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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어릴 적에 보던 풍경이야
▲ 어린시절 내가 걷던 길을 걷는 삼남매 엄마가 어릴 적에 보던 풍경이야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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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하나 없는 산 속 집에서 자란 어릴 적 내 소원은 '놀이터'에 가는 것이었다. 회전목마가 있는 '놀이동산'이 아니라 알록달록 페인트칠이 된 미끄럼틀과 시소, 그네가 있는 '놀이터' 말이다. 지금도 그 자리 그대로 있는 친정집 동네엔 내 어릴 적에도, 아이를 셋이나 낳아 엄마가 된 지금에도 놀이터가 없다. 여전히 산과 들, 개울물이 흐르는 산골이다.

전형적인 서울 남자와 결혼해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사는 지금은 놀이터가 곳곳에 넘쳐난다. 10단지까지 있는 지금 아파트에는 한 단지에만도 놀이터가 3~4개씩 있다. 어릴 적 소원이던 놀이터가 지천인데 엄마가 되고 보니 피하고 싶은, 돌아가고 싶은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신혼집은 아파트 놀이터가 바로 앞에 있는 곳이었다. 까꿍이 임신 시절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뛰어노는 아이들 소리가 건강하고 반갑게 들리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솔직히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리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 까꿍이가 태어나고 걷기 시작하자 말로만 듣던 '놀이터 출근'이 시작되었다.

놀이터 출근 인생의 시작

게다가 친구도 없는 놀이터
▲ 냄새나는 우레탄 바닥의 놀이터 게다가 친구도 없는 놀이터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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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인라인을 타는 아이들,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부터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어린 아이들까지 뒤엉켜 노는 좁은 놀이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아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놀이터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피곤했다. 아이들에겐 신나는 놀이터이지만 엄마에겐 '출근'하는 놀이터, 노동의 현장이었다.

뒤뚱거리던 아이는 곧 잘 걷게 되었고, 순식간에 미끄럼틀에 올랐다 내려오며 놀이터를 활보했다. 친구도 사귀게 됐다. 이제 벤치에 앉아 눈으로만 아이를 쫓으면 되는 듯했다. 그러나 벤치신세가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거나 다년간의 놀이터 출근으로 이미 친해진 엄마들은, 한눈에 보이는 무리를 지어 놀이터 벤치를 지키고 있었다. 넉살 좋게 그런 엄마들 무리에 쉽게 끼지 못하고 혼자 지켜야하는 벤치는 바늘방석이었다.

그러나 우리집 거실은 눈만 뜨면 놀이터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놀이터에 나가자고 졸라대는 까꿍이 덕에 놀이터 출근은 계속 되었고, 그러는 사이 안부를 나누는 이웃도 몇몇 생기기도 했지만 여전히 놀이터는 내게 힘든 공간이었다. 여름이면 놀이터 바닥의 우레탄 냄새가 머리를 아프게 했고, 겨울엔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 벤치가 찬바람 부는 허허벌판 같았다.

놀이터를 벗어나보자... 벗어날 수 있을까?

아이들은 흙만 있어도 재미있다
▲ 걷다가 흙놀이하다 아이들은 흙만 있어도 재미있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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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가 있는 풍경
▲ 가을길 억새가 있는 풍경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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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자라자 놀이터에서도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를 더 찾게 되었다. 5년 동안 살았던 아파트에서 이사를 하게 되자, 그나마 몇 있던 동네 친구도 없어져 버렸다. 두 동생들과 함께 놀라고 해도 집 밖으로 나온 까꿍이는 동생들보다는 친구가 더 필요했다. 친구 없는 놀이터는 잠시 온몸의 근육을 쓰며 노는 곳일 뿐이었다. 친구 타령을 하는 아이들의 불만, 우레탄 냄새, 쓸쓸한 벤치를 벗어날 방법을 찾던 중 동네의 야트막한 산과 한강으로 이어지는 고덕천이 생각났다.

"얘들아, 우리 탐험놀이 가자!"

공룡탐험가가 꿈인 산들이가 제일 먼저 환호성을 질렀다. 까꿍이는 씽씽이를 타고 가겠다며 야단이었다. 뭔지도 모르면서 누나와 형이 소리를 지르자 무조건 따라하고 보는 복댕이도 팔짝팔짝 뛴다. 물 한 병을 챙겨 다 같이 집을 나섰다. 길이 조금 울퉁불퉁하긴 해도 유모차도 거뜬히 넘을 수 있는 아파트 단지 사이의 낮은 산으로 향했다. 놀이터 3개를 지나가야하는 난코스가 있었지만 미끄럼틀 한 번씩으로 타협을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림자밟기라는 놀이도 있단다
▲ 그림자도 함께 걷는 길 그림자밟기라는 놀이도 있단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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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 하나씩을 주워 들고 삼남매는 산을 누비기 시작했다. 따분한 벤치신세를 면한 나도 신이 나서 아이들과 함께 산길을 걸으며 중간 중간 운동기구에서 운동도 하며 여유로운 오후를 걸었다. 산을 넘으면 생활협동조합 매장이 있어 찬거리도 사고, 날씨가 더운 날엔 아이들에게 주스도 하나씩 안겨주며 산책의 즐거움을 더했다.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을 따라 '씽씽이'를 타다

형아, 나도 씽씽이 타고싶어~
▲ 봄바람을 타고 씽씽이도 타고 형아, 나도 씽씽이 타고싶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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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협 매장에서 나와 고덕천으로 내려선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이 흐르는 길이다. 물만 보면 돌부터 던지고 보는 산들이는 돌을 찾기 시작한다. 강아지를 무척 좋아하는 복댕이는 산책 나온 강아지를 쫓아다니며 깔깔댄다. 아직 찻길 옆 인도에서 자전거나 씽씽이 타는 게 겁이 나는 까꿍이는 차가 없는 길이라며 신나게 씽씽이를 탄다. 차가 다니지 않으니 나 역시 아이들을 쫓는 시선을 반 이상 거둔다. 가로등에 함께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호사를 누린다.

물론 산책이 마냥 여유롭고 평화로운 건 아니다. 찻길이고 뭐고 무조건 뛰고 보는 복댕이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린 일도 많았다. 또 서로 앞서겠다며 투닥거리기도, 장난치며 뛰다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중간에 다리가 아파 못가겠다며 안아 달라 떼를 쓰기도 했다.

걷고 뛰며 자라는 아이들

여름의 숲속은 시원한 그늘
▲ 숲속을 걸어요~ 여름의 숲속은 시원한 그늘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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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산책은 계속 되었다. 지금까지 반년 넘게 주 3~4회, 가능하면 같은 코스로 아이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다. 산책은 아이들을 변하게 했다. 가장 큰 변화는 아이들이 일찍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다. 6시 30분에 저녁밥을 먹고 8시에 잠옷을 입고 자러 들어가면 늦어도 8시 30분이면 밤잠에 드는 삼남매가 됐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금 귀찮아도 아이들과 함께 오후마다 2시간의 산책을 나선다.

셋 중에 체력이 조금 약했던 산들이는 단단해지고 여물어갔고, 유모차에 타고 있던 시간이 더 많았던 복댕이는 돌아오는 길 잠시만 유모차 신세를 지며 누나와 형을 따라 부지런히 자라고 있다. 일곱 살이 되면서 많은 것에 자신이 붙은 까꿍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선 앞장을 서더니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앞서 집으로 먼저 가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셋이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을 걸으니, 우애도 좋아지는 듯했다. 집에서는 복댕이와 자주 싸우던 산들이는, 걸음이 빠른 누나보다 한참 뒤처지는 복댕이 손을 잡고 챙겨주었다.

초록불에 손 들고 길도 잘 건너지요
▲ 신호등 삼남매는 초록불에 손 들고 길도 잘 건너지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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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교육을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은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이면 멈추고, 초록불에 건넌다. 초록불이 깜빡거리면 다음 신호를 기다리고, 인도가 없는 찻길을 걸어야 할 때는 흰 선 안으로 들어와 한 줄로 걷는다. 물론 내 잔소리가 몇 번 가동되긴 했지만, 길을 걷는 엄마를 보고, 누나와 형을 따라 몸으로 습득하는 안전교육이다.

책에서 보고, 차에서 보던 길과 직접 발로 걸어서 몸으로 알게 되는 것의 차이는 클 것이다. 지도에 관심을 갖던 까꿍이는 주민센터에서 동네 지도를 보고는 구석구석 손으로 짚어가며 제가 본 동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자기만의 지도를 그려내기도 했다. 그런 누나를 따라 지도를 거꾸로 들고 종알대는 두 동생들은 두말 하면 잔소리.

따뜻한 유년으로 가는 길

형아, 나도 하고 싶어~
▲ 길을 걷다 운동도 하지요 형아, 나도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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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는 아이들
▲ 봄이 오는 길 자라는 아이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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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일 같은 길을 걸으니 아이들은 어제 보지 못한 것을 오늘 발견하기도 하고, 어제와 달라진 오늘을 보기도 한다. 오늘 못한 것을 내일 하자고 약속하기도 한다. 힘들게 오르막길을 오르면, 시원한 내리막길이 나오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씽씽이를 끌고 오르고, 한 나무에서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익힌다.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길, 그 길 위에서 아이들은 자란다. 어린 시절 나는 언덕을 내려와 강을 건너 산을 끼고 도는 길을 매일 왕복 세 시간씩 걸으며 학교를 다녔다. 그 길에서 보았던 강과 산, 꽃과 나무들, 계절이 오고가는 풍경은 내 유년의 가장 따뜻한 기억이다.

40년이 다 되도록 그 자리 그대로 있는 친정집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 흙길에서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바뀌긴 했지만, 길 위에서 보는 풍경은 그대로이다. 그 길을 생각하면 어릴 적 기억이 그림책처럼 되살아나 내게 따뜻한 위안이 된다.

내 아이들에게도 내 유년의 길처럼 지금 함께 길을 걸으며 쌓은 길 위에서의 기억들이 오래오래 휴식과 위안으로 남기를 바란다. 엄마가 겨울엔 따뜻한 둥글레차를, 여름엔 시원한 오미자차를 병에 담아 길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어떤 길도 두려워말고 용기를 내어 나아가렴, 씩씩하게!

할머니가 된 내가 그리워할 풍경
▲ 어린시절 내가 걷던 길을 걷는 나의 가족들 할머니가 된 내가 그리워할 풍경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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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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