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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 기자말

 대위시절의 전두환
 대위시절의 전두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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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한 해가 저물어가던 12월 어느 날,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전두환 대위를 불러들였다. 쿠데타 세력의 정당으로 민주공화당이 이름을 정하고 발표되기 직전이었다. 전두환은 5·16 쿠데타 후 최고회의 민원비서관을 거쳐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전두환이 이렇게 중용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 하겠나."

박정희의 갑작스런 말에 전두환은 깜짝 놀란다. 그때만 해도 국회의원 출마란 지역에서 이름깨나 있는 유지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제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합니까."
"이봐, 국회의원이 뭐 별거야. 하면 하는 거지 왜 못해."
"아닙니다, 저는 군에 있는 게 좋습니다."

차지철은 국회의원 출마, 전두환은 엄두 못내

정치군인 중에서도 상 정치군인이라 할 수 있는 전두환도 그때는 국회의원을 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국회의원은 너무 높았고 그저 군사혁명의 힘을 받아 군에서 진급과 보직이 유리해지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박정희는 대위인 차지철에게도 이미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고 그렇게 하기로 내락을 받아놓았기에 한 번 더 종용했다.

"내년 민정이양을 하려면 자네 같은 사람이 정치에 나서는 것이 필요해."
"각하, 저는 어려운데요, 주변에 의논도 해봐야 하고 시간을 좀 주십시오."
"남자가 하는 일에 상의는 무슨 상의…. 그러면 이틀 후에 다시 오지."

당시 쿠데타 세력은 공화당을 조직하기 위한 비밀 작업으로 1000여 명의 예비 사무당원들을 중앙정보부 시설에서 밀봉교육 식으로 훈련시키고 있었다. 김종필·홍종철·길재호·오치성 등이 중심이었다. 다른 정치인과 정당들은 모두 활동을 금지시켜 놓은 채 자기들만 비밀리에 창당을 서두르는 얌체 짓이었다. 이것이 우리 정당사에서 문제가 된 '공화당 사전 조직 사건'이다.

이때 4년제 정규 육사 첫 졸업생인 11기 중에서도 특히 영남 출신은 쿠데타 이후 상당수가 최고회의 비서실, 중앙정보부, 방첩대 등의 핵심보직에 배치됐다. 노태우는 방첩대 내사과장, 손영길은 최고회의의장 비서실에서 일했다. 이들을 스카우트하는 역할은 최고회의 의장 경호대장이던 박종규 소령이 담당했다. 박정희가 직할했음을 알 수 있다.

육사 11기 영남 출신들은 비록 쿠데타 주도세력에 끼지는 못했지만 그때부터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군 내부의 정치장교 지하 사조직 '하나회'가 태동할 수 있었다.

전두환이 박정희의 권유를 받고 상의한 사람은 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이던 윤필용이었다. 그는 윤필용에게 어렵다는 뜻을 말하고 의장 각하께 잘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했다. 윤필용은 이때부터 박정희의 후원을 받는 하나회의 중간 관리자 격이었다. 그 위상은 1973년 3월 세칭 윤필용 사건이 터져 종식된다. 

박정희는 다시 전두환을 불렀다.

"어때, 생각해 봤나."
"각하, 저는 출마할 만한 돈도 지역기반도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라는 전두환의 이 말이 박정희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바로 그것이었다. 끝까지 권력을 옹위해 줄 친위대가 군부 내에 강성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육사생도들과 북극성 동창회는 쿠데타 지지 거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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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더이상 전두환에게 정치권 진출을 권하지 않았다. 용도가 분명히 정해진 셈이었다. 이것이 훗날 김재규에 의한 10·26 거사가 터진 뒤,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을 거쳐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의 씨앗이 될 줄 그 당시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을 터다. 박정희가 그때 차지철처럼 전두환을 정치권으로 끌어냈더라면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부질없는 역사에서의 가정이지만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박정희는 전두환이 전방이나 후방 어디에서 근무하든 1년에 두어번 그를 불러 만났다. 골치아픈 일에 대해서도 의견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박정희가 전두환에게 '하사금'을 주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박정희가 전두환에게 국회의원을 하라고 권유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5·16 쿠데타가 발생한 날, 서울대 문리대 ROTC 교관으로 근무하던 전두환 대위는 재빠르게 오전 8시경 육군본부에 나타난다. 육사동창회인 북극성회의 서울 지부장인 이동남 대위와 함께였다. 이미 고참 대위가 된 이들도 고위 장성의 부관이나 육군본부 등 수도권 부대에 근무하는 동기생들이 상당수여서 무시할 수 없는 정보 네트워크가 갖추어져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오후 2시 반경, 서울 태릉의 육군사관학교.

육사 연병장에 지프 한 대와 트럭 2대가 들이닥쳤다. 착검한 M1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이어 지프에서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번뜩이며 장교 3명이 내렸다. 이들은 기세 등등하게 학교 본부로 들어갔다. 육사 8기의 쿠데타 주체세력 핵심인 오치성 대령(후에 공화당 사무총장, 내무장관)과 박창암 대령(혁명검찰부장, 나중에 반혁명사건으로 투옥), 차지철 대위(후에 국회 외무위원장, 청와대 경호실장)였다. 육사를 '혁명대열'에 끌어넣는 것이 이들의 긴급 임무였다.

쿠데타 군 측에서 온 오치성과 차지철은 육사 간부장교들과 생도대표에게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생도대표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학교 지휘계통은 육본을 장악한 혁명위원회의 명령이 옳은지 그른지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북극성 동창회의 선배들과 상의하겠다."

그러나 생도대표들과 북극성회 간부들이 가진 시국대책회의에서는 쿠데타 측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시 북극성회는 육사 11기 이후 졸업생이 참여하는 순수한 동창회였다. 주로 성적우수 졸업자들로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는 동기생들이 간부를 맡았다. 전두환 등의 하나회계는 성적우수자가 없었으며 교수요원도 없었다. 전두환은 그러나 교수부 동기생들을 통해 북극성회와 생도대표들의 동향을 기민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전두환의 밀고 "강영훈 교장이 육사생도들 지지행진 방해"

전두환은 육군본부에서 이상훈(육사11기, 노태우 정부 때 국방장관 역임) 등과 함께 정규육사 출신들이 모여 박정희 주도의 군사혁명에 적극 가담하기로 결의한다.

5월 16일 저녁, 전두환 등은 육본에 설치된 군사혁명위 본부에 들어가다가 김종필과 마주쳤다. 전두환은 김종필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하면서 왜 우리에게는 아무 연락도 안 했습니까."
"비밀 유지도 어려웠고 서두르다 보니 다 연락하지 못하고 빼 먹은 데가 생긴 거 같은데, 어쨌든 지금부터 협력합시다."
"그렇잖아도 지금 막 저희 동기생들이 모여 육사 동창생들은 이번 군사혁명에 적극 함께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아, 그래요, 잘 됐군요."
"육사생도들의 지지시위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한데, 잘 안된 모양입니다. 우리가 맡아 해 보겠습니다."
"좋아요. 차량 등을 지원하라고 할 테니까, 성공시켜 봐요."

전두환 등은 그날 밤 차량과 무기를 지원받아 육사로 갔다. 그러나 육사에 근무하는 장교들은 쿠데타 반대 분위기였고 더구나 강영훈 교장이 일절 움직이지 못하도록 금족령을 내린 상태였다.

다음날인 5월 17일 저녁, 육사 교장 강영훈이 육군본부로 간 것을 알고 전두환은 뒤쫓아 갔다. 육본의 쿠데타 본부에서 강영훈은 장도영과 박정희로부터 육사생도들의 지지시위를 독촉받는다. 그러나 강영훈은 "생도들 중에도 찬반이 갈려 있어서 어렵다"면서 "억지로 시가행진을 시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다"고 반대의사를 폈다.

이때 전두환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전두환은 쿠데타 주모자들인 박창암· 박치옥 대령에게 "강영훈 교장이 육사 장교들과 생도들에게 금족령을 내려 혁명 지지시위가 방해받고 있다"고 일러바쳤다. 그때까지 들었던 강영훈의 상황 설명과 딴판이었다. 강경파로 후에 혁명검찰부장을 맡았던 박창임은 강영훈과 전두환을 대질시키자고 나섰다. 그러나 아직 반혁명으로 찍히기 전의 고위장성과 새파란 대위급 장교를 대질시키지는 못했다.

그때까지 쿠데타의 최고지도자이던 장도영 육참총장이 전두환에게 물었다.

"귀관들, 육사쪽이랑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오?"
"각하, 저희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저희 육사출신 장교들과 생도들은 군사혁명에 신명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육사교장 강영훈 구금 후 생도 시가행진...전두환의 공으로

 강영훈 전 육사장교, 한국의 제2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자료사진).
 강영훈 전 육사교장, 한국의 제2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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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안에서 강영훈과 면담하던 박정희가 나왔다. 박정희는 박창암에게 지시했다.

"강영훈 교장의 얘기가 전두환 대위랑 이 사람들과 달라요. 강 교장을 조치하시오."

박창암은 즉각 강영훈을 구금했다. 야전군사령부에서도 이한림의 '쿠데타 묵인'소식이 들려왔다.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는 북극성회 간부들은 쿠데타 반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인 5월 18일 오전 9시, 육사생도들은 장교단과 함께 교문을 나서 동대문으로 향했다. 생도 800여 명과 육사 소속 장교 및 졸업생 200여 명 등 1천여 명이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동대문에서 남대문을 거쳐 소공동과 시청 앞 광장으로 행진했다.

육사생도 시위대의 직각보행을 본 서울 시민들은 구경하다가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이것으로 쿠데타가 국민 여론의 상당한 지지를 받는 것처럼 비쳐졌다. 더욱 중요하게는 미국의 각종 주한 기관들, 즉 대사관과 8군과 CIA가 '민심 우호적'이라는 보고서들을 띄웠다는 사실이다.

전두환은 이렇게 5·16 쿠데타에 상당히 깊숙이 가담했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1979년 일어난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8 광주시민항쟁 살상진압 등의 내란은 모두 전두환이 그 수괴였다. 이는 대법원에 의해 이미 확정된 판결 내용이다.

그래서 전두환은 5·16과 12·12와 5·18이라는 군사반란과 내란에서 모두 중요한 종사자인 셈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반란 3관왕'의 기록을 남겼다. 우리나라 역사 뿐 아니라 세계 정치사에도 한 개인이 '반란 3관왕'이 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박정희에게는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이 전두환의 공처럼 인식됐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가 전두환을 총애한 것은 당연했으며 군부내 친위대로 키워갔다. 그 전두환의 정치군인으로서의 행보는 묵묵히 일하는 군내 다수인 직업군인들을 좌절시켰고 더구나 수많은 국민들을 유혈 탄압하게 된다. 이 역시 박정희가 씨를 뿌려 놓은 죄과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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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등 역임. 현재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