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필요한 거 바꿔 가세요~. 외상도 됩니다."

독특한 장이 섰다. 매대 위에 늘어놓은 물건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다. 숫자 대신 '물물교환 합니다'라는 문구를 써놓은 팻말에 보는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외상도 돼요. 외상~!"이라고 외치는 한 남성의 우렁찬 목소리에 이 장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진다.

물물교환 물품들이 가판에 진열되어있다.
 물물교환 물품들이 가판에 진열되어있다.
ⓒ 김민화

관련사진보기


물물교환을 기다리는 귀한 물건들.
 물물교환을 기다리는 귀한 물건들.
ⓒ 김민화

관련사진보기


매대에 올라와 있는 것들은 전남 강진에서 직접 농사지어 담근 갓김치와 파김치, 태양 빛 듬뿍 머금은 무말랭이, 방목해 키운 소에서 짠 우유로 만든 요거트와 치즈 등 자연과 사람이 만나 만들어진 음식들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장이 서는 시간에 맞춰 여러 지역에서 보내온 물건들이 속속 도착한다. 진귀한 음식과 물건들이 모인 여기는 페이스북 그룹 '재능기부와 물물교환의 콜라보' 회원들이 연 장터였다.

12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늘장에 '재능기부와 물물교환의 콜라보' 회원들이 모였다. 온라인에서 이뤄지는 물물교환을 오프라인에서 진행해보자는 취지였다. 오전 9시부터 각지에서 올라온 회원들은 오픈 준비를 했다. 11시부터는 하나둘 모인 사람들로 본격적인 물물교환 장이 '개시'됐다.

돈이 보이지 않는 시장

물물교환 성사 후 인증샷 찍는 교환자들.
 물물교환 성사 후 인증샷 찍는 교환자들.
ⓒ 김민화

관련사진보기


참가자 고종혁씨는 직접 발효시켜 예쁜 병에 담아 온 효소와 우리밀로 만든 밀가루를 교환했다. 블루베리 잼은 컵으로 바꿨다. 천연염색으로 만든 스카프를 들고 나온 참가자는 수제품 브로치를 들고 나온 분과 물물교환을 했다. 교환이 만족스럽게 진행되면 한바탕 웃음이 오간다. 서로 '인증샷'을 또 찍는다. 돈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서울 난곡동에 사는 정선옥씨는 딸과 함께 이곳에 왔다. 딸의 장난감과 가방 등을 들고 나왔다. 아이가 내놓은 가방은 어느새 색종이 세트와 다이어리로 변신해 있었다. 아이는 만족하는 듯 교환한 물건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정선옥씨는 "아이를 키우다보니 새 것을 사고 금세 못 쓰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물건을 필요한 분과 교환할 수 있게 돼 아주 좋다"라며 "아이가 소비보다 교환의 가치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자신이 들고 온 가방과 색종이 세트, 다이어리를 물물교환 후 즐거워 하고 있는 아이.
 자신이 들고 온 가방과 색종이 세트, 다이어리를 물물교환 후 즐거워 하고 있는 아이.
ⓒ 김민화

관련사진보기


물물교환 할 물건을 미처 챙겨오지 못한 사람들이 부러운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때 "외상도 가능합니다"라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온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고 교환 대상자에게 다음에 필요한 물건을 보내주는 것이 이곳의 외상법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물물교환인 것이다. 머뭇거리던 사람들의 눈과 손이 분주해진다.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 연락처를 챙기는 사이 얼굴에는 어느새 화색이 돈다.

공덕동에서 온 이미영씨는 "좋고 놀랍다, 서로 신뢰하기 힘든 세상에서 이런 거래가 가능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라며 "무엇을 얼마만큼 보내드려야 할지 고민되지만, 그 고민이 오히려 기분이 좋다"라고 했다. 갓김치와 고추가루, 두부와 우유 등을 한아름 챙기며, 교환자의 연락처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갑이 필요 없는 쇼핑을 한 것이다.

갓김치와 지식을 물물교환 해 즉석 강연을 하는 김은진 교수.
 갓김치와 지식을 물물교환 해 즉석 강연을 하는 김은진 교수.
ⓒ 김민화

관련사진보기


장터 한쪽에서 누군가 마이크를 잡았다. 즉석 강연이었다. 강연자는 '재능기부와 물물교환의 콜라보'의 회원인 원광대학교 법학대학원 김은진 교수다. 강연료는 갓김치다. 김 교수는 강진에서 올라온 갓김치를 받고, 자신의 지식을 장터에 내놓았다. 자본주의 시장의 물질적 가치로 환산한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거래가 이 현장에서 일어난 것이다.

필요의 가치를 우선하고 도-농의 조화를 꿈꾸는 이들

전남 강진에서 농사를 짓는 강은규씨는 어느 날 빵이 먹고 싶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자신이 만든 떡과 바꿔먹자는 말과 함께. 충북 제천에서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심소영씨는 이 글을 보고 강은규씨에게 빵을 보냈다. 물물교환이 성사되었다. 빵과 떡의 교환에서 비롯된 만족감은 돈의 가치를 뛰어넘었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이렇게 모임은 시작됐다.

빵과 떡의 물물교환 성사로 '재능기부와 물물교환의 콜라보'를 만든 심소영씨와 김은규씨.
 빵과 떡의 물물교환 성사로 '재능기부와 물물교환의 콜라보'를 만든 심소영씨와 김은규씨.
ⓒ 김민화

관련사진보기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어 문을 연 지 3개월 만에 회원 수가 1700명을 넘었다. 페이스북 그룹에는 양말, 머플러, 빵 등 교환을 원한다는 글들이 쉴 새 없이 올라온다. 그리고 물물교환 성사 후 올라오는 후기에는 '좋아요'와 '고마워'라는 말로 가득하다.

물물교환의 현장의 "숫자를 잠시 내려놓으세요", "값보다 가치", "말로 주고 되로 받는 마음으로"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모든 물건들이 화폐의 가치로 치환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꿈같은 말들이다. 그러나 '재능기부와 물물교환의 콜라보'에서는 가능하다. 화폐의 가치보다 필요의 가치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물물교환을 위한 리스트를 작성해서 교환자를 연결 시키기 위해 만든 게시판.
 물물교환을 위한 리스트를 작성해서 교환자를 연결 시키기 위해 만든 게시판.
ⓒ 김민화

관련사진보기


페이스북 그룹 운영자인 김은규씨는 물물교환의 목적에 대해 "기존의 물물교환은 돈의 가치를 기본으로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활성화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라며 "우리는 화폐의 가치를 무시하자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가지고 온 물건을 조건 없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는 방식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필요 이상의 축적을 위해 서로 닫고 사는 대신 나눔의 가치, 필요의 가치를 우선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덧붙였다. 그는 페이스북 그룹의 폭발적인 반응은 나눔의 가치를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라고 했다. 

'재능기부와 물물교환의 콜라보'의 행수(모임의 장) 심소영씨는 도-농의 자연스러운 조화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농촌의 좋은 잉여 농산물과 도시의 재화 등을 물물교환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 이해하며, 도-농 간의 어색함을 줄여가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멀어 보이는 농촌이 아니라 가까운 농촌으로…. 이 모임의 시작도 옛 선조들이 음식을 서로 바꿔먹듯이 떡과 빵을 바꿔먹은 데서부터 출발했잖아요." 

'필요'가 저울도 되고 가치가 되는 시장. 왔던 이들 누구 하나 아쉬움으로 돌아서게 만들지 않는 장터였다. 이곳에서는 물물교환이라는 원시적인 거래를 통해 나눔의 정, 새로운 관계나 신뢰를 함께 얻어 간다. 사람들은 물물교환을 마친 후 언제 또 장을 여는지 묻는다. 심씨는 아직 정기모임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회원들과 논의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스카프와 김치를 물물교환 중인 사람들.
 스카프와 김치를 물물교환 중인 사람들.
ⓒ 김민화

관련사진보기




태그:#재능기부와 물물교환의 콜라보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밀알이 되는 글쓰기를 위하여 오늘도 파닥파닥~~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