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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세비야에 잠시 머물려고 했던 계획은 내비게이션의 어수룩함으로 실패했다. 나와야 하는 캠핑장은 나오지 않고 관공소 아니면 대학 부속 연구소 같은 데만 나왔다. 낯선 그곳의 주차장을 몇 바퀴 돈 후 미련 없이 스페인을 떠났다. 그렇게 계획보다 일찍 포르투갈에 들어왔다.

스페인에서는 산 능선을 따라 일렬종대로 올리브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는 별로 없다. 포르투갈은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 국가 중에서 비교적 경제가 덜 발달한 나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농업이나 낙농업 등 1차 산업이 기반산업일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스프링클러를 사용하여 오렌지, 올리브를 키워내는 스페인의 땅에서 느껴지던 풍요롭고 생기 넘치는 느낌이 별로 없다. 반면 고속도로 통행료는 가장 비싸다. 도로 노면 상태 역시 지금까지 지나쳐온 나라들에 비해 가장 좋지 않았다.

시차조차 잊은 나의 실수... 간신히 참여한 요가 수업

며칠 뒤 그녀의 스텝 수업을 받았다. 대각선에 보이는 오스트리아 스텝 친구를 포르토에서 다시 만났다.
 며칠 뒤 그녀의 스텝 수업을 받았다. 대각선에 보이는 오스트리아 스텝 친구를 포르토에서 다시 만났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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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캠핑장은 달랐다. 우리는 호텔로 치면 '4성급'인 캠핑장에 들어왔다. 비수기 가격으로 3만 원 대다. 이제껏 머문 곳 중 규모·시설 면에서 최고다. 풀장·바·레스토랑이 여럿 갖춰져 있고 진행되는 쇼와 강좌도 다양했다.

첫 날 아침, 나는 요가 수업에 참여하려고 했다. 아침 밥상에서 숟가락을 놓고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10시였다.

"에이, 요가 수업 끝났겠다. 9시 시작인데... 쉬엄쉬엄 나가서 레스토랑에 저녁식사 예약하고 올게."

식당 쪽으로 느긋하게 가니 아직 요가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나도 매트 하나 깔고 늦게라도 동참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정리 중인 것 같아 그냥 레스토랑에 앉아 식당 문 열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분명 오전 10시면 연다고 했던 레스토랑 문은 안 열고 요가 수업은 계속 진행되고... 뭔가 이상했다. 

"올라, 왜 식당 문을 안 열어요? 20분이나 기다렸는데."
"10시에 열어요."
"지금 10시 20분일 걸요?"
"네? 지금 9시예요."

나는 순간 시차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당황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시차가 있군요."
"네, 1시간이요."
"맙소사. 감사해요. 매트 한 장만 주실래요?"

뒤늦게 스태프에게 매트를 받아 선생님에게서 가장 먼, 뒤쪽에 매트를 깔고 누었다. 털의 발육이 남다른 남자의 옆에 누워 그를 보았다. 앞쪽 여자 친구의 동작을 보고 따라하는 통에 그는 선생님보다 1박자씩 늦었고, 그런 그의 동작을 보고 따라하는 통에 나는 2박자씩 늦게 우등생들의 동작을 따라했다.

정리체조를 하고 난 후 강사는 나에게 오후에 있는 '아쿠아짐' 시간에도 오라고 했다. 아마도 이 캠핑장에서 마련한 모든 신체활동 프로그램은 60이 가까워 보이는, 이 선생님에 의해 진행되는 것 같다. 다국적 할머니들과 함께 "음파", "으헛"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아쿠아짐 시간을 '피바다'로 만들 수는 없었다.

"에잇, 마술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흐린 날에도 밝은 포르투갈의 해변

사무실 그림처럼 예쁘진 않지만 비가 흩뿌리는 날 이런 풍경이면 충분하다.
 사무실 그림처럼 예쁘진 않지만 비가 흩뿌리는 날 이런 풍경이면 충분하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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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잔뜩 머금은 모래 속엔 가지가지 생물이 숨어 있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모래 속엔 가지가지 생물이 숨어 있었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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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본 사진 속 풍경은 그야말로 끝내줬다. 아름다운 색깔의 석회층을 배경으로 명도가 높아 짙은 하늘색 해변이 펼쳐진다. 이곳과 가깝다니 속히 가서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그래서 우리는 포르투갈 입국 기념으로 포르투갈 농부에게 정직하지 못한 값에 산 체리를 씻었다. 파스타, 사과,  빵을 챙겨 '루즈 비치'로 갔다. 그런데 비가 흩뿌릴 것 같은 흐린 날씨였다.

"이때가 바다 구경 가기 가장 좋은 날이지."

도착하자마자 정말로 비가 흩뿌렸다. 도저히 도시락을 들고 내릴 수가 없었다. 우산만 들고 내려 깨끗한 황토색 모래를 밟았다. 그러다 선명한 연두색의 해초류가 군데군데 붙어 있는 너럭바위에서 말미잘, 조개, 물고기를 구경했다. 비가 흩뿌리는 날씨임에도 바다와 모래사장은 맑고 밝았다. 바위의 이끼는 한 가지 물감으로 채색한 듯 순도 높은 색깔이다. 아름답다.

"여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 왜 우리나라 책에는 안내되어 있지 않아?"
"모르겠어."

짧은 답변을 들으며 눈으로 오묘하게 아름다운 모습을 담았다. 옆을 보니 사내아이들이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나왔다. 개구쟁이 녀석들은 큰 파도가 치겠다 싶은 시간에 공을 던지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런 주인의 장난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이 던져짐과 동시에 개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무조건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파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곧이어 구름이 조금씩 걷히면서 더워졌다. 갑작스러운 열기가 전자레인지의 열선마냥 속까지 파고들 기세였다. 이 열기를 즐기는 다국적 여행자는 해변으로 다시 돌아왔고 우린 이쯤에서 집으로 향했다.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이동하던 날. 흙먼지를 뒤로 하고 나가니 초록빛 바다다.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이동하던 날. 흙먼지를 뒤로 하고 나가니 초록빛 바다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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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을까?

해변에서 돌아와 장장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인터넷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얼굴에 윤기가 사라지고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진된 느낌이 들었다. 수영장 어딘가에 있는 남편과 아이들을 만나러 가니 남편은 어떤 노부부와 함께 즐거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북아일랜드 노부부는 1년 중 1개월만 본국으로 가고 나머지는 캠핑장 옆 동네의 집에 머무른단다. 캠퍼는 아니고 그냥 음료만 마시러 왔다는 설명이다. 할머니는 자신이 키운 3남매가 이제 손자들을 낳아, 그 손자가 4살에서 17살까지 여럿이라고 자랑한다.

생김새가 정말 다르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말과 눈매에서 애틋한 사랑이 가득 묻어났다. 그녀가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정말 축복 받은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다음 달 아일랜드로 돌아가면 손자의 손을 잡고 쇼핑을 다니며 그들이 원하는 드레스와 장난감을 사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남아일랜드와 영국의 역사 그리고 그 미묘한 관계에 대해 얘기를 주고받았다. 우리의 대화는 영국을 이루는 네 나라와 아일랜드의 상황보다 더 복잡해졌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우라가 느껴졌다. 외국인의 아우라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다. 낯설어서.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우라가 느껴졌다. 외국인의 아우라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다. 낯설어서.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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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아이들과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는 나를 위해 "나의 친구, 레이디에게 적합한 드링크"를 주문했으나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은 바텐더는 도수가 꽤 높은 칵테일을 만들어 주었다. 한국에서도 엉망이었던 나의 주량은 결국 국제적 주도까지 엉망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 칵테일에 입도 대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고상하고 배려심 많았던 할머니를 당황하게 했지만, 곧이어 돌아온 남편의 간은 흡족해 했다. 노부부는 돌아오는 토요일에 시간이 괜찮으니 우리 가족을 집으로 초대해 좋은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미 토요일 떠날 것이라 단호하게 말을 한 터여서 차마 수락하지 못했다.

남편이 있었더라면 무조건 '오케이' 했을 것을... 역시나 뒤늦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하자 남편은 매우 안타까워했다. 나는 왜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을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르던 노부부의 부유함에 압도된 것일까? 아니면 터번을 닮은 그녀의 모자가 낯설었을까?

어쩌면 "편견을 가진 남들과 달리 우리는 아시아인과도 스스럼없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그녀의 말과 행동이 묘하게 불일치한다는 느낌을 받아서였을까? 지금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다.

파두 공연의 아름다움과 나의 '센스 없음'

그날 저녁, 레스토랑에서 음악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한 달에 4번 정도 쇼가 배정되어 있는데 다행히 우리가 머무는 기간에 내가 좋아하는 기타 연주가 계획되어 있었다. 7시부터 저녁식사를 할 수 있고 9시부터 콘서트가 열린다. 시차에 적응하는 문제도 그렇고, 루즈 해변을 다녀오느라 활동량도 많았으니 밤까지 콘서트를 즐기려면 일단 아이들 낮잠을 재워야 했다.

"레드 썬."

아이들은 금세 골아 떨어졌고 야속한 알람은 정확히 오후 7시 30분에 울렸다. 한창 꿈속을 헤매던 아이들은 엄마 아빠에 의해 옷이 갈아 입혀졌다. 발을 땅에 대지도 않고 품에 안겨 공중 부양한 상태로 레스토랑 예약석으로 옮겨졌다. 우리 자리는 2층 야외석 중간, 맨 앞 열이었다. 이미 좌석의 반 이상이 찼고 사람들은 부지런히 뷔페의 음식을 먹으며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소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옆 자리를 예약한 사람은 오지 않았다. 대신 그 건너편에 앉은 '활달한데 이 활달함을 누구한테 풀어야 할지 대상을 물색하는 듯 두리번거리는' 개구쟁이처럼 귀여운 아저씨가 계셨다. 아저씨까지 챙기기에는 공중부양해서 착석하실 정도로 귀하신 송씨 자매가 뭐 씹은 표정으로 간간이 찡얼거렸다. 이를 해결하는 게 더 급해 아저씨의 눈길만 부담스럽게 뒤통수, 옆통수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언어는 한국어로, 방법은 복화술로 긴급 상황을 알렸다.

"여보, 옆에 있는 아저씨랑 좀 얘기 좀 하고 그래. 계속 쳐다보시면서 심심해 하신다."

그러나 성실하신 현이 아버지는 아이들 밥 떠먹이느라 또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꿈속에서 완전히 현실세계로 돌아온 아이들은 안정되어 보였다. 큰 접시에 가득 담아온 음식의 맛 덕분에 우리 입도 안식을 찾아갈 즈음, 우리는 옆 테이블의 네덜란드 부부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저씨 말로는 그 나라도 우리나라와 상황이 비슷하단다. 땅도 작고, 인구도 적고... 엄청나게 바쁜 삶이란다. 아저씨도 바쁘게 살다가 은퇴 후 여행을 다니는 중이었다. 아들에게 사업장을 물려주고 은퇴하려 했는데 국가에서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권해 르완다에 가서 2년 동안 프로젝트를 해야 한단다. 돈을 벌려면 아프리카로 가야 한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으나 여전히 리스크를 따지며 투자를 망설이는 우리나라가 당연한 줄 알았는데….

르완다가 '유럽의 스위스'라는 아저씨 말을 듣고 많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탈리아 캠핑장은 어떤지 묻는 질문에 "완벽하다"며 "사실 포르투갈은 저 밑이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남편은 적잖이 혼란스러워한다. 다 때려치우고 이탈리아로 가고 싶어하는 낯빛이다. 아, 이탈리아…!

포르투갈 전통 가요인 '파두' 공연이 이어졌다. 클래식 기타와 포르투갈 기타 반주에 맞추어 50대의 여가수가 노래를 한다. 클래식 기타는 베이스처럼 상대적으로 묵직한 저음의 반주를 넣었다. 비올라스러운 느낌의 포르투갈 기타가 경쾌하고 다소 빠른 반주를 한다. 은색 물고기가 퐁퐁 튀어 오르는 느낌이다. 파두는 터키의 그것보다 빨랐고 스페인의 그것보다 경쾌했다. 가장 경쾌한 부분에서는 마치 요들송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우린 2시간 동안 총 4번 리바이벌하는 그녀의 공연을 3번 듣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국적 국기가 내걸린 레스토랑에 아시아 어느 나라의 국기도 없었다. 그녀는 감사하게도 끝인사로 "아리가또"라며 우리를 챙겨주었다. 그녀의 배려에 감사하면 그만인 것을 나는 "맙소사, 우리는 한국인인데"라고 말해 우리 옆 테이블의 네덜란드 부부를 웃게 했다. 정작 착한 그 가수는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그녀는 한 번 더 웃으며 "아리가또"라고 했다.

오늘 나는 좀 센스가 없었다. 캠프장에서 만난 할머니의 인간관 속에는, 어쩌면 인종이나 국가가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 호의를 계산하고 오해한 30대 한국 여성의 거절이 치졸하게 느껴졌다. 지구의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온 여행객을 위해 그나마도 익숙한 언어로 건넨 가수의 인사말을 죽자고 시정하려고 한 나는 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아~ 나의 센스 없음이여!

덧붙이는 글 | 2012년 맞벌이 엄마, 아빠, 5살, 7살 두 딸은 직장과 유치원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쉼(태국), 사랑(터키), 도전(유럽캠핑)을 주제로 5개월간 여행하였습니다. 본 여행 에세이는 그 중 도전을 주제로 한 유럽캠핑에 관한 글입니다.



태그:#리씨네 여행기, #유럽캠핑, #포르투갈, #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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