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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부터 6월까지, 혼자 필리핀 팔라완 배낭여행을 했다. 더 '늙기' 전에 떠난 여행이었다. 팔라완의 북부여행은 '바다와 몸', 남부여행은 '바다와 사람들'이었다. 팔라완은 안전하고 아름답고 순수했다. 고되고, 거칠고, 가난하고, 고맙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행을 했다. 두 달 만에 얼굴은 새카맣게 탔고 몸무게는 11kg 빠졌다. 팔라완은 이제 내게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리운 곳이 되었다. - 기자 말

바라쿠다 호수
▲ 코론 바라쿠다 호수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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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뭘 경험했는지 알아? 와우! 장난 아니었어. 그 여운이 가시지 않네. 지금은 밤 11시 40분. 물론 피곤하지. 저녁 때 레드 호스(Red Horse)도 몇 잔 걸쳤고. 독한 맥주야. 지금도 좀 알딸딸해. 아, 덥다! 선풍기 한 대가 천장에서 돌고 있는데 있으나 마나, 도나마나. 괜찮아. 정 못 참겠으면 찬물로 샤워하면 돼.

혼자 떠든 수다 속에 담은 팔라완의 추억

간밤에 쓰다만 여행일지였다. 여행일지가 그제부터 어쩌다 대화체가 돼버렸다. 수다를 떠는 것처럼 주저리주저리. 혼자라서 그런가. 아무튼 지난밤 갑자기 졸음이 밀려와 노트를 펼쳐 놓은 채 잠들었다. 발전기 소리 때문에 밤새 자다 깨다 했다. 코론(Coron)시는 하루에도 수차례 시도 때도 없이 정전이다. 전기가 끊기면 상가 곳곳에서 자가 발전기를 돌린다. 시끄럽다.

지금도 숙소의 자가 발전기가 지축을 갈아대는 소리를 내며 돌고 있다. 트라이시클(삼륜 오토바이)이 골목길을 지나며 경적을 울린다. 그런데 며칠 사이 적응됐나? 참을 만하다. 오늘은 작정하고 늦잠을 즐기려고 했다. 종일 빈둥거리며 쉴 셈이었다. 그런데 새벽 6시, 눈이 딱 떠졌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바다에 나갔던 날들처럼.

코론에 오자마자 시작한 스쿠버다이빙 강습이 어제 끝났다. 이론시험도 통과했다. 드디어 어드밴스드 오픈 워터 다이버(advenced open water diver) 자격증을 땄다. 총 5일이 걸렸다. 이제 세계 어디를 가든, 육지뿐 아니라 해저도 여행할 수 있다. 하지만 실력은 아직 꽝이다. 운전면허증 땄다고 당장 운전이 능숙한 게 아니듯이. 연습이, 경험이 더 필요하다. 어쩌면 장롱면허처럼 장롱자격증이 될 수도 있겠고.

아, 벌써 덥다! 더 자기는 글렀다. 쓰다만 여행일지를 읽어봤다. '내가 오늘 뭘 경험했는지 알아? 와우! 장난 아니었어.' 정말 그랬다.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 그 느낌, 그 황홀한 체험을.      

그러니까 어제 오전에는 또 CYC(Coron Youth Club) 섬 앞바다에서 스쿠버다이빙 강습을 받았다. 전날 렉 다이빙을 같이 했던 김 강사, 오픈 워터 다이버 강습을 같이 받았던 박, 다이브 숍의 필리핀 다이버 알위, 따순, 강습생 인재씨랑 승환씨는 근처에서 펀 스쿠버 다이빙(Fun Scuba Diving)을 했다. 나는 친절한 강사 아영씨랑 나침판을 보며 수중에서 방향 찾기 연습을 했다.

점심 먹고 방카가 코론 섬(Coron island. 코론 시와 이름이 같다)의 북쪽 해안을 향해 달렸다. 코론 섬은 도시나 리조트가 들어선 근처의 개발된 섬들과 달랐다. 문명이 상륙하지 않은 석회암 섬이었다. 딱반와(Tagauas) 원주민들만 사는 섬. 멀리서 볼 땐 평범했다. 푸른 바다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암회색 석회암 절벽의 풍광이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카메라 셔터를 정신없이 눌렀다.

방카로 코론 섬에 가다
▲ 팔라완 방카로 코론 섬에 가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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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론 섬의 석회암 절벽
▲ 팔라완 코론 섬의 석회암 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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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카에서 내리기 전, 아영씨가 브리핑을 했다. 우리는 코론 섬의 바라쿠다 레이크(Barracuda Lake)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할 참이었다.

"바라쿠다 호수에서는 월(wall) 다이빙을 한다. 호수에는 바라쿠다(농어목 꼬치고기과 물고기)가 딱 한 마리 살고 있다. 운 좋으면 볼 수 있다. 아니, 보면 운수대통. 고동, 메기, 징거미새우 외에 다른 생물체는 거의 없다. 호수는 좁은 동굴를 통해 바다와 연결돼 있다. 눈으로 보이는 수심은 약 40m. 바닥은 화산재로 덮여 있다. 깊이에 따라 물의 온도와 성분이 달라진다. 호수 상층부는 민물이다. 수심 5m에서 15m는 따뜻한 소금물이다. 13m~15m 사이로 가다보면 28도의 물에서 37도 정도의 뜨거운 물을 만나게 된다. 수온약층이다. 뜨거운 물속을 지나니 다이빙 슈트는 벗고 들어가도 된다."

흥미진진했다. 특별한 체험이 될 것 같았다. 수영복 차림으로 섬에 내렸다. 나무 사다리를 타고 뾰족뾰족한 석회암 바위 언덕을 넘었다. 열대의 햇살이 선인장 가시처럼 맨살을 찔러댔다. 고맙게도 무거운 다이빙 장비는 필리핀 다이버들이 들어다 줬다. 멀지는 않았다.

아! 탄성이 저절로 터졌다. 말 그대로 경치가 끝내줬다. 석회암 절벽을 병풍처럼 두른 고요한 호수다. 농담 짙은 푸른 물빛. 나도 저 절벽의 나무가 되어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나무처럼 늙지 않고 죽을 때까지. 바라쿠다 호수는 필리핀에 있는 호수 중에서 물빛이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호수로 꼽힌다. 자자한 명성이 헛소문은 아니었다. 소문을 쫓아 온 사람들이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유럽인 다이버들도 많았다.

바라쿠다 호수에서 바다로 가는 길
▲ 코론 바라쿠다 호수에서 바다로 가는 길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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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제 본 풍경들이 삼삼하게 떠올랐다. 간밤에 쓰다만 여행일지를 마저 써야겠다. 엎드려 노트를 펼쳤다.

뭘 경험했기에 호들갑이냐고? 말해줄게. 바라쿠다 호수에서는 알위가 나를 안내했어. 19살 필리핀 다이버. 알위의 수신호를 받으며 호수로 서서히 하강했지. 알위는 내 앞에서 나랑 마주보며 움직였어. 자세가 마치 의자에 앉아 있는 것 마냥. 뒤로 가는 거야. 아영씨도 항상 그 자세로 날 이끌었는데 사람을 참 편안하게 만들어. 눈을 맞춰주니까. 어느 정도 내가 중성부력을 맞춘다 싶으면 그때 자세랑 위치를 바꿔. 내 앞이나 옆으로 오지.

뚝, 발전기 소리가 멈췄다. 전기가 들어왔다. 발전기 소음이 사라지니 세상에 이렇게 조용할 수가. 가게 문을 열고 하루를 시작하는 골목길 풍경의 기척이 들려왔다. 트라이시클이 창문 아래로 툴툴거리며 지나갔다. 덥다! 매일 방카를 타고 바다로 나갔으니 에어컨이 없는 방이 이렇게 더운 줄 몰랐다. 오히려 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젖은 몸으로 맞는 바닷바람이 춥다 싶었는데. 볼펜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욕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뒤집어썼다. 샤워를 하고나니 출출해졌다. 식당은 7시에 문을 연다. 10분 전. 다시 노트 위에 엎드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호흡이 편안해졌어. 날숨과 들숨으로 어지간히 중성부력도 맞춰지고. 몸이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어. 천천히 나아가며 물속 풍경을 살필 여유가 생겼지. 화산이 폭발해 만들어진 현무암 절벽, 뾰족뾰족한 바위를 뒤덮은 물이끼, 태풍 하이옌 때 부러져 호수에 잠긴 나뭇가지들, 화산재 덮인 바닥...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어. 바닷속처럼 눈이 휘둥그레지게 화려한 풍경은 아니지. 그래서 더 신비로웠을 거야.

바라쿠다 호수에서 스쿠버다이빙
▲ 코론 바라쿠다 호수에서 스쿠버다이빙
ⓒ 김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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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쿠다 호수에서 스쿠버다이빙
▲ 코론 바라쿠다 호수에서 스쿠버다이빙
ⓒ 김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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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물빛! 나는 그 몽롱한 푸른 물빛에 취해갔어.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간이었어. 그 속에서 내가 물고기처럼 유영하고 있다니. 꿈속이 아니곤 그럴 수가 없는 거지. 황홀했어. 가다보니 한 순간 물이... 아, 따뜻하다! 또 다른 꿈속으로 옮겨온 거지. 민물과 바닷물. 28℃와 37℃. 섞이지 않는 게 이상하지? 그 경계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흐릿해. 그 물빛이 또 환상적이야. 코론이 렉 다이빙(Wreck diving. 침몰선 다이빙)의 메카라지만, 이 호수를 찾아오는 다이버들도 많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어떻게 설명해야 네가 그 경이로움을 이해할까.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길 천번 만번 잘했지. 몸이 있어서 참 좋아. 이지상 여행작가의 표현대로 '살아있음의 황홀감'을 제대로 맛본 거야. 그래, 그 순간만큼은 아무 의심 없이 '인생은 아름다워라!' 노래 부를 수 있었어. 그리고 울고 싶었어.'

'살아있는 황홀감' 느꼈던 바라쿠다 호수 다이빙

아무래도 밥부터 먹어야겠다. 속이 쓰렸다. 여행일지를 덮고 지갑을 챙겼다. 가까운 현지인 식당으로 갔다. 매일 아침밥을 거기서 해결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가장 싼 음식점이었다. 10페소(250원)에 밥 한 덩어리와, 30페소에 빡삣(호박과 야채들을 볶아 만든 필리핀 요리) 한 접시를 샀다. 오늘은 가지고 가겠다고 했더니 비닐봉지에 담아줬다.

배는 고픈데, 식욕이 썩 당기진 않았다.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산호 다이브 센터에서 대접을 빌려왔다. 거기에 밥을 덜고 물을 부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빡삣을 반찬으로 물에 만 밥을 후룩후룩 넘겼다. 숙소 로비로 나가 보온병에서 뜨거운 물을 한 잔 받아왔다. 사리사리(구멍가게)에서 산 커피믹스 한 봉지를 탔다. 프림이 많이 들어있어서 커피 맛이 흐리멍덩했다. 천천히 다 마셨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의 낭만을 즐기듯.

휴우, 덥다! 쉬겠다고 방에서 온종일 뒹굴면, 찜통 속의 채소처럼 뭉그러져 버리겠다. 나가야겠다. 여행일지 노트를 들고 어디 시원한 그늘 아래 앉아, 어제 맛본 감동을 마저 써야겠다. 외출 채비를 했다. 소지품을 챙겼다. 카메라, 노트, 볼펜, 생수... 그런데 어딜 가지?

꽤액~ 꽥~ 갑자기 돼지 멱따는 소리가 귀청 찢어지게 울려왔다. '무슨 일이지? 어디서 나는 소릴까?' 궁금해 못 참겠다. 소리의 진원지를 쫓아 숙소 뒤편 선착장 쪽으로 달려갔다. 먹구름이 바다 쪽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비가 오려나 보다.  


태그:#팔라완, #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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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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