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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광주광역시 등 일부 지역에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16일 오후 여의도 도로에 지열로 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올해 서울 지역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다. 2017.6.16
 서울과 광주광역시 등 일부 지역에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16일 오후 여의도 도로에 지열로 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올해 서울 지역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다. 2017.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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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미쳤어요. 광주가 대구를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수업 중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해대던 아이가 에어컨을 틀어달라며 건넨 하소연이다. 사실 아이들의 '에어컨 타령'은 지난 5월 중순부터 입에 달고 살았던 레퍼토리다. 지천에 핀 봄꽃이 지기도 전에 찾아온 때 이른 더위가 '계절의 여왕'이라는 봄을 즐길 여유조차 그들에게서 앗아갔다. 봄이 통째로 사라진 셈이다.

한여름에만 켠다는 에어컨 가동 매뉴얼은 융통성이 없고, 종일 제 몸을 덥히며 돌아가는 벽걸이 선풍기에선 더운 바람만 인다. 아이들은 자구책으로 부채와 얼음물을 챙겨오는가 하면, 손바닥만 한 충전식 선풍기를 구입해 들고 다니는 게 유행이 됐다. 체육시간이나 점심시간 직후엔 진동하는 땀 냄새 때문에 교실이 가스실 같다.

요즘 아이들에겐 선크림도 필수품이다. 선크림이 여학생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갔다. '내 피부는 소중하다'며 체육 시간을 앞둔 쉬는 시간에 거울 앞에서 하얀 가면을 쓰듯 선크림을 발라대는 남자 아이들의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불과 한두 해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지만, 수선스럽다고 나무랄 일은 결코 아니다.

올해의 햇볕은 예년과 확연히 다른 듯하다. 운동장에서 불과 1시간을 뛰었을 뿐인데, 목덜미가 따끔거린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시간표가 모두 체육시간으로 채워졌으면 좋겠다던 아이들조차 햇볕이 따갑다 못해 아프다며 교실 밖에 나가기가 꺼려진다고 했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늦봄의 교실 풍경이다.

아이들 교복 차림에도 변화가 생겼다. 봄과 가을에 입던 춘추복이 이제 필요 없어진 듯하다. 지역과 학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4월 말부터 두 달 정도는 간절기 복장으로 춘추복을 입는데, 올 들어서는 두툼한 재킷을 벗자마자 곧장 반팔 차림의 하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덥다며 규정을 어긴 채 민소매 차림을 한 아이들도 흔하다.

아직 장마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폭염을 주의하라는 긴급재난문자가 하루가 멀다고 날아들고 있다. 지난 5월 말부터 낮 최고기온이 섭씨 30도를 시나브로 넘기더니 6월 들어선 단 하루도 예외 없는 일상이 됐다. 예년 같으면 한여름 날씨를 한두 달 앞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오랜 가뭄 탓에 습하지 않아 그늘에선 견딜만하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급기야 지난 6월 17일 오전 11시를 기해 폭염 경보까지 내려졌고, 이틀째 지속됐다. 낮 최고 기온이 섭씨 35도를 넘어설 것이라는데, 연일 6월의 최고 기록을 갈아치울 듯하다. 기상청은 맑은 날씨가 계속된 데다 강한 일사가 더해지며 내륙 지방을 중심으로 기온이 크게 치솟았다고 설명했다.

폭염 이어지는 광주... 이건 '광프리카' 수준

광주에 폭염경보가 발효된 18일 오후 광주-KIA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프로야구경기를 보기 위해 무더위에도 관중들이 몰려들고 있다. 경기장 관계자가 그라운드에 물을 뿌리고 있다. 2017.6.18
 광주에 폭염경보가 발효된 18일 오후 광주-KIA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프로야구경기를 보기 위해 무더위에도 관중들이 몰려들고 있다. 경기장 관계자가 그라운드에 물을 뿌리고 있다. 2017.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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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올해엔 유독 광주의 낮 기온이 주목을 끌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극서지인 대구의 한낮 기온을 가뿐히 넘어서는 때도 있다. 예년 같으면 적어도 3~4℃ 이상 차이가 날 만큼, 대구에 견줘 광주의 여름은 '선선했다.' 더위에 익숙해진 대구 사람들에게는 광주는 '피서지'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엔 달라졌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광프리카(광주+아프리카)'라는 말까지 회자되고 있다. 얼마 전 누리꾼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던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에서 따온 말로, 요즘 들어선 광주가 대구 못지않게 더운 도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극서지=대구'라는 오랜 교과서적 상식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프리카'란 대구가 아프리카만큼 덥다는 뜻의 유행어다. 지금껏 대구는 여름철마다 인간의 정상 체온을 넘어서는 경이적인 기온을 뽐내며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여름 수도'로 불려왔다. 아닌 게 아니라, 얼마 전 한 가정집에서 열대 과일인 바나나가 열린 사진 SNS에 공개되면서, 많은 누리꾼으로부터 '대프리카'의 위엄을 보여줬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 뒤 광주에서도 바나나가 열렸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의 이목이 광주로 옮겨졌다(해당 식물이 바나나가 아니라 한국에서도 열매를 맺는 파초라는 주장도 나왔다). 광주의 여름 더위가 대구 못지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남부지방 전역이 열대기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아이들도 '국산품 바나나'를 먹게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면서, 최근의 폭염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뭍에서 나는 귤, 인간이 만든 더위

14일 광주 북구 석곡동 주민센터에 따르면 지난 7일 한 주민이 주택 마당에 식물에서 열매가 맺혔다. 애초에는 이 열매가 바나나로 추정돼 이례적인 현상으로 간주됐지만, 해당 식물이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열매를 맺는 파초(芭蕉)일 가능성이 제기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2017.6.14 [광주 북구 석곡동 주민센터 제공=연합뉴스]
 14일 광주 북구 석곡동 주민센터에 따르면 지난 7일 한 주민이 주택 마당에 식물에서 열매가 맺혔다. 애초에는 이 열매가 바나나로 추정돼 이례적인 현상으로 간주됐지만, 해당 식물이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열매를 맺는 파초(芭蕉)일 가능성이 제기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2017.6.14 [광주 북구 석곡동 주민센터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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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광주의 기온이 대구를 훌쩍 뛰어넘는 최근의 상황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기존의 지리 지식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대구가 유독 더운 건 여태껏 분지에 조성된 도시이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분지 지형은 대기의 흐름을 차단하여 도심의 더운 공기가 밖으로 나가지 못해 기온을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존의 상식으로는 '광프리카'를 설명할 수 없다. 아이들은 도시의 기온을 결정하는 주요인은 지형 등의 자연환경보다는 인문환경이라는 게 분명하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들어 곳곳에 들어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도시의 기온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 아니냐며, '국산품 바나나'를 가능하게 만든 건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일 거라고 말했다.

산으로 에워싸인 게 '자연 분지'라면, 그런 조건을 능가하는 게 바로 고층 아파트로 에워싸인 '인공 분지'라는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열섬'을 아이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은 더 이상 온대기후 지역이 아니라면서, '국산품 바나나'는 인간의 활동에 의해 '후천적' 열대기후 지역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말했다.

나아가 한 아이는 급변하는 기후의 상황을 기존의 낡은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건, 인간의 환경 파괴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꼴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 그저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라며 남 이야기하듯 눙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대구와 광주의 '국산품 바나나' 소식을 단순한 가십거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기후에 관한 한 교과서의 서술은 대폭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농작물의 북한계선은 교과서의 개편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 예컨대, 대표적인 난대성 작물인 대나무의 북한계선은 차령산맥이라고 줄곧 외워댔지만, 이젠 서울 근교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제주도'만'의 특산물이었던 귤이 뭍에 상륙한 지는 꽤 됐다.

아직도 능금을 대구의 특산물로 손꼽는다면 그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일 게 틀림없다. 한때 중고등학교 지리 시험에 단골 문제로 등장한 내용이지만, 지금 대구에서는 더 이상 능금이 재배되지 않는다. 하긴 기후와 토양 등의 자연환경이 농작물 재배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러한 시험 문제는 의미를 잃은 지 이미 오래다.

일찌감치 찾아온 폭염과 SNS를 달군 '국산품 바나나' 덕에 시간표에도 없는 지리 수업을 한 셈이 됐다. '광프리카'라는 말을 낯설어하던 한 아이는 이렇게 제안했다.

"서로 비슷한 별명도 가졌겠다, 희귀한 바나나도 함께 열렸으니 대구와 광주가 애먼 더위 경쟁을 할 게 아니라 이참에 정서적 거리감이나 좁혔으면 좋겠네요."


태그:#대프리카, #폭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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