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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공군에서 새로운 '불온서적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거기에는 2008년에 선정된 불온도서 23종에, <낯선 식민지, 한미FTA> <길에서 만난 사람들> <슬롯> 등 19종의 책이 추가돼 있었습니다. 새롭게 불온도서 목록에 이름을 올린 이 책들은 과연 얼마나 불온한지, '불온도서를 읽다' 시리즈를 통해 불온하게(?) 읽어보겠습니다. [편집자말]
<길에서 만난 사람들> 표지
 <길에서 만난 사람들> 표지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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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하종강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어떤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전국 곳곳을 누비며 1년에 300회에 가까운 노동교육을 하는 사람. '집단이기주의'니 '시민에게 불편을 끼치는 파업'이니 하는 노동운동에 대한 수많은 비판에 맞서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라고 역설하는 사람. 성공회대 노동대학장, <작은책> 편집위원 등의 공식적인 직책보다도 그저 '노동자의 벗'으로 기억되고 싶어하는 사람. 하종강은 그런 사람이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종강이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한겨레21>에 '하종강의 진짜 노동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골라 엮은 책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섰다가 내려선 길에 아직도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삶을 글로 썼다. 그렇게 이 책이 탄생했다.

이 길을 걷는 이유, '인간에 대한 애정'

하종강이 만난 사람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비주류에 속한 이들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억압받고 소외당한 수많은 소수자, 이를 테면 노동자, 여성, 장애인, 해방공간에서 학살당한 민간인의 편에 서서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청구성심병원 노동조합에서 일하던 권기한은 회사의 일상적 폭행과 협박에 시달린다. 자신을 폭행했던 간부가 오히려 자신이 폭행당했다며 1000만 원이 넘는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직원들이 슬며시 다가와 "밤에 길 가다 만나면 죽을 줄 알라"고 속삭이는 등 수시로 폭행과 협박에 시달리다가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다.

"내가 당하는 일이 너무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더군요. 2001년 9월에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어요. 열심히 다녀서 다 나았는데…. 병원에서 계속 부딪치니까 다시 또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런가 하면 발전노조 파업을 이끌었던 전승욱은 교도소에서 해고 통지서를 받고, 102억 원을 가압류당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길에서 내려올 수 없는 것은 사회주의나 거창한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송영수는 하종강의 오랜 후배다. 엄혹하던 1980년대에 송영수가 고문을 받다가 하종강의 이름을 대는 바람에 하종강은 말로만 듣던 통닭구이, 비녀꽂기 고문을 당한 일이 있다. 송영수는 그 후로 해고노동자복직투쟁위원회, 부산노동자연합, 민주노총 등을 거치며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그 사람들 얼굴이..."

인터뷰가 끝날 즈음에 송영수는 하종강에게 아직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하종강은 "세계관이 아직 바뀌지 않았거든"이라고 대답하지만, 송영수는 피식 웃으며 "그런 것 때문이었다면 나는 벌써 포기했을 거예요"라고 받아친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이를테면 하 선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어요. 그거 아세요? 나 때문에 고문당했던 사람들, 나 때문에 징역 산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인연이 나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이 자꾸 나를 붙드는 기라. 그동안 내가 만났던 노동자들의 얼굴이 나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자꾸 붙드는 기라."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전태일평전>을 떠올렸다. <전태일평전>에는 감동적인 구절이 너무나 많지만, 그중에서도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머니는 며칠째 지친 얼굴로 새벽녘에야 집에 들어온 전태일에게 어찌된 일인지 묻는다. 그때 전태일은 이렇게 대답한다.

"오다 파출소에서 자고 왔어요. 어머니가 나 집 나올 때 차비 30원을 주잖아요. 시다들이 밤잠을 제대로 못 자서 낮이면 꾸벅꾸벅 졸고, 일은 해야 하는데 점심까지 쫄쫄 굶기에 보다못해 그 돈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여러 사람한테 나눠주었더니 한 시간 반쯤은 견디고 일해요. 그래서 집에 올 때 걸어왔더니 오다가 시간이 늦어서 파출소에 붙잡혔어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전태일의 투쟁은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애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다들이 점심을 거르며 일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버스비가 없어 두세 시간을 걸어 집으로 향했던 전태일이기에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차마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종국에는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을 위해 자신의 몸까지 불살랐던 것이 아닐까.

하종강이 만난 사람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어떻고 자본주의가 어떻고 하는 추상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과 자기 주변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할 뿐이다.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그들을 길로 이끈 것이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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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반대말이 '휴머니즘'이었나

지난 8월 공군에서 작성한 '불온서적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이 책. 하종강은 지난 11월 14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제 책은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가 해고된 사람 등을 인터뷰한 내용인데 인터뷰 대상자 중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를 부정하거나 사회주의를 강조하지는 않는다"며 "도대체 불온서적의 선정 기준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최신 불온서적 목록 중 '반자본주의' 항목에 속해 있음에도 막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휴머니즘'이다.

하종강은 인터뷰할 사람을 정한 기준 중 하나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그가 만난 사람들은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걷는다. 하종강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에서 일하는 이형숙에게 활동비는 나오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형숙은 이렇게 대답한다.

"첫 달에 조금 받고 그 다음부터는 거의 못 받았어요. 받을 생각도 별로 없어요."

하종강은 그의 대답을 단 한마디로 평가한다.

"이런 사람이 요즘 세상에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목록은 계속 이어진다. 그들을 위해서 뭔가 하는 것보다 그들과 같아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스스로 도시 빈민이 됐던 시흥여성인력개발센터의 조옥화, 한 달에 60만 원을 받는다고 웃으며 말하는 노동정보화사업단의 이용근, 낮은 생활비를 받으면서도 매년 최고 연봉액을 경신하고 있다고 웃는 씩씩이어린이집의 박인해…. 모두가 경제적 이득보다 인간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리 사회의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살고 있다.

문제는 휴머니즘 자체다.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더라도, 경제적 이득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이미 불온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든가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돈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불온한' 일이다.

불온한 시대를 살아가는 올바른 '길'

<전태일평전> 표지
 <전태일평전> 표지
ⓒ 아름다운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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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태일평전>을 보자. 전태일이 처음부터 업주에 맞서 싸우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재단사로서 재량껏 시다들에게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해줬을 뿐이다. 그러나 업주는 그것조차 견딜 수 없었다. 피곤해하는 시다들을 일찍 집에 보내고 그들의 일을 대신 해주는 전태일의 모습을 보며 업주는 '자꾸 그러면 시다들의 버릇이 나빠진다'고 꾸짖는다. 전태일은 시다들이 일할 만큼 자신이 대신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하지만, 업주는 몇 차례 그런 일이 생기자 전태일을 해고한다.

전태일은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이 바닥에서는 최소한의 인정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깨달음. 그가 다른 재단사들처럼 시다들에게 잘해주지 않고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돈 벌 생각만 했다면, 업주들의 착취를 못 본 체하고 자기 생각만 했다면 해고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태일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시다에게 인정을 베풀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했던 전태일의 시대. 책 내용이 인간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온서적으로 선정되는 우리의 시대.

그래서 불온서적을 읽으며 오히려 우리 사회의 불온성을 다시 생각한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불온한 것이 되는 사회. 인간보다 돈이 더 중요한 가치로 공인되고, 자본의 논리 앞에 수많은 노동자가 부당하게 정리해고당하는 사회. 309일 동안 고공 크레인에서 농성을 벌이고, 다섯 번의 희망버스가 떠나고, 국회 권고안이 나온 뒤에야 간신히 정리해고가 철회되는 사회.

이 불온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길일까. 그 해답을 알고 싶다면 우리 시대의 불온서적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짧은 글에는 담을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해답을 알려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길에서 만난 사람들> 하종강 씀, 후마니타스 펴냄, 2007년 7월, 338쪽, 1만2000원



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2009)


태그:#하종강,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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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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