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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즈의 슬픈 노을을 지켜본 다음날 우리는 그곳에 긴 안녕을 고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는 볼리비아와 페루의 국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코파카바나(Copacabana). 국경이라고는 하나 겨우 3시간 거리기에 별일 없겠다 싶었지만 볼리비아의 버스는 언제나 곤욕스럽다. 좁은 간격 탓에 앞 의자에 무릎이 닿을락 말락 하는 불편한 자세로 구겨진 지 2시간,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던 그 순간 창 밖 풍경이 묘하게 바뀌었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티티카카 호수와 코파카바나 마을. 라파즈에서 코파카바나로 갈 때는 버스 오른편에 앉아야 한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티티카카 호수와 코파카바나 마을. 라파즈에서 코파카바나로 갈 때는 버스 오른편에 앉아야 한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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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바다라고 생각했을 호수의 이름은 티티카카(Lake Titicaca).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다. 한참을 달려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호수길이 끝나고 버스가 달리는 방향의 먼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봉긋 솟아 오른 언덕 사이로 얽혀있는 작은 마을이 보였다.

마침내 도착한 코바카바나 (Copacabana) 의 버스터미널에 큰 짐을 맡겨 두고 냉큼 호수가로 발길을 돌렸지만 뛴다고 생각한 발걸음은 걷는 것보다 아주 약간 빠른 수준일 뿐. 이곳은 여전히 한라산 두 배 높이다.

아직은 개발의 물결에서 동떨어진 어촌, 코파카바나
 아직은 개발의 물결에서 동떨어진 어촌, 코파카바나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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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도착한 부둣가에는 호수 위에 떠 있는 '태양의 섬'으로 가려는 사람들 외에는 고요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는 바람결을 따라 마치 파도가 치듯 묘한 물결을 만들고 그 모습에 호기심이 발동해 살짝 손끝을 담갔다가 혀끝에 데어 보지만,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버스터미널에서 호숫가로 내려오는 거리의 양쪽에 늘어선 가게들은 너도나도 이곳의 명물인 민물 송어요리 '트루차' 간판을 커다랗게 걸어놓았는데 우리는 조금만 더 배고픔을 참기로 했다.

티티카카 호수에 언제나 구름이 걸쳐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티티카카 호수에 언제나 구름이 걸쳐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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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로 알려진 티티카카의 고도는 3810m, 면적은 8100평방km 규모로는 러시아 바이칼 호에 이어 두 번째다. 1862년 이곳에서 증기선이 첫 항해를 시작한 이후로, 티티카카는 세계에서 항해할 수 있는 가장 높은 호수가 되었다. 여느 시골 어촌과 별다를 게 없는 풍경은 눈앞에 펼쳐진 물길이 바다가 아닌 호수라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 오늘날에 이르렀다.

쇼핑센터도, 으리으리한 호텔도 없는 거리에는 마차가 지나다니고 나귀가 짐을 나를 것만 같은 향수와 아늑함이 있다. 멀리 시선을 돌리면 마을과 호수를 한눈에 바라볼 만한 언덕이 눈에 들어오지만 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고도에서 높은 곳을 오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잘 알기에.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는 티티카카 호수의 사람들이 욕심 없이 현재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이토록 한가롭고 평화로운 호수의 고립적인 위치가 거대한 산업화를 비껴가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내가 시간여행을 할 수만 있다면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서 머지않아 빌딩숲으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르는 이곳을 사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접근 금지'라고 표시해 두고 이 풍경이 영원히 머무르도록 하고 싶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했던가. 선착장 주변에 잔뜩 쌓여 있는 모래에서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우리는 태양의 섬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잉카의 탄생 신화가 깃든 태양의 섬

1시간 반을 이동하기에는 다소 좁은 보트에 올라 티티카카 호수를 건넌다. 기우뚱 거리는 보트의 트인 공간 밖으로 호수는 제 모습을 보여줬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한다. 자기가 바다인 줄 착각한 호수의 심술일까. 직접 배에 올라보니 호수라던 녀석은 제법 파도도 일고 물살도 거칠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1층은 짐을 둘러맨 원주민들이 대부분이고 탁 트인 지붕은 여행자들 차지다. 그곳에 올라 호수를 보는 것도 좋겠지만 내 관심은 맞은 편에 앉은 수줍은 꼬마 아이였다. 힐끔힐끔 여행자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동자는 햇빛을 잔뜩 받은 호수 표면처럼 맑고 빛났다. 세상에 이런 눈동자가 있구나 할 정도로. 몰래 몰래 훔쳐보던 시선이 나와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엄마의 품으로 파고든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하루 다섯번, 배가 드는 시간이면 시간을 거슬러 나귀가 언덕으로 짐을 나르는 태양의 섬의 진풍경이 펼쳐진다.
 하루 다섯번, 배가 드는 시간이면 시간을 거슬러 나귀가 언덕으로 짐을 나르는 태양의 섬의 진풍경이 펼쳐진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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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배가 태양의 섬에 닿자, 조용할 것만 같던 호수변이 요란스럽다. 바깥으로 빠져나오니 그곳에는 내가 꿈꿔왔던 풍경들이 펼쳐졌다. 머리에 봇짐을 지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선착장에 짐이 쌓이자 마중 나온 사람들은 나귀에 짐을 싣고 해발 3600m 언덕을 천천히 오른다.

맞은편에는 낮은 계단이 있었는데 마치 집합이라도 한 것처럼 섬의 꼬마아이들이 모여 앉아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커다란 배낭과 희한한 검은 안경을 쓰고 배에 타고 내릴 뿐인, 그 별스러울 것 없는 광경을 녀석들은 마치 관람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도, 놀이터도 없는 외로운 섬에 사는 아이들에게는 그 모습이 영화 속 장면 같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그들이 그러하듯이. 혹은 여행자들에게서 뭍어나는 특유의 묘한 바람냄새를 맡았을 지도.

태양의 섬은 태양신의 아들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잉카의 후손들이 처음 정착한 곳으로 전해진다.
 태양의 섬은 태양신의 아들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잉카의 후손들이 처음 정착한 곳으로 전해진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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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 오른쪽 절벽 위에 위치한 식당에서 티티카카 호수의 특산품이라는 '트루차'를 먹었다. 민물에서 난 생선을 튀겨 올린 요리는 덤덤했고 특별한 맛을 느끼기 어려웠다. 트루차는 별미라기 보다는 이 지역에 사는 몇 안되는 생물 중 하나일 뿐이다. 어쩌면 평생을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미식'이란 일종의 사치일지도. 그보다는 그 식당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좋았다. 바다인 척 하는 호수의 모습과 머리에 봇짐을 지고 혹은 나귀와 함께 느긋하게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식사를 마치고 내려서니 구경만 하던 꼬마아이들이 어느새 다가와 호객행위를 해댄다. 그것도 매우 유창한 영어로. 어디서 배웠냐고 하니 그냥 알게되었다는 녀석.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인 것일까. 숙소라고 해봐야 민박 네댓 개가 전부인 이곳에서 한 아이의 안내를 받아 언덕 위의 가정집에 도착하니 녀석은 슬그머니 손을 내밀고 '우노 솔'(우리돈 150원) 을 외친다.

이집트였다면, 꿈쩍도 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동전과 더불어 가지고 있던 비스켓까지 모두 내어 주었다. 밉게 볼라면 끝도 없겠지만 어쩌겠는가. 이 조용한 일상에 허락없이 끼어들어 이젠 돈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귀찮게 군 것은 여행자인 것을. 그래서 볼리비아에서는 돈을 쓰면 쓸수록 미안해진다.

식수와 전기가 귀한 태양의 섬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세월의 흔적이 훈장처럼 얼굴에 밴 안주인은 그 사실을 알리면서도 여러 번 미안해 했는데 나는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기야 아무려면 어떠랴. 하루에 다섯 번 들고 나는 배가 섬에서 벌어지는 유일한 '특별한 일'이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의 삶. 여행의 묘미는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수천 가지 삶을 살짝 엿보는 데에 있는 것을.

해발 4000m의 석양

언덕 위 양치기가 바라보던 티티카카 호수의 전경.
 언덕 위 양치기가 바라보던 티티카카 호수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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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대충 짐을 놓고 해가 지기 전에 태양의 섬 꼭대기에 오르기로 했다. 온통 계단식으로 미로 처럼 길이 나 있는 태양의 섬 꼭대기에 오르자 비로소 평평한 곳이 나타났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한 양치기를 만났다. 빈 터를 왔다 갔다 하는 양들과 달리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앉아서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이 호수를 바라보던 그가 가까이 다가서는 나를 향해 문득 고개를 돌리자 괜한 방해를 했다 싶었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시 한 수 짓고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곳곳의 크고 작은 섬에 턱하고 걸쳐진 티티카카 호수의 모습은 그야말로 진풍경이다. 강하게 불어대는 바람에 회오리 바람처럼 하늘을 수 놓은 구름을 배경으로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제법 긴 시간을 그 언덕의 끝에서 기다렸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마침내 섬광과도 같은 노을빛이 하늘을 집어 삼키며 긴 그림자를 만들고, 멀리 설산은 구름에 몸을 숨긴다.

하늘에서 가까울 수록 노을도 장관을 이룬다.
 하늘에서 가까울 수록 노을도 장관을 이룬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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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호수답게 호수에 반쯤 걸쳐 있던 둥근 달은 어느새 하늘 중턱까지 떠올라 호수를 은은히 비췄다. 괜히 바다인 척 하던 녀석은 그 빛에 놀랐는지 해질 무렵 요란하던 파도마저 고요해졌다. 언덕을 내려오던 길, 대충 돌로 쌓아 올린 집들의 돌담 너머에는 아담한 등불이 켜진다.

안도 밖도 고요한 하늘 호수의 밤. 멀고 먼 이국의 호수 꼭대기에 면한 작은 집에서 달빛에 갇혀 누군가를 그리던 밤. 시간은 겨우 9시지만 섬의 불빛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준과 나의 여행도 함께.

간략여행정보


볼리비아와 페루의 국경에 정확히 걸쳐 있는 티티카카 호수는 양국에서 모두 관람이 가능하며 그 특색이 조금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이 여행하는 방향으로 한 곳만 보기 마련이다.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를 접한 마을인 코파카바나(Copacabana)는 작지만 여행자를 위한 예쁜 숙소와 식당들이 한 거리에 몰려있어 언제나 여행자들로 붐빈다.

코파카바나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바로 '태양의 섬' 으로 매일 5회, 1시간 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태양의 섬에는 다양한 트레킹 코스가 있으며 시간이 촉박하다면 오전 일찍 출발해 한나절 트레킹을 즐긴 후 빠져 나올 수 있지만, 섬 안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환상적인 석양을 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단, 전기가 부족한 섬 내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며, 일몰이 되면 거리를 비추는 불빛이 아예 없으므로 길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꼭 숙소로 돌아가야 새까만 밤길을 헤매는 일이 없다. 고원지대의 추위에 대비한 두꺼운 옷도 필수다.

좀 더 자세한 티티카카 호수 여행 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3625949



태그:#티티카카호수, #볼리비아 티티카카, #코파카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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