을 (그것도 수정 없이 그대로) 도둑맞고, 번뜩이는 영감을 제공했지만 결국 피츠제럴드 부인으로만 남게 된 첼다 자이레 피츠제럴드의 사례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최악은 밀레바 마리치 아인슈타인의 사례다. 그녀는 남편의 연구 파트너로서,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수학적으로 체계화 시켰다. 하지만 아이들을 출산하며 육아를 위해 연구 활동을 단념했는데, 이후 알버트는 그녀와 이혼했고 밀레바는 비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종속되거나 혹은 파멸하거나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여성들이 남성들의 옆에 남아있지 않았으면 되지 않았을까. 이들이 그렇게 재능이 뛰어나다면, 흔히 말하듯 남성들에게 의존할 게 아니라 독립적인 삶을 추구했으면 될 일이지 않을까. 물론 그런 길을 선택한 인물도 있었다. 이들이 바로 두 번째의 경우인데, 불행히 여기서도 낙관적인 사례는 별로 없었다.

가령 클라라 베스트호프 릴케의 경우, 그녀는 조각가로서 자신을 찾기 위해 이혼을 감행하지만, 이미 그때는 창작력이 왕성하던 시기가 지난 후였다. 카미유 클로델은 창조적 영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로댕을 떠났지만, 당대는 조각가로는커녕 어떤 방식으로도 여성이 자립할 수 없는 사회였다. 결국 그녀는 로댕이 자신을 방해한다는 망상에 시달리다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유폐되었다.

아마 샤롯테 베렌트 코린트가 비교적 낙관적인 결말을 맞이한 사례일 것이다. 그녀는 비교적 자신의 커리어를 안정적으로 이어나가지만, 이 경우는 저자가 인정하듯 그녀의 남편이 일찍 사망하는 특별한 운(?)이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11명의 여성들이 겪은 비극을 조망함과 동시에 가부장제와 성역할이 어떻게 여성들을 옭아매는가를 훌륭히 고발한다.

책에 등장한 인물들은, 가정에 남았을 경우 훌륭한 어머니이자 가사노동자로 혹은 남편의 보조자로 남아 있기를 요구받았다. 하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경우 여성으로선 자립이 불가능한 사회구조를 마주했다. 결국 단 두 가지의 선택지만이 이들 앞에 존재한 셈이다. 종속되거나 혹은 파멸하거나.

해방되어야 할 여자란 없다, 남자들이 성숙되어야 한다

단지 옛날 이야기일까? 정도만 다를 뿐 현대의 사회 역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은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2017년 기준 여성의 임금은 남성에 비해 64%에 불과하다.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40%로 남성의 25%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보여 주었다. 배우자가 있는 남성의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50분인 반면 같은 조건의 여성은 4시간 19분에 달했다.

여기에 공고한 유리 천장으로 인해 대다수의 분야에서 여성 고위직 진출 비율은 한 자리수를 넘지 못한다. 말하자면 한국은 여성이 자립을 하기도, 제대로 일을 하기도, 공정하게 성과를 평가 받기도 매우 어려움과 동시에 공고한 성역할에 따른 이중 노동에 시달리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까미유 끌로델이 이 나라에서 환생을 해도 결과가 뭐가 그리 다를까 싶다.

나는 같은 문제를 다룬 글을 쓸 때, 그러니 이제는 우리 사회의 성역할과 성차별이 사라져야 한다고 끝을 맺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말하는 게 지겹다. <남과 여에 관한 우울하고 슬픈 결론>에 등장한 여성들의 삶은 주변의 남자들 때문에 망했다. 그러니까 같은 비극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면 남성들이 변하면 된다. 아마 책에 등장한 남성들은 자신이 한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구스타프 말러 같은 남성이 '당신의 직업은 단 하나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하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는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행동하는 대로 생각하지 못해서 발생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자신의 착취, 부당이득 취득, 책임 방기를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이를 상식이나 합리적인 역할 분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성의 가능성을 가로 막는다.

오랫동안 인용을 고민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가장 정확하게 작금의 현실의 겨냥한 문장이 책에 등장한다. 샤롯데 베렌트 코린트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해방되어야 할 여자란 없다. 바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남자들이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슬픈 것은 그녀가 이 말을 한 지 수세기가 흘렀지만, 아직도 이 간단한 해결책을 남성들이 수행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남과 여에 관한 우울하고 슬픈 결론

잉에 슈테판 지음, 새로운사람들(1996)


태그:#남과 여에 관한 우울하고 슬픈 결론, #성역할, #성평등, #여성주의, #가사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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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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