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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 기자말

1961년 10월 22일 오후 2시, 서울 을지로 1가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 735호실.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앞에 수사관 둘이 50대 후반의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창설 작업을 위해 반도호텔 7층 전체를 아지트로 사용하고 있었다. 남자가 의자에 앉자 김종필이 물었다.

"북에서 무슨 임무를 띠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박정희 의장께서 직접 오실 형편이 못 돼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여기에 하실 말씀을 녹음하시면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남북통일의 방안과 타협을 모색하러 왔소이다. 요즘 북쪽의 방송에서 박 의장을 비난하지 않지요? 서로 중상비방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통일 방안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지요."
"우선 7월경 남쪽이 서부전선 용매도에 영관급 장교를 보내서 남북협상회의를 갖자고 제의했는데 그 진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남북협상을 할 생각을 실제 갖고 있다면 외세의 간섭 없이 민족 간의 대치상태를 종식시키고 평화적 통일을 추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먼저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남북에 서로 비밀무역대표부를 설치하자는 안을 갖고 왔소이다."

황태성 "박정희 의장 만나 중대한 정보 직접 말할 것"

1963년 1월 7일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1963년 1월 7일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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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군사정권의 중앙정보부장 앞에서 남북협상을 말하는 이 남자는 북한의 무역성 부상과 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낸 거물급 '밀사' 황태성이었다. 황태성의 첫 얘기를 듣고 난 김종필은 다시 물었다.

"남과 북은 아직도 휴전 상황으로 엄중하게 대치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휴전선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더 할 얘기가 있겠지만 남북이 필요하다면 절차를 밟아서 해야 할 것입니다."
"박정희 의장에게 모종의 중대한 정보를 직접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만날 수 있게 주선해 주시오. 나는 김일성 수상과 노동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직접 위임을 받고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김종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면담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의 긴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북한 쪽의 동향을 파악할 필요성은 있었고 그래서 만나긴 했으나 자세한 얘기를 나눌 상황이 아닌 것으로 이미 내부 방침이 정해져 있었다.

더구나 중앙정보부는 이때 황태성과 면담한 사람은 가짜 김종필로 경찰 정보과 간부가 위장했던 것이라고 나중에 발표했다. 1963년 10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이 황태성 사건을 폭로하면서 박정희에 대한 사상논쟁을 벌일 때였다. 1963년 9월 28일 중앙정보부는 황태성 사건에 대한 전말을 발표, 야당의 공세를 차단하려 시도했다. 

"… 황은 곧 중앙정보부로 연행되고 2일간에 걸쳐 엄중한 신문을 계속했으나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중앙정보부장을 만나야만 모든 사실을 진술하겠다고 극력 항거하므로 동인에 대한 앞으로의 공작여건을 고려하여 수사의 수단으로서 당시 치안국 정보과 소속 박문병 경감(현재 치안국 근무)으로 하여금 동인이 요구하는 중앙정보부장으로 변장케 하여 1961년 10월 22일 14시경 반도호텔 735호에서 간첩 황태성을 수사관 2명의 입회하에 약 10분간 면접케 한바 … "

아무리 국가정보기관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날조인지 잘 구분이 안 되는 내용이다. 비록 면담자가 위장한 김종필이라 해도 일단 만나기로 하고서 10여 분간 면접했다는 것은 상식과 경험칙에 비추어 맞지 않는 시나리오다. 후에 황태성은 재판정에서 마주친 조카사위 권상능에게 "정보부장 만나서 할 말을 다 했다"고 했다.

자신이 서울에 온 임무에 대해 할 말을 다했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을 터다. 그러나 정보부장이 그를 만나서 긴 시간을 보냈다고 하면 또 여러 억측이 나돌 것이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 짧게 면담한 것으로 발표한 것이다. 

야당은 또 황태성이 김종필뿐 아니라 박정희도 만난 사실을 밝히라고 공세를 폈다. 현재 황태성의 조카딸과 그 남편이 과거사 진상규명을 청원해 놓고 있어서 여러 의문점에 대해 진실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질지 주목된다.

2심에서 공소기각 → 대법원 파기환송 → 원심대로 사형확정

중앙정보부의 발표는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정치 목적과 공작석인 냄새를 많이 풍긴 것이 사실이다. 황태성은 남한에 도착한 1961년 8월 말 이후 체포 시점인 10월 20일까지 그 사이 최고회의의장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만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황태성은 당시 다른 재소자들에 의해서 신분이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출소한 후 황태성 사건을 야당 인사들과 주한미군 측에 제보했다. 그러자 야당은 국회에서 진상조사를 요구했고 주한 미 CIA도 황태성을 인계해 달라며 압력을 가했다. 중앙정보부는 그를 2주일간 미국 측에 넘겨주어야 했다. 미국과 체결한 군사기밀협력협정을 내세운 요구인데다 또 군사원조와 식량원조라는 무기 앞에서 거부할 수 없었다.

미 CIA는 황태성에게 주로 박정희와의 친분관계를 캐물었다. 황태성은 일 주일여나 아무 답변도 하지 않은 채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들은 험악하게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압박했다. 그러나 한국 중앙정보부나 미 CIA에서 고문은 없었다. 그래도 북한 체제의 고위급 인사이기 때문에 간첩이기보다는 밀사로서 예우해 준 셈이었다.

그해(1961년) 12월 1일 황태성과 김민하, 조카딸 임미정의 남편 권상능이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구속 기소됐다. 채 한 달도 안 된 12월 27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는 황태성에게 사형, 권상능에게 15년, 김민하에게 10년을 각각 선고한다. 엄청난 중형이었다. 무엇보다도 남북 고위당국자 간의 대화를 위해 밀사로 온 황태성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북한에 대화 거부를 선언하는 결과였다. 6·25전쟁 이후 그때까지는 남북 간에 대화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 관계에서도 최고 실권자가 보낸 사신을 처형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선전 포고로 간주되고 전쟁으로 돌입한다는 신호였다. 적국의 군인도 무장하지 않거나 포로로 잡히면 죽이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외교관 개념에 포함시킬 수 있는 밀사나 사신의 경우는 더욱 그 신변이 잘 보장되는 것이 오랜 불문율이다.

그러나 2심 재판 결과가 중요한 의미를 던져 주었다. 1962년 9월 육군고등군법회의 2심은 황태성에게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권상능은 징역 2년, 김민하는 징역 1년6월로 대폭 낮추어졌다.

그러자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불복 상고했고 대법원이 법 적용을 잘못했다면서 육군고등군법회의에 파기 환송했다. 1963년 7월 상고심에서 황태성은 1심대로 사형, 김민하와 권상능은 2심의 징역형으로 확정됐다.

이제 황태성이 살아날 길은 국가수반의 감형이나 특별사면밖에 없다. 그러나 1963년 9월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 유세가 시작되자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후보의 좌익경력을 들추었다. 대통령 선거전에서 이른바 사상논쟁의 포문을 연 것이다.

야당은 공명선거 투쟁위원회 집회를 연달아 열어 "간첩 황태성이 공화당 사전조직 요원의 밀봉교육을 담당했다"며 공화당을 좌경집단으로 모는 삐라를 대거 살포했다.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가 진화에 나선다.

"황태성은 반미 운동을 지령받고 남하해 고위층과 접촉하려다 실패한 자다. 간첩 황이 박의장과 만났다거나 친면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일 뿐이다."

박정희 선거유세 중 직접 해명 "일제 때부터 형 친구였다"

1963년 12월 17일 치러진 제5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모습
 1963년 12월 17일 치러진 제5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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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야당 측 공세에 대해 박정희 후보 자신은 1963년 10월 10일 투표일 직전 유세를 위해 안동으로 가던 열차 안에서 직접 해명했다.

"황태성은 일제 때부터 형과 친구였다. 그런데 해방 후에 보니 황은 빨갱이였고 그가 이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5·16이 나던 해 9월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황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간첩으로 남하해온 것을 체포했다고 보고해 왔다."

박정희의 직접 해명도 야당 후보 진영의 공세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 다행스럽게도 국민 여론은 의외로 무반응이었다. 사상논쟁이 오히려 윤보선 후보에게 역풍을 안겨주었다는 평가도 많았다.

1963년 12월 초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사형이 확정된 황의 사형집행 승인서류를 내밀었다. 그때 박정희는 12월 17일 대통령 취임식을 일주일 여 앞둔 당선자 신분이었다. 황태성은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 심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
"미국과 야당에 몰리지 않으려면 사형 집행해야 합니다"

박정희는 일말의 감성이 움직였던지 망설였다.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선거과정에서의 시비가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다고 판단한 김형욱은 강한 어조로 결단을 재촉했다.

"각하, 우리가 미국과 야당에 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사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박정희는 체념한 듯 서류에 사인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12월 14일 토요일 오전 11시 20분, 황태성은 인천 근교의 한 육군부대 안에서 총살형이 집행됐다. 이례적으로 정부는 형 집행을 발표했다. 미국과 야당 뿐아니라 국민 보수층의 의심스러워 하는 눈초리를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기 사흘 전이었다. 

그 후에도 야당은 황태성의 오키나와 생존설을 제기해 이듬해인 1964년 정치쟁점으로 되살리고 끝내 국정감사로까지 몰아갔다. 국회 국정감사에선 문서와 사진 외에 입회한 군목과 기자의 증언까지 들었으나 미심쩍은 점이 있다는 소수의견을 남겼다. 1990년대 초 어느 주간지는 황태성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황태성 사건은 여러 가지 소회를 남겼다. 그는 남북대화의 역사에서 상대 체제에 의해 처형된 최고위급 인물이었다.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사업'을 위해 남하한 지식인으로서 간첩활동이나 파괴적인 폭력활동도 하지 않은 밀사에게 극형을 가한 것은 비문명적이라는 지적을 낳았다. 2심 법정이 그에게 공소기각 판결을 내리기도 했지만 끝내 처형을 면하지 못한 것은 냉전체제의 비극이었다.

미국의 압력 때문이든, 야당 측 정치공세 때문이든, 박정희에게 황태성은 청소년기 멘토였지만 정치적 앞날을 생각할 때 "빨갱이였고 간첩"일 뿐이었다. 더구나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서 풀려난 이후 더욱 강경한 좌익 척결주의와 대북 대결주의자로 변신했다.

자신의 가족사에서 매우 깊은 관계였으며 청소년기 멘토인 그를 감형이나 특별사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태성의 죽음도 박정희의 변신이 가져온 비극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 통치 아래서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사법살인' 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인혁당 간부들을 비롯한 숱한 원혼들처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1963년 9월 중앙정보부의 황태성 사건 수사 발표와 관련자 증언 인터뷰, 국회 속기록과 언론 보도 등을 교차 검증하여 작성했다.



태그:#박정희 멘토, #황태성 처형 , #김종필 , #북한 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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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 방송통신위 상임위원-방송평가위원장, 서울디지털대 총장 등 역임. 현재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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