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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호씨와 아이들.
 신경호씨와 아이들.
ⓒ 신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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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동네는 서울의 변두리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밭과 밭 사이로 난 신작로를 따라 10여 분 걸어 들어가면 아담한 산자락 밑의 시골 동네 풍경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이제 만 2살 된 아들의 손을 잡고 걷는다. 길 오른쪽으로 송사리가 헤엄치는 작은 개울을 따라 길을 걷다 보니 아카시아가 쭉 늘어선 길이 나온다. 하얀 아카시아 꽃잎을 따는 몇 명의 조무래기 속에서 어릴 적 나의 모습도 보인다.

조금 더 걸으니 어른 서너 명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나타난다. 나무 밑을 지나 구멍가게에서 왼쪽으로 접어드는 길에 막 접어들었을 때 아버님의 모습이 보인다. 평생을 선비처럼 사신 아버지가 흐뭇할 때 짓는 그 표정 그대로 나와 아들놈을 바라보신다. 집안의 장손인 탓일까? 엄한 분이셨지만 장남에 대한 사랑은 유난히 크시다. 그런 아버지가 장손인 손주를 바라보시며 평소에 아끼던 미소를 환하게 짓는다.

언제나 부족한 못난 자식이지만 오늘만은 나도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해진다. 나도 아들 녀석을 바라 본다. 내 손을 잡은 아들의 꼬물거리는 손가락과 울퉁불퉁한 머리통도 만져지는데 아들의 얼굴 모습에서, 필름이 딱 끊겼다. 아무리 바라봐도 아들의 얼굴은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얼결에 눈을 뜨니, 꿈이다.

망막색소변성으로 끊어진 나의 시력

얼마 전 꾼 꿈 이야기다. 꿈처럼 난 아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결혼한 지 만으로 6년. 그동안 아내의 얼굴을 대여섯 번 보았을까? 만 5살의 딸 얼굴은 시야가 극도로 좁은 탓에 조각조각 나눠 보았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난 망막색소변성증이란 질병으로 실명을 했다. 먼저 야맹이 시작되고 시야가 좁아지며 이후로 점차 시력이 없어져 마침내 실명을 하는 질병이다. 2006년 결혼할 때는 약간의 시력이 남아있어서 컨디션이 좋거나 주변의 밝기가 현저하게 좋으면 눈앞의 사람 얼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운이 좋은 날에 아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후 떨어진 시력은 그것조차도 불가능하게 했다. 딸아이가 한살 무렵엔 그 작은 얼굴을 3~4개로 나누어 보고, 그것을 퍼즐처럼 머릿속에 맞추며 아이의 얼굴을 그려야 했다.

흔히 사람의 눈을 카메라에 비교하곤 한다. 내 눈은 상이 맺히는 곳, 그러니까 카메라에선 필름에 해당하는 망막의 시세포가 원인을 알 수 없이 죽어가는 질병이다. 처음 발병한 게 20대 중반이니 이제 20년이 되어간다.

그래도 난 운이 좋은 사람이다. 같은 증상을 가지고도 시력 저하의 속도가 아주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같은 질병을 가진 사람 중에는 1,2년 만에 완전히 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에 비해 20년간 진행된 나는 아직도 약간의 불빛을 감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처음엔 이런 질병이 있는지도 몰랐다. 다니던 직장은 정부 산하기관이었다. 시력의 이상을 느낀 건 업무처리할 때의 눈 피로감이었다. 당시엔 회계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계정 원장 등을 기입할 때 눈이 매우 피곤했고 작은 칸에 숫자를 넣기가 어려워졌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사용하는 컴퓨터의 화면 배색에는 적응이 안 돼 개인돈을 주고 업무용 컴퓨터를 구입해야 했다. 시력 저하가 워낙 느리게 진행된 터라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리지도 못했고, 그만큼 나의 필름은 야금야금 죽어갔다. 회사를 그만둔 뒤 어느날 받은 우편물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게 되었을 때 내 눈의 카메라가 뭔가 심한 고장이란 걸 알았다. 그러나 그 카메라는 수리가 안 된다고 했다.

신경호씨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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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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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잃고 얼마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특히 책 한 권, 신문 한 줄도 읽지 못하는 정보 공백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우연히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가 있음을 알았다. 컴퓨터 화면의 글자를 음성으로 바꿔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 덕분에 다시 책을 읽고 인터넷을 하는 등 사회와 소통을 할 수가 있었다.

바다 건너 일본에 사는 현재의 아내와 '인터넷 연애' 끝에 결혼을 하고 '비'와 '새벽'이라는 예쁜 딸과 아들도 생겼다.

"당신은 눈 앞이 어떻게 보여? 앞이 까만색이야? 그런데 당신은 까만색이 어떤 건지 모르잖아."
"글쎄... 당신은 (눈) 뒤가 무슨 색인지 알아?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거야."
"그런가? 잘 모르겠네… 그럼 색깔은? 당신은 색깔을 본 적이 없으면서도 나름 옷을 코디하잖아?"
"그건 느낌으로 알지… 행복이나 사랑 이런 말은 실제 볼 수가 없어도 느낌이 있고 나름 색깔을 가지고 있듯이 색깔도 나름대로의 느낌이 있거든."
"그럼 우리 비는? 당신은 이렇게 예쁜 비의 얼굴을 못 봐서 슬프거나 힘들지 않아? 난 눈 따로 코 따로 봐서 퍼즐이라도 맞추는데…"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게 아니야. 당신보다 내가 훨씬 비 얼굴을 많이 보았을걸? 난 매일 비 얼굴을 만지고 젖 먹이며 비를 느끼고 있어."

어느날 밥을 먹다가 아내에게 불쑥 물었다. 아내는 3살 때 실명해 사물을 본 기억이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실체를 막연하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중도 실명한 나 역시 시각장애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게 많았다. 그 하나가 눈이 안 보이면 앞이 캄캄하게 보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앞이 까만색으로만 보이는 게 아니란 걸 많은 시각장애인과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우리 몸이 천냥이면 눈이 900냥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눈을 통해 얻는 정보가 매우 중요하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눈이 900냥의 값어치를 하려면 다른 100냥이 존재해야 한다. 텔레비전 속 자연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피부로 느끼는 바람이나 코로 느껴지는 상큼한 나무와 풀내음이 없다면 그 아름다운 자연은 텔레비전 속에만 존재하고 내 삶에는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시각장애인은 앞이 캄캄할 것이란 판단... 착각 마세요

요즘 카메라엔 필름이 없다. 디지털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내 눈의 카메라에도 필름이 없지만 세상을 인식하고 그려내는 데는 문제가 없다. 아내와의 밥상 대화에서 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 필름이 없어도 디지털카메라는 존재하듯 시각적 이미지를 볼 수 없어도 사물을 인지하는데 문제는 없다. 특히 그 인지 대상이 사람이라면 더욱.

나 역시 요즘은 필름에 의존하지 않는다. 데이터 저장방식은 필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꿈에서 아들의 모습을 그려내지 못했지만 작은 손가락을 만지는 감촉에서, 녀석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서, 울퉁불퉁 만져지는 머리통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벌써 아빠한테 덤비겠다고 온몸을 던져올 때 느끼는 서로의 몸짓을 통해 난 아들을 느끼고 그려낸다.

내가 살았던 고국의 산천은 컬러로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현재 사는 일본은 희뿌연 풍경이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칼라든 흑백이든 어디에서나 사람 냄새가 있고 그 정겨운 냄새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을 말할 친구도 있다.

필름이 없는 카메라를 가지고서도 인생은 충분히 즐겁다.


태그:#끊어진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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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1급 시각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과 그 삶에 맞서 분투하는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을 기사화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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