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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 골목 안에 있던 만화가게를 그대로 재현한 전시물.
 주택가 골목 안에 있던 만화가게를 그대로 재현한 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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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 공중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만화 주인공 라이파이. 라이파이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는 1959년부터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 <피너3세와 파이파이> 등의 제목으로 발표돼 1962년까지 4부작 총 32권이 출간됐다. 라이파이는 한국 최초의 SF만화로 알려져 있다.
 악의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 공중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만화 주인공 라이파이. 라이파이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는 1959년부터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 <피너3세와 파이파이> 등의 제목으로 발표돼 1962년까지 4부작 총 32권이 출간됐다. 라이파이는 한국 최초의 SF만화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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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보던 만화가 몹시 그리울 때가 있다. 지금은 제목도 만화를 그린 사람의 이름도 다 잊었지만, 만화를 구성하던 이미지는 상당 부분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렸는데도 잔상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시 만화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만화 못지않게 그 만화를 보던 풍경 역시 언제든 되살려내고픈 기억 중에 하나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 날,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만화를 보던 시절만큼 행복했던 때도 없었다. 다 본 만화책을 만화방에 반납하고, 새 만화책을 빌려오는 길에서 느끼는 가벼운 흥분 역시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그때 내가 느끼는 행복은 늘 내가 만화방에서 빌려 보던 만화책의 권수에 비례했다. 만화방은 꿈의 동산이었다. 아름답고 멋진 세상,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이 모두 다 거기에 있었다. 내 주변에는 없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꼭 있을 것만 같은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내가 상상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나타나고,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세상이 바로 만화방이었다. 꿈꾸던 일,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을 그대로 눈앞에 드러내 보여주던 곳이 만화방이었다. 꿈을 먹고 살던 시절, 그때 그 만화방마저 없었다면 세상은 얼마나 각박했을까?

한국만화박물관 전경.
 한국만화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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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되살아난 만화방, 한국만화박물관

만화를 그리다 지쳐 잠든 만화가. 아이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만화가가 꾸는 꿈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만화를 그리다 지쳐 잠든 만화가. 아이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만화가가 꾸는 꿈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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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멀어질수록 더욱 더 간절해지는 법. 그래서 그런지 세월이 흐를수록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을 때가 점점 더 잦아진다. 그만큼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어딘가에 그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그리워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 과거를 기록하고, 재현해 놓은 곳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곳이 '전시회'라는 이름으로 가끔 고개를 내민다. 그렇지만 전시회는 일과성이다. 시간이 지나면 바로 철거해 버리는 기억이다. 뒤늦게 찾아간 전시회, 텅 빈 전시 공간은 오로지 추억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강조할 뿐이다.

그래서 '박물관'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그 만화방, 검게 때가 탄 나무 의자에 앉아 보던 그 만화들을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허망한 꿈이 결코 허망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현실로 되살아난 만화방, 그곳이 바로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한국만화박물관'이다. 그 박물관이 과거로 떠나는 여행 기회를 제공한다.

날이 추워지면서 길가에 군고구마 장수가 늘고 있다. 고구마 구워 파는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그 옛날 만화방 연탄난로 위에서도 고구마는 익고 있었다. 겨울은 군고구마 먹으며 만화책 보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박물관이 그 '따끈한 군고구마'를 허락하지 않는 게 아쉬울 뿐이다.

한국만화박물관 전시물 일부.
 한국만화박물관 전시물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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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만화, 신성장 산업으로 거듭나기까지

박정희 군사정부의 만화 사전겸열
사전 검열을 끝낸 표시로 만화책 표지에 찍었던 심사필 도장(손그림).
 사전 검열을 끝낸 표시로 만화책 표지에 찍었던 심사필 도장(손그림).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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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 심의가 시작된 것은 1961년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구악을 일소한다는 명분아래 '한국아동만화 자율위원회'를 만들어 사전검열을 시작했으며, 1968년부터는 문화공보부 산하에 '한국아동만화 윤리위원회'를 만들어 직접 심의하기 시작했다.

심의위원들은 특히 애정묘사나 활극장면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과민반응을 보였으며 위원들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원고 수정지시 또는 출판금지를 명령하여 만화가들의 창작의욕을 크게 꺾었다. - 한국만화박물관 '한국아동만화 윤리 강령' 설명문 중에서

한국만화박물관에서는 만화와 관련해 다양한 주제를 가진 전시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그때그때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고, 상설전시실에서는 '한국만화 100년의 발자취', '추억의 만화방', '4D 애니메이션'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좀 지루한 감이 있지만 우리가 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한국만화 100년의 발자취'다.

'한국만화 100년의 발자취'는 한국만화가 어떤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물이다. 5.16군사쿠데타 이후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이 대개 그렇듯이 한국만화 역시 꽤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한국만화는 특히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온갖 천대와 박해를 받았다.

만화는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암적 존재로 지탄의 대상이 되곤 했다. '만화' 앞에 아예 '불량'이라는 딱지를 붙여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았다. 사회를 군대 조직과 같은 것으로 여기던 하드웨어적인 정치가들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고 자유분방한 사고를 일으키게 하는 만화가 꽤 위험해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특히 어린아이들이 만화에 몰입하는 걸 두려워했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닫힌 현실에 저항하며 총을 겨눌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의 만화방이 늘 어둡고 침침했던 건 조명이 낮았던 탓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시대적 배경도 적잖이 영향을 미친 탓이다.

'한국만화 100년의 발자취'는 한국 만화가 그런 어두운 시대를 넘어 오늘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시대의 독재 정권은 어린 아이들이 보는 만화까지 두려워했던, 만화보다 더 코믹한 정권이었다. 그 시대의 '불량 만화'는 결국 그 시대의 불량한 독재 정권을 넘어선다.

기둥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는 혁 형사. 혁 형사는 만화 <동경4번지>(손의성 작. 1958년)의 주인공이다.
 기둥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는 혁 형사. 혁 형사는 만화 <동경4번지>(손의성 작. 1958년)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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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25만여 권 만화 관련 도서 소장

한국만화박물관에서는 이런 전시실 외에도 다양한 체험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스스로 만화가나 만화 속 주인공이 되어볼 수 있는 체험형 전시실인 '체험존'을 들러볼 수도 있고, 상설체험교육으로 '캐릭터배지 만들기' 같은 다양한 만화 관련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어린아이나 청소년 단체 관람객들이 즐길만한 프로그램들이다.

박물관 2층에 만화도서관이 있다. 이곳은 '국내 최대 규모의 만화 전문 자료실'로 25만여 권의 만화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만화는 물론 애니메이션 관람도 가능하고, 12세 이하 어린이들을 어린이열람실도 따로 갖추어져 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박물관 입장권 없이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주말에는 박물관 입장권이 있어야 이용할 수 있다.

상동호수공원. 호수 너머 왼편으로 보이는 파란색 유리 건물이 한국만화박물관.
 상동호수공원. 호수 너머 왼편으로 보이는 파란색 유리 건물이 한국만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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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걸어가다 보면, 상동호수공원을 지난다. 지친 걸음을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호수 너머 공원 북쪽에 어른 키를 넘는 하얀 억새밭이 있다. 10월로 절정을 넘어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억새가 만발하다.

공원 중앙에 호수가 있고 그 호수 둘레로 자전거도로를 놓았다. 공원 둘레로는 언덕을 쌓고 그 위에 산책로를 만들었다. 이 산책로를 걷다 보면, 마치 어느 작은 산등성이를 걷는 듯한 기분에 젖는다. 이 산책로 중간에 한국만화박물관 쪽으로 넘어가는 육교를 만들어 서로 넘나들게 했다.

공원 한쪽에 유채꽃과 보리를 파종했다. 내년 4월과 5월이 되면 공원에 유채꽃과 보리밭이 일렁이는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공원에서는 특이하게도 배추와 양배추가 자라고 있는 밭을 볼 수도 있다. 소박하지만 인간적인 면이 엿보이는 공원이다.

1호선 전철 부개역에서 한국만화박물관 가는 길의 자전거 도로.
 1호선 전철 부개역에서 한국만화박물관 가는 길의 자전거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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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박물관은 전철을 타고 가는 게 바람직하다. 부개역(2번 출구)이나 송내역(2번 출구)에서 내린다. 버스로 10분에서 20분 정도 걸린다. 천천히 걸어서 1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다. 부천은 요즘 전철 7호선 노선 연장 공사를 하고 있어 도심 교통이 꽤 혼잡한 편이다.

박물관 개관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18시까지다. 매주 월요일 휴관이며, 신정과 구정, 그리고 추석연휴 기간은 쉰다. 입장료는 36개월 이상 만 64세까지 오천 원이다.


태그:#한국만화박물관, #상동호수공원, #부천,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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