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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사진도 풍부하게 나오는 서울 나무 여행서.
 나무 사진도 풍부하게 나오는 서울 나무 여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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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한옥들이 모여 있는 서울 가회동 혹은 북촌에 가면 이웃동네인 재동에 꼭 들르게 된다.

수백 년 묵은 고목 소나무 그것도 흰 소나무를 보기 위해서다. 헌재(헌법재판소)가 들어선 재동은 예전에 잿골이라 불렸다.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온 동네가 피바다가 되자 이를 덮으려 재를 뿌려 잿골이 되었다고.

동네 이름만큼이나 호기심과 시선을 끄는 존재가 흰 소나무 '백송(白松)'이다. 잎은 여느 소나무처럼 푸르지만 나무껍질이 벗겨지고 남은 자리의 줄기가 하얘 백송이라 부른다.

중국 사신을 따라왔다가 홀로 남은 지 600년이나 되었다. 흰빛을 좋아하는 한민족은 백송을 귀히 여겨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이 책 <서울사는 나무>는 이렇게 600년 고도(古都) 서울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듯 공존하고 있는 나무들 이야기다. 희귀한 백송처럼 대접받고 사는 노거수(老巨樹: 오래되고 큰 나무)가 있는가 하면, 잘못된 이름에 편견까지 지고 사는 아까시 나무, 냄새가 난다며 뿌리째 뽑혀버린 은행나무 등 사람들만큼이나 나무들도 서울살이가 녹록지 않다.

서울의 흔한 길과 그 길이 지나는 동네에 사는 비술나무·양버즘나무, 서울을 숨 쉬게 하는 크고 작은 공원에 사는 가죽나무·귀룽나무,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역사성과 균형감을 선사하는 조선의 궁궐에 사는 느티나무·회화나무 등 서른두 그루의 나무들이 풍부한 사진들과 함께 나온다. 한 도시에 살면서도 모르며 살았던 나무들에 대해 알게 되는 기쁨도 있지만, 어찌하여 그 나무가 그 자리에 살게 되었는지 연유를 되짚으며 자연스레 나무가 살아가는 길과 공원, 궁궐의 내력을 들여다보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서울 나무여행이라는 색다른 나들이를 하게 하는 여행서이기도 하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많지만 나쁜 나무는 없다

사람은 가진 것 없다고, 인물이 못하다며 다른 사람 얕잡아 보듯이 아까시 나무가 뿌리를 넓게 퍼뜨린다고, 은행나무 열매 냄새가 지독하다고 '나쁜 나무'라 부르며 멸시하지만, 나무는 제게 든 모든 생명을 순순히 보듬어준다. 나무의 생에 비추어 사람의 생을 바라보라. 햇빛과 물과 공기만으로 푸르고 높이 자라는 나무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모하며 헛된 것을 내놓는지 말이다 - 본문 가운데

오르기 쉬운 데다 수목이 울창해 산책 삼아 자주 찾아가는 서대문구 안산은 본래 모래흙과 바위로 된 척박한 토질의 산이다. 이 산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이 흔히 아카시아 나무라고 부르는 아까시 나무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이 나무는 안산공원의 푸른 오늘을 만들었다.

아까시 나무는 영어로도 아카시아 나무가 아니라는 뜻에서 'False Acasia'라고 쓴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카시아 나무라고 고집스레 부르는 한국인에게 아까시 나무는 오만 것을 내주었다. 척박한 산지에 뿌리내려 녹음을 선사했고 더러운 공기를 걸러주었다. 그래 봐야 "아, 가시가 많아 아까시구나" 소리나 듣는데도 오늘도 거친 땅에서 뿌리를 넓혀갈 뿐이다.

이렇게 아까시 나무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아까시 나무의 뿌리처럼 끈질기다. 다른 나무를 못 자라게 한다, 조상의 관 뚜껑을 움켜쥐고 있다, 없애도 없애도 되살아난다더라 등 아까시 나무는 저만 살고자 하는 '나쁜 나무'라고 여겨졌다. 단내가 강한 꽃향기조차 지린내 같다고 욕을 들었다.

일제강점기에 처음 이 땅에 들어온 아까시 나무는 토질을 가리지 않고 잘 자라는 성질 덕에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때 사방조림(황폐한 산지에 나무를 심어 토양을 보존하고 지력을 유지)을 위해 대거 심어졌다. 이후 유해수종이라는 깊은 오해를 받아 결국 조림 중단, 땔감용 벌채 등의 형벌로 이어졌다. 아까시 나무는 이렇게 마구잡이로 심어지고 무참하게 베어지다가 21세기가 되어서야 아까시 나무의 여러 효용이 알려지면서 또 다시 숲이 만들어지고 있다.

사람살이와 함께하는 나무살이

거대하나 부박한 도시, 서울에서 나무는 이렇게 생명이기보다는 물체에 가깝다. 간판 가린다, 그늘 드리운다, 낙엽 많이 진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가지치기를 당하고 댕강 베어진다. 툭하면 손발이 잘리고 여차하면 참수당한다 - 본문 가운데

서울에서 대부분의 나무는 고장난 전봇대 비슷한 취급을 받곤 한다. 특히 길가에 선 나무의 운명은 더 가혹하다. 매연에 온 줄기가 새카매지고, 종일 소음에 시달리며, 밤이 내려도 환한 가로등과 간판 불빛에 잠들지 못한다. 겨울이면 꼬마전구에 칭칭 감긴 채 "따뜻하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듣는다. 사람은 나무가 주는 무한한 은혜를 받으면서도 떨어진 꽃과 잎과 열매를 쓸어 모아 일반쓰레기로 분류할 뿐이다.

서울에 사는 나무가 처한 각박한 현실은 곧 서울에 사는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번다한 도심에서 생존하는 일은 나무나 사람이나 고되고 치열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사람은 입이 있어 하소연이라도 하고 다리가 있어 달아나기라도 하건만, 나무는 그 모두를 고요히 받아들여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릴 뿐이다. 나무가 인간보다 위대한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무너져가는 인간성이 다소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책 속 곳곳에 담겨있다.

저자는 나무를 생명이라기보다 물체로 대하는 도시인들의 무신경한 태도도 돌아보게 해준다. 가혹한 환경에서도 어김없이 새순을 틔우고,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퍼뜨리고, 잎을 키워 그늘을 넓히는 나무의 아름답고 위대한 생명력에 주목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숲 해설가인 글쓴이 장세이씨는 '식물인간' 이라는 표현을 싫어한단다. 나무의 신진대사가 역동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의 편견이라면서, "당신이 살아 있듯, 나무도 살아 있다"고 강조한다.

서대문독립공원 사형장 안팎에 심어진 두 그루 양버들 나무.
 서대문독립공원 사형장 안팎에 심어진 두 그루 양버들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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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가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에 사는 '통곡의 미루나무'도 마음을 붙든다. 이 나무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사형장을 만들 때 함께 심었단다. 이 나무는 무슨 죄목으로 사람들이 지척에서 죽어가는 소리를 들어야 했는지, 나무의 운명이 가혹하기도 하다. 저자에 의하면 미류나무로 알고 있는 이 나무는 사실 버드나무과의 양버들이란다. 미국에서 건너온 버드나무인 미류나무는 요즘엔 종적을 찾기 어렵다고.

책 속에 여행지도 같은 부록이 들어있다. 때죽나무, 참빗살나무, 가죽나무, 벚나무, 귀룽나무, 산수리나무, 아까시 나무…. 서울 종로구 삼청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빽빽하게 도열한 40여 종 1000여 그루의 수종(樹種)과 위치를 남김없이 담아낸 '나무 지도'가 그것. 삼청동은 많이 찾지만, 삼청공원까지 오는 사람은 드물다. 삼청동에서 쇼핑이나 관광만 하지 말고, 이 지도를 들고 다니며 나무들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알아간다면 더 좋을 것 같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덧붙이는 글 | <서울사는 나무>(장세이 글 사진 / 목수책방 펴냄 / 2015.5 / 2만원)



서울 사는 나무

장세이 글.사진, 목수책방(2015)


태그:#서울사는 나무, #아까시 나무, #미루나무, #삼청공원 , #백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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