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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 류미례 감독 강화도에서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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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웠다. 어느 날 아침, 류미례가 잠에서 깨어나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밥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늘 엄마나 언니들이 해주는 밥을 먹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자기가 움직이지 않으면 밥은 없었다. 또 이상한 일이 있었다. 남편이 이상한 걸 물었기 때문이다.

"여보, 내 양말 어딨어?"
"아니, 내 양말도 모르는데 내가 당신 양말을 어떻게 알아?"

남편은 깜짝 놀랐다. "아니, 당신 페미니스트였어?" 류미례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 그냥 젊은 여자였다. 그동안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챙겨 준 양말을 신고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하고 룰루랄라 다녔던 젊은 여자였다.

이상한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남편이 옷을 다려 입지 않고 후줄근한 차림으로 나가면 류미례가 욕을 먹었다. '남편이 후줄근한데 왜 내가 욕을 먹지?' 류미례가 결혼하고 이상하고 힘들었던 게 이 세 가지였다.

결혼하고 난 뒤 이렇게 삐걱댔던 두 사람은 이제 서로가 할 일을 안다. 여자가 할 일은 여자가, 남자가 할 일은 남자가 해야 하는 법이 없었다. 집안일은 시간 되는 사람이 한다. 아이들은 맛있는 걸 먹고 싶을 때 아빠한테 조른다. 음식 솜씨가 없는 엄마보다 아빠가 해주는 게 더 맛있다. 집안 생계는 오로지 아빠 책임이 아니다. 늘 함께 책임져 왔다. 남자 일, 여자 일 따로 없이 하면서 사는 이 부부는 싸울 일이 없다.

류미례. 독립영화 <엄마>로 제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옥랑문화상, <친구>로 제27회 서울독립영화제 우수작품상, <아이들>로 제36회 서울독립영화제 독불장군상 등을 받고, 그 밖에 많은 영화들이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 후보로 올랐던 감독이다. 요즘은 류미례 감독이라고 불린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영화를 만들었던 류미례 감독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이의 삶을 따라가 본다.

서울, 가난이 뭔지 알려줬다

류미례 부모님과 형제자매(맨 앞 가운데가 류미례)
▲ 류미례 부모님과 형제자매 류미례 부모님과 형제자매(맨 앞 가운데가 류미례)
ⓒ 류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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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례는 전라남도 해남 출신이다. 아버지는 고아로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그래도 결혼하고 난 뒤 얼마 동안은 건실한 가장이었다. 40대 초반 사고로 실명하면서 인생을 포기했다.

말년의 아버지는 폭력적으로 변했고 자주 엄마와 싸웠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엄마가 집을 나가면 류미례와 언니들은 아버지가 무서워 친구집이나 친척집을 전전했다. 모두가 떠난 집에서 아버지는 술만 마시다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은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은 건 빚밖에 없었다. 가난을 견디다 못해 어머니는 아이들을 이끌고 서울로 갔다. 류미례가 중학교 2학년 때다. 류미례는 서울에서 살면서 처음으로 가난이 뭔지 절실히 깨달았다. 시골에서도 가난했지만 잘 몰랐다. 서울로 올라가니 먼저 셋집이 충격이었다. 서울은 꿈의 도시인 줄 알았다. 집을 들어가면 마당이 있는 그런 집을 생각했다. 중화동 반지하였다. 주인집 때문에 벨을 누르지 못하고 쪽문으로 들어가는 게 너무 싫었다.

류미례 형제는 6남매였다. 오빠는 군대 가고 큰언니, 둘째 언니는 실업계를 졸업하고 집안 살림을 보탰다. 류미례는 돈을 벌 수 있는 교사가 꿈이었다. 86학번 큰언니는 학생운동 열심히 하다가 상처를 받고 은둔하고 있었다. 류미례는 학생운동이라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해 대학을 가더라도 운동을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둘째 언니도 운동권이었다. 그 언니가 대학을 가면 똑똑하게 보여야 된다고 운동권 노래를 가르쳐 줬다. <너를 부르마>. 하지만 류미례는 대학을 들어가서 <개똥벌레>를 불렀다.

한국사학과 89학번.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다. 류미례는 학교를 다니면서 학비를 벌어야 했다. 학비를 못 버는 순간 그 세계에서 '아웃'될까 봐 두려웠다. 돈을 버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과외, 카페 서빙, 학교 불법주차 단속, 심리학과에서 타자 치는 실험 알바, 서점 점원 알바 등을 했다.

당시는 학원민주화 투쟁 시기였다. 부정 입학 문제로 학생들이 수업 거부를 하고 있었다. 류미례는 학생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학원민주화는 돼야 한다고 생각해 열심히 참여했다. 그해 2월 현대중공업 회사는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에게 식칼 테러를 저질렀다. 그걸 보면서 이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4·19 의거를 기념하는 4·18 대장정을 하면서, 또 광주항쟁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껍데기를 벗고서>와 같은 책으로 세미나를 하면서 새로운 내용을 알게 됐다. 이 세상이 너무 부당했구나라는 걸 알게 되고 열심히 해서 세상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격한 운동권이 돼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류미례는 운동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혁명가를 꿈꾼 그

류미례는 혁명가의 삶을 살고 싶었다. 대학에서 3학년 때부터 소수 정파 소속이었다. 류미례는 자신이 속한 조직이 훌륭하고 탄탄한 조직인 줄만 알았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운동을 계속할 줄 알았다. 사회에 나가서 어떤 임무가 주어질 줄 알았다. 이를테면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들을 조직한다든가 하는 임무. 하지만 1993년 졸업하고 나니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조직은 사회와 연계돼 있지 않았다. 실망하고 조직을 원망하면서 1993년에 혼자 구로공단 직업훈련원에 들어갈 결심을 했다. 일도 배울 수 있고 한 달에 17만 원을 받는다고 들었다.

비슷한 처지의 동기가 이런 괴담을 들려줬다. "어떤 사람이 공장을 들어갔더니 누가 따로 불러서 '야, 내가 5년 동안 탁구부 하나 만들었다, 난 떠날 테니 이제 니가 맡아라' 하더래." 그만큼 조직하기가 힘들다는 말이었다.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잘하고 있는데, 힘들고 다 빠져나가는 시기인데, 자신이 과연 공장에 들어가서 일할 수 있을까? 공포가 들었다.

류미례는 직업훈련원에 들어가려고 입사지원서를 써서 구로공단을 찾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스팔트 거리는 지저분했다. 류미례는 그 공장 앞 거리를 세 바퀴 돌면서 망설였다. 결국 지원서를 내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류미례가 사는 집이 생각이 났다.

류미례 집은 광명 하안동 8단지였다. 맞은편에 13단지 임대아파트가 있었다. 8단지 입주민들은 13단지 아이들이 넘어올까 봐 담을 쌓았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저게 내 미래가 되지 않을까 겁이 났다. 원서를 냄으로써 공장에 다니는, 평생 그런 식으로 살 것 같았다. 자신이 없었다. 노동자대회 때 마포대교에서 행진할 때도 생각났다. 경찰에게 막혀 있는데 대오에서 학출 노동자인 듯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 옛날 생각나지 않냐?" 류미례는 그 말들이 무서웠다. '투쟁은 신나지만 내가 공장 노동자로서 일상을 버틸 수 있을까?'

그 뒤로 류미례는 헤맸다. 아니, 잠적해 버렸다. 1995년까지 사람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힘을 찾을 거야. 훌륭하게 돼서 돌아가야지. 전투적인 모습, 혁명적 노동자의 꿈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나야지." 혁명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문화생활도 안 하고, 옷도 마음대로 못 입고, 연애는 혁명의 적이라고 생각했었다.

후배 세미나 시킬 때였다. 후배가 자기는 가난한 집이고 장남이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 류미례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우리는 혁명을 만들어야 돼." 그런 말을 뱉어 왔던 자신이 학원 강사라니 절대로 후배들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훌륭하게 돼서 나타나야 돼." 곱씹었다.

'내가 쓰레기처럼 살고 있구나'

류미례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학원에서 수학 강사를 했다. 3년 동안 강사를 하면서 운동과 관계를 끊고 살았다. 그 당시 학원 강사엔 류미례 같이 운동권들이 많았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작가 진수완도 같은 학원 강사였다. 류미례는 학원 수업시간이 끝나고 강사들과 늘 술을 마셨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적금을 깨서 술 먹은 적도 있다. 자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12시에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가다 집 앞에서 쓰레기차를 봤다. 문득 '내가 쓰레기처럼 살고 있구나, 더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류미례는 그다음 날부터 한겨레 문화센터 강좌를 신청했다. 사진, 영화비평, 자유기고가 교실, 뭐든지 다 들었다. 그 당시 민예총 문화비평이 인기였다. 문예아카데미 문화비평교실 1기를 수강했다. 그때 선배들이 민예총 편집실에 사람이 없는데 타자 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거기를 들어가면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거 같았다. 민예총 자원봉사 일을 하다 편집실 기자가 됐다. 류미례는 학원 일을 정리했다.

어느 날 편집실에 후원자가 주간으로 왔다. 편집장도 바뀌었다. 그런데 그 편집장이 월간지 개념이 없었다. 마감 막판에 뒤집기 일쑤였다. 마감에 기획을 내는 일도 있었다. 류미례는 대차게 쏘아댔다. "편집장님, 모르시면 배워요." 편집장 콧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저러다가 맞는 거 아닌가 하고 후배가 생각할 정도였다. 맞지는 않았지만 편집장은 용납하지 않았다. '감히 하찮은 여자 활동가가.'

이틀 뒤 편집장이 경건하게 낮고, 무게 있게 말했다. "이제 너희랑 같이 일을 못 하게 됐다." 류미례는 깜짝 놀랐다. "아니, 편집장님 그만두시게요?" 편집장은 깜짝 놀라 평상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나 말고 너희."

해고였다. 류미례는 속없이 마감 걱정을 했다. "책은 어떻게 하고요? 인수인계는 해야지요?" 편집장은 단호했다. "아니, 괜찮아. 책 걱정은 하지 마." 류미례는 민예총 4층에 있는 실장한테 전화를 했다.

"실장님, 우리 잘렸어요."
"은숙이도? 너만 자르는 걸로 얘기됐는데?"

눈치 없는 류미례 때문에 결국 후배도 같이 해고됐다(그 뒤 민예총은 혁신을 했다). 류미례는 민예총을 그만두게 됐지만 그 덕분에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민예총 편집기자 시절 취재를 다닐 때 '노동운동의 조직적 발전과 영상운동'이라는 강의를 하는 곳에 취재를 갔다. 다큐를 보면서 문득 '노동자가 되지 않아도 노동자가 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영상으로 하면 되겠구나. 류미례는 다시 한겨레 비디오 제작 강좌를 들었다.

류미례는 처음에 '노동자뉴스제작단'을 찾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받아 주지 않았다. 이번엔 '푸른영상'을 갔다. 그 당시 푸른영상은 <22일간의 고백>이라는 조작 간첩 이야기를 다큐로 만들고 있었다. 류미례는 이곳에서도 받아 주지 않을까 봐 외부 스태프으로 참여하겠다고 했다. 그 뒤로 류미례는 지금까지 이 푸른영상에서 일을 하고 있다.

급작스러운 청혼

류미례가 <나는 행복하다>라는 다큐를 만들 때였다. 봉천동 장애인복지지원센터에 있는 아이들을 찍었다. 그곳엔 성공회 사제로 장애인 사목 활동을 하는 유 신부가 있었다. 영화 촬영을 하다가 친해졌다. 유 신부는 류미례가 마음에 들어 청혼을 했다. 류미례는 거절했다.

"유 신부님은 뼛속 깊이 크리스찬인데 저는 유물론자에다 마르크스주의자예요. 도저히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네요."

그렇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유 신부가 작업이 끝나고 만나자고 했다. 치킨을 시켜 놓고 맥주 한 잔을 할 무렵 유 신부는 갑자기 급하게 갈 일이 있다고 했다. 류미례 마음을 얻기 위해서 잘 보여야 하는 시점이었는데 유 신부는 단호했다. 유 신부는 가는 길에 류미례를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다 준다고 했다. 치킨도 못 먹고 싸서 들고 나와 차를 탔다.

유 신부는 웬 세 아이를 태웠다. 엄마가 집을 나가 버려 잘 데가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 집 아빠도 술주정뱅이에다 폭력 가장이었다. 유 신부는 그 아이들을 재울 곳을 찾아서 데려다 주려고 급히 나왔던 것이다. 류미례가 아이들한테 치킨을 주니 큰애가 동생한테 "고맙습니다, 해야지" 하는데 류미례는 눈물이 났다. 그 아이에게서 자신의 어릴 때 모습이 보였다. 류미례도 아버지가 술 취해서 들어오면 어디 갈 데가 없었다. 아버지는 집에 불 지른다고 휘발유를 뿌리면서 엄마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한 달은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정한 모습의 류미례 부부
▲ 류미례 부부 다정한 모습의 류미례 부부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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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례는 유 신부 그때 모습이 너무 좋았다. 자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온 사람이 아이들 때문에 가는 모습이 좋았다. 류미례는 생각했다. '내가 옛날엔 세상을 구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내가 저 사람 옆에서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것도 세상을 구하는 거다.' 그런데 류미례는 결혼 승낙을 할 기회가 없었다.

류미례 언니가 러시아 유학을 떠나는 날이었다. 환송회 날 유 신부는 갑자기 류미례 엄마에게 류미례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류미례가 보기에 뜬금없었다. '난 결혼하겠다고 승낙하지도 않았는데?' 엄마 처지에서는 좋았다. 재취도 아니었고 사제였으니 허락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여자가 서른을 넘으면 재취 자리밖에 없다"고 말하며 자주 울던 엄마는 남자가 그냥 초혼이라는 것에 만족하며 얼른 결혼하라고 했다.   

류미례는 속성으로 크리스찬 세례를 받고, 특별 관면혼배를 올렸다. 유 신부에게 "교회는 다녀 줄게" 했다. 류미례는 <나는 행복하다> 시사회를 하는 날 결혼식을 올렸다. 영화도 결혼도 첫 작품이었다. 봉천동 자활기관시설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남녀의 성 역할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끊임없이 서로를 아는 과정을 거쳤다. 류미례는 처음에 남편이 전담 사제 같은 역할로 느꼈다. 어느 날 유 신부는 강화로 발령이 났다. 장애인 직업재활시설 기관장이었다. 유 신부가 먼저 간 뒤, 시골이 무서웠던 류미례는 1년 뒤에 합류한다.

그때가 부부의 인생 정점이었다. 유 신부가 열심히 움직여서 시설의 매출이 올랐다. 일이 잘되니 사람들이 알아봐 주고 유 신부는 지역 유지라도 된 듯했다. 하지만 가만 있어도 월급 잘 나오는데 자꾸 일을 벌이는 유 신부를 직원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데려온 직원이 인사 발령에 불만을 품고 투서를 했다. 성공회에서 2013년 유 신부를 서울로 다시 발령을 냈다. 하던 일이 아닌, 자활 기관장으로 발령했다. 새 직장에서 1년을 고민하던 유 신부는 결국 장애인들하고 함께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결국 시설 기관장에서 면직이 됐다.

"내가 먹을 걸 책임질 테니 하고 싶은 일 해!"

갑자기 모든 게 사라졌다. 직장이 없어졌다. 차도 없어지고 집은 두 달 안에 비워야 했다. 그동안 가난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성공회에서 빌려 준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집 걱정도 안 했다. 달랑 700만 원이 있었다. 세상에 내던져졌다. 애들이 민감했다.

"우리 여기서 못 산대."

너무 슬펐다. 집을 구하기 전까지 나갈 데도 없었다. 일요일마다 의연하게 교회는 나가야 했다. 무대에 나간 듯이 살았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대해서 고소해하는 거 같았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류미례와의 관계라고 착각했던 거다. 남편이 지위를 잃는 순간 그 착각은 허망하게 깨어졌다. 인간관계가 허상이었다.

그동안 남편은 뭐든지 해주는 척척박사였다.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류미례는 남편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류미례는 남편에게 큰소리쳤다. "내가 먹을 걸 책임질 테니까 하고 싶은 일 해." 그런데 할 일이 없었다. 류미례는 주로 미디어 교육으로 돈을 벌었는데 일자리가 없어졌다. 보는 곳마다 면접에서 떨어졌다.

유 신부는 수완도 좋고 운도 좋은 사람이다. 정부 정책 중 공기업, 대기업에서 장애인을 2.5% 고용하든가, 장애인이 만든 물건을 사든가, 하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 서울시도 그런 사업을 해야 했다. 서울시 공무원들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시설에서 매출을 10배 올려놓은 유 신부 사례를 보고 장애인 사업 발제를 해달라는 제안을 했다.

유 신부는 장애인을 고용하면서도 이익을 낼 수 있는 대안으로 정미소 사업을 제안했다. 품질도 좋고, 소비도 잘되고 판매도 쉬운 것, 이 세 가지를 충족할 수 있는 게 쌀이다. 정미소를 지어 친환경농산물 쌀을 장애인이 찧어 팔면 노동 능력은 낮아도 생산력을 높일 수 있다. 서울시에서는 그 사업을 발제했던 유 신부에게 맡겼다.
류미례 감독의 영화 <엄마...>
▲ 엄마 류미례 감독의 영화 <엄마...>
ⓒ 류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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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례는 첫딸 하은이를 낳았지만 영화를 찍고 싶었다. 1999년부터 하은이를 업고 다니면서 카메라를 돌렸다. <엄마…>였다. 이 제목 뒤에는 말줄임표가 붙는다. 류미례는 "엄마!" 불러 놓고는 목이 메어 말을 이을 수가 없는 상황을 나타낸다고 했다. 아이를 업고 찍을 수 있는 영화는 그것밖에 없었다.

이 영화에는 세 엄마가 나온다. 류미례 감독 자신, 류미례 셋째 언니, 그리고 류미례의 엄마다. 이 세 엄마는 여자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좌절의 경험들, 그리고 엄마로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류미례는 영화를 찍으면서 식구들이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이 됐다.

하지만 "너도 힘들었구나. 나도 힘들었는데" 하고 공감하는 것으로 위로를 받았다. 류미례는 또 우리 자신들과 비슷한 경험이 있는 분들과 공유하고 싶었고 삶이 정말 힘들다고 해도, 그런 사람이 옆에서 살아가고 있고, 끝이 아니다, 앞에는 다른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당신이 처음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그리고 인생은 계속되는 것이다."

지금은 러시아에 사는 언니가 알려 준 러시아 속담이다.

류미례는 <엄마…>를 찍으면서 위로 언니 둘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삶이 고달파서였을까. 엄마는 늘 외롭고 어두웠다. 그런 엄마가 남자친구와 연애하면서부터 밝게 변했다. 류미례는 엄마의 그런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소중하다. 엄마의 남자친구는 류미례 엄마를 위해 운전면허를 따려고 시험 공부를 한다. 류미례는 "엄마가 행복해 보인다, 그러면 됐다"고 한다. 이 영화는 제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옥랑문화상을 받았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첫딸 하은이가 분리불안으로 힘들어했다. 엄마가 눈앞에서 안 보이면 심하게 불안해했다. 그런데 류미례는 계획에도 없이 아이 둘을 더 낳았다. 류미례는 6년 동안 아이들 곁에서 시간을 보낸다. 엄마와 떨어져 지낸 자신의 어린 시절, 그때의 결핍감을 내 아이에겐 물려주지 않겠다고 그이는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도 엄마도 난관을 이겨 낸다.

"아이의 성장 드라마, 나 역시 성장했다"

류미례 감독의 영화 <아이들>
▲ <아이들> 류미례 감독의 영화 <아이들>
ⓒ 류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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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례는 다시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어느 날 김동원 감독이 말했다. "아이 키우는 영화를 만들어 봐." 류미례는 자신의 <아이들>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고민을 많이 했다.

"훨씬 더 어려운 시간을 지나 온 윗세대 엄마들한테는 젊은 엄마들의 말이 공감보다는 반감을 생기게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입을 다물다 보니 나중에는 말이 가슴 밑바닥에 고인 채 굳어 가는 듯했다. 선배 엄마들한테는 '그게 무슨 고생이라고?'라는 말을 들을까 봐, 결혼하지 않은 후배들한테는 '아기 얘기 좀 그만해'라는 말을 들을까 봐, 하고 싶은 말이 가슴 가득 고여 있는데도 말을 아꼈다."

<아이들>은 세 아이와 함께 지내 온 10년간의 육아 일기였다. 류미례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랑 함께 있다 보면 수시로 내 안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 울음을 참지 못하는 그 어디쯤, 마음이 찡해지는 그 어디쯤에서 내 안에 웅크린 어린 내가 그 존재감을 알린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그냥저냥 살아갔을 내 인생이 아이 때문에 드라마틱해졌고, 아이의 성장 드라마를 함께 쓰며 나 또한 성장해 왔다.

초보 엄마로 실수를 연발하며 키웠던 하은이, 아이들이 만드는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는 어린이집을 엿보게 해 주었던 한별이, 그리고 언니 오빠와는 너무나 다른 강한 성격 때문에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다시 보게 만들었던 은별이. 이 세 아이들은 내 영화의 주인공들이자 내 인생의 연출자들이다. 이 영화는 10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써온 육아 일기이자 시리즈의 끝이 궁금한 육아 시트콤이다."

이 영화는 제36회 서울독립영화제 독불장군상을 받았다. 그리고 <아이들> 두 번째 작품인 <따뜻한 손길>을 찍고 있었다. 아이들이 소년이 된 모습을 보여 주는 영화다. 이 영화를 열심히 찍다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류미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그런 사고를 당했다는 게 힘들었다.

아이들의 반짝이는 순간순간이 하루아침에 소멸돼 버렸다. '세월호'를 외면하고는 그 어떤 작업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부터 류미례는 세월호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11월 결합한 뒤부터 투쟁 집회 기록 영상을 만들고, 간담회 장면 영상 제작을 했다. 2015년부터는 기획을 해서 세월호의 기억을 불러 내는 미디어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는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7편의 옴니버스 영화 <망각과 기억>을 상영했다. 류미례는 글 쓰는 일과 구성하는 일을 맡아 진행했다.

그 일을 하는 도중에 큰 교통사고가 났다. 2015년 10월 13일 강화도 온수리 온수사거리에서 집으로 가던 중 반대편 농협 골목에서 튀어나온 차에 뒤를 받혔다. 상대편 차는 아반테였고 류미례 차는 모닝이었는데 상대편 차에 받혀서 튕겨져 나간 류미례 차는 중앙선을 넘어 버스 정류장 부스를 완파하고 다시 튕겨져서 택시에 부딪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사고 때문에 류미례는 지금까지 병원을 다닌다. 몸도 몸이지만 그때 보험회사 직원이 한 말에 상처를 받았다. "당신은 도시 일용 노동자보다 보상금이 적다." 그 말에 류미례는 '월급 받으면서 살 걸' 하는 마음도 들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한 뒤에도 컴퓨터 앞에서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요양하느라 목욕탕에 가면 또래 여성들이 하루 종일 있으면서 밥 시켜 먹는 걸 보고 참 편하겠다 생각했다. '나도 저랬으면. 저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찬바람 부는 사막 같은 세상. 저기는 따뜻한 세상이구나.'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류미례는 다시 일어선다. 사고 난 후 3개월 동안 일을 못 하다가 다시 세월호 미디어위원회 일을 시작했다. 물론 보수를 받는 일은 아니다. 지난해엔 활동비 20만 원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원봉사다.

류미례 감독의 꿈

류미례 남편이 면직된 뒤 처음 얻은 셋집, 소를 키우는 우사를 개조한 집이다.
▲ 집 류미례 남편이 면직된 뒤 처음 얻은 셋집, 소를 키우는 우사를 개조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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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0일부터 생활비 버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화요일부터 돈보스꼬 영상대안학교에서 영상을 가르친다. 수요일에는 한예종 방송영상과 졸업 작품 지도를 하는데 방학 때는 수업이 없다. 목요일에는 KBS 3라디오 <함께하는 세상 만들기> 프로그램에 나간다. 그 프로그램은 장애가 등장하는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이를 테면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 오른팔 의수가 나오는데 저기에 왜 장애가 등장하는가 하는 걸 추리하는 것이다.

또 4월부터는 파주 세경고등학교 마이스터 특성화학교에서 다큐, 방송 제작을 가르친다. 올해 지원서를 냈는데 다행히 붙었다. 서울시에서 자유학기제 운영하면서 만든 제도라 그나마 강의료는 13만 원씩(?)이나 한다. 아이들한테 면접 붙었다고 하니까 "엄마, 우리 집 사자"고 했다. 은별이는 언젠가 말했다. "엄마 우리 집엔 보일러가 없나? 난로가 무서워."

다큐 마무리 작업도 시작했다. 류미례는 공교육 체계를 믿는다. 대안학교로 다 가면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공교육은 포기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이번에 만드는 영화는 공적인 영역에서 이 아이들 양육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깨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역 아동센터를 선택했다. 조손, 한부모 가정 아이들이었다.

2014년은 뜻깊은 해였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월세가 아닌 연세로 싼값에 얻었다. 고구마 농사도 지어 자신감이 생겼다. 잘 팔리는 게 신기했다. 더는 남편이 다니는 성공회 교구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 인생의 계획대로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자유로움을 얻었다.

류미례 감독 꿈은 소박하다. 영화를 잘 만들고 싶다. 최소한 대학 때처럼 입만 살았던 것을 반성하는 의미도 있다. 류미례는 말한다.

"다큐는 땀을 흘려야 된다. 찍지 않으면 이야기를 못 한다. 무언가 포착을 해야 된다. 영화를 보는 사람이 나도 저런데 하는 느낌이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별로 주장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다. 누가 주장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별로 없어요' 하고 대답한다. 주 관객층이 여성이 많다. 비슷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여성들이 그런 자기 기억을 가라앉혀 놓고 산다."

류미례는 자신의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다. <엄마…>에서 엄마는 춤추고 술을 마신다. 영화를 본 어떤 여성이 말했다. "우리 엄마는 더 심해요." 그런 말을 들으면 너무 고맙다.

류미례는 '애 키우는 게 영화가 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다 잘 키우는데 나만 문제 있는 거 아닌가?' 하고 미심쩍어했는데 <아이들>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좋은 걸 보고 '어머, 나 잘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어머, 저 밥상에 애들 반찬이 하나도 없네", "어머, 저 싱크대 먼지" 하면서 시어머니 눈으로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린다. 나이 먹은 이들이 "이불이나 개고 찍지", "아니, 애 키우는 게 그렇게 억울했냐? 영화까지 만들고"라고 할 때도 있다. 그런 이가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게 영화, 다큐의 힘이다.

류미례는 자신이 만든 영화가 다른 이들한테 자기 이야기, 그이들의 가라앉아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문고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류미례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있다.

"나 영화 하기를 잘한 거 같애."

류미례 가족(사진 찍는 날 둘째 한별이는 친구랑 놀러갔다.)
▲ 류미례 가족 류미례 가족(사진 찍는 날 둘째 한별이는 친구랑 놀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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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월간 '작은책' 2016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작은책, #류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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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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